흰 고래는 영영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언어의 빈 공간에서 배우는 사랑의 문법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모든 말이 결국 번역이라면, 완벽한 소통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계속해서 말을 걸고, 듣고, 이해하려 애쓰는 걸까. 홍한별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를 읽으며 나는 번역이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기술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방식임을 깨닫는다.
20년을 걸어온 번역가의 고백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조앤 디디온, 수전 손택의 작품들을 우리말로 숨 쉬게 한 홍한별. 20여 년간 100여 권의 책을 번역하며 언어와 언어 사이의 새하얀 진공을 탐험해 왔다. 『아무튼, 사전』에서 단어들의 무한한 세계를 어루만졌던 그녀가 이번에는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거대한 은유로 풀어낸다. 이 책은 번역 기법에 대한 매뉴얼이 아니다. 오히려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이자,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탐구하는 한 번역가의 치열한 지적 여정이다.
돌아버릴 지경으로 지연된 만남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 저자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 등장하는 흰 고래를 번역의 완벽한 은유로 소환한다. '에이해브는 책의 4분의 1지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래 뼈로 만든 의족을 딛고 등장한다. 모비 딕은 135장으로 이루어진 책의 133장까지 가야 마침내 드디어 흰빛을 번뜩인다.' 이 '돌아버릴 지경으로 지연된 클라이맥스'는 번역가가 마주하는 원문의 실체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번역가는 매일 자신만의 모비 딕을 쫓는다. 원문을 읽는 순간부터 번역을 완성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진정한 의미는 계속해서 유보되고 미끄러진다. 마치 연인 사이의 진짜 마음이 고백의 순간이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의 모든 침묵 속에 숨어있듯이, 텍스트의 진실 또한 단어들 사이의 빈 공간에서 번뜩인다.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상대방을 이해했다고, 사랑한다고 결론 내리곤 한다. 하지만 진정한 만남은 언제나 '나중에 나타날 모습'을 위해 기다릴 줄 아는 여유에서 시작된다.
모든 색이면서 동시에 무색인 것
그렇다면 흰색은 왜 섬뜩한가. 이슈메일(모비딕의 화자)의 분석을 빌려, 홍한별은 '흰색은 본질적으로 색깔이라기보다 눈에 보이는 색깔이 없는 상태인 동시에 모든 색깔이 응집된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 역설적 정의야말로 번역이 마주하는 딜레마의 핵심이다. 번역문은 아무것도 아닌 투명한 매개체가 되려 하지만 동시에 원문의 모든 뉘앙스와 가능성을 품어야 한다.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흰 고래 같은 텍스트를 만났을 것이다. 잡히지 않는 공허. 포착할 수 없는 의미.'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번역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소통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괜찮다는 대답 속에 숨은 진짜 마음, 아이의 울음 뒤에 감춰진 욕구, 연인의 침묵이 담고 있는 무수한 의미들. 우리는 매일 이런 흰 고래들을 쫓으며 산다. '이쪽을 붙들면 저쪽을 놓치고, 저쪽을 잡으면 이쪽이 사라지는' 그 미끄덩한 의미들을 붙잡으려 애쓰면서.
바벨의 축복, 언어의 풍요로움
흥미롭게도 홍한별은 바벨탑 이야기를 언어의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해석한다. 신이 인간의 언어를 흩뜨려놓은 사건을 통해 '같은 것을 말하는 수만 가지 다른 방식이 생겼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말한다면, '서로 다른 말들의 부딪힘과 어울림, 언어를 가지고 노는 다양한 방법, 날마다 우리가 느끼고 겪는 언어의 신비한 변화,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잃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 시대의 소통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던진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 오해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표현만을 추구하다 보면, 우리는 '흐릿하고 개성 없는 공용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섬밀하고 정교한 언어의 세계'를 놓치게 된다. 단테가 죽은 언어인 라틴어가 아닌 살아있는 속어로 『신곡』을 썼기에 불멸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듯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준화가 아니라 더 탁월한 특이성일지도.
배신이라는 이름의 창조
그렇다면 번역은 왜 배신일까. 홍한별은 히에로니무스가 창세기를 번역하면서 라틴어 '악(malum)'과 '사과(malus)'의 음성적 유사성 때문에 금단의 열매를 사과로 만든 일화를 들려준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의 '과일(peri)'이 번역자의 작은 선택으로 인해 사과가 되었고, 이후 수천 년간 서구 문명의 상상력을 지배하게 되었다.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배신은 단순한 왜곡이 아니다. 오히려 번역은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저버리는' 창조적 행위다.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당신을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나는 수많은 다른 당신들을 놓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한다. 그리고 내일, 또 다른 당신을 위해 다시 선택한다. 번역이 매일의 윤리인 것처럼 사랑 또한 매일의 번역이다.
행간을 헤아리는 마음
홍한별이 번역의 영역을 확장하는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다.
'번역이라는 일이 단어든 의미든 텍스트만 가지고 씨름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에게 밥 안 먹었냐고, 재미없냐고 묻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물었는지 행간을 헤아리는 것까지가 번역의 일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우리가 매일 하는 모든 대화가 번역의 과정임을 깨닫는다. 밥은 먹었냐는 단순한 질문 속에 배려라는 색을 칠할 수도, 간섭이라는 색을 칠할 수도 있다. 상대방의 표정, 말투, 맥락을 종합해서 그 의도를 번역하는 것이 바로 소통의 핵심이다. 험프티 덤프티가 '단어의 뜻은 내가 정한다'고 선언했듯이, 의도가 모든 것을 결정할 때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처를 줄 수 있는 해석과 구원을 건네는 해석 사이에서 가능하면 후자를 선택하는 의도 친화성일지 모른다.
아름다운 간섭, 살아있는 흔적
번역가는 투명해지려 애쓰지만, 역설적으로 그 노력 자체가 번역가의 존재를 드러낸다. 홍한별은 이를 오히려 번역의 미덕으로 본다.
"번역문에는 번역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 흔적이 번역문의 미덕이 된다. 타자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포개어지고 간섭이 일어날 때 아롱거리는 무늬가 언어에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는다."
이 '아롱거리는 무늬‘는 번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쓰는 모든 언어는 사실 혼혈의 언어다. 내가 읽고 사랑한 문장들, 만났던 사람들의 말투, 지나간 경험들의 어조가 얇은 막처럼 포개져 오늘의 내 목소리를 만든다. 완벽하게 원어민 같은 매끈함보다는, 이 미세한 간섭과 충돌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결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내 안의 타자들이 만든 무아레 무늬가 나를 더 풍요롭게 한다.
순수 언어를 향한 꿈
책 중간에 홍한별은 앙토냉 아르토의 발음 불가능한 음절 덩어리들을 언급한다. 'orch torpch', 'ta urchpt orchpt' 같은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단어, 기의를 향하지 않는 기표'. '소리에 신경 쓰면, 의미는 따라올 것이다. 혹은 의미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 이는 벤야민이 말한 순수 언어, 바벨탑 이전의 근원 언어를 향한 염원을 담고 있다.
때로 우리는 의미가 아닌 리듬으로 서로를 이해한다. 아이가 잠에서 깨며 내는 알 수 없는 소리, 사랑하는 사람의 한숨 끝 미세한 떨림. 번역이 의미의 길이면서 동시에 음향의 예술임을, 삶이 문장이면서 동시에 호흡임을 이 책은 잊게 하지 않는다.
끝내 고정되지 않는 것을 사랑하기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를 덮으며, 나는 번역이 단순히 언어의 기술이 아니라 삶의 태도임을 깨닫는다.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함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상대방에게 다가가려는 노력. 하나의 의미로 고정하려는 유혹을 견디고, 무수한 가능성들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두는 것.
홍한별이 해신 프로테우스의 이야기로 마무리하듯, 끊임없이 변하는 대상을 '온 힘을 다해 꽉 붙들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면' 그것은 변신하기를 포기하고 진실을 들려준다. 번역도, 사랑도, 때로는 그렇게 꽉 붙드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다시 변할 수 있음을, 내일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대화의 속도를 반 박자 늦추기로 했다.
상대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을
내 귀가 아직 알아듣지 못한 것을 위해서
내 문장 끝에 여백 하나를 더 두기로 했다.
그 여백에서 당신의 문장이
마침내
눈 덮인 산처럼 번쩍이기를 바라면서.
흰 고래는 영영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흰빛은 우리 사이의 모든 침묵을 비춘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번역하는 법을 배운다.
*이미지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