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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 김애란

규칙을 어겨 미안하지만

by 세잇
사람을 살리는 말은 대개 정답이 아니라 ‘그런데’와 ‘한편’ 사이에서 건네지는 작은 거짓과 빛, 그리고 온기일지 모른다.


김애란 작가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작품으로 삶의 모서리를 쓰다듬어왔다. 안과 밖의 시차를 정밀하게 맞추고 씁쓸함과 다정함이 번갈아 입김처럼 서린 문장으로, 우리가 겨우겨우 버티는 방식을 기록해 온 사람. 연극적인 호흡이 배어 있는 대화, 생활감이라는 단어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촉감, 불쑥 찾아오는 재치. ‘빛과 거짓말 그리고 그림’—그가 새 장편을 이렇게 예고했을 때, 사실 이미 김애란의 페이소스는 그 세 단어 안에 있었다. 빛은 불완전한 살핌, 거짓은 상처를 잠시 덮는 붕대, 그림은 악수 대신 이루어지는 접촉.


이야기는 고2 겨울, 두 달 남짓한 방학을 통과하는 세 아이, 지우, 소리, 채운을 따라간다. 담임이 만든 자기소개 게임, '다섯 문장 중 하나는 거짓말.' 이 작은 규칙이 서늘한 균열을 낸다. 서로의 거짓에 비밀이 섞여 있고 그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다. 지우는 엄마의 부재를 지나 도마뱀 용식을 품고, 소리는 손을 잡는 대신 연필을 잡고, 채운은 집안의 잔혹한 사건을 견딘다. 소설이 영리한 건, 진실을 밝혀내는 서늘한 재미를 좇지 않고, 진실에 닿아가는 동안 무너지고 바뀌는 정서의 지형을 섬세하게 그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만화가 들어온다. 지우가 연재하는 <내가 본 것>은 서사의 삽화가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이 옮겨 심어진 제2의 신경계다. '종이 위에 연필이 마찰하는 순간 떨림', 소설은 그 떨림을 만지작거리며 악수하지 않고도 서로를 만지는 감각을 보여준다.




'작고 말랑한 데다 한 손에 쏙 들어오고 값도 비싸지 않아서였다. 훌쩍 키가 자란 뒤에도 지우는 종종 우울에 빠져들 때면 손에 미술용 떡지우개를 쥐고 굴렸다.'


지우개. 지우개는 이 소설의 소도구이자 윤리다. 삶은 때로 덧칠보다 지움으로 유지된다. 너무 진하게 새긴 선을 조금 옅게 하는 지우개의 일. '옅은 수평선이 가슴을 눌러주는 느낌'. 거창한 도약 대신 무탈이라는 소망을 눌러 고르게 펴는 일. 김애란의 문장은 바로 그 미세한 압을 앎으로써 우리를 살린다.



'지우에게 책을 읽어주던 어른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다정했다. 그건 이미 이야기의 결말을 아는 이들의 평온함,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얼마나 난폭하든 또는 얼마나 위험하는 주인공도 또 자신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것임을 아는 이들의 온화함이었다.'


목소리.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알았다. 좋은 이야기꾼은 결말을 알려주지 않지만, 결말이 있다는 사실을 몸짓으로 전한다. 폭풍이 몰아쳐도 돌아갈 자리가 있을 거라는 온기. 이 소설은 그 온기로 아이들을 감싼다. 돌아가야 할 제자리가 꼭 과거일 필요는 없음을, 서로가 잠시 머물다 쉬어갈 새 자리를 만들어준다는 뜻으로.


김애란은 접속사를 윤리로 쓰는 작가다. 채운이 '논리로 설명 가능한 건 ‘그래서’와 ‘그런 뒤’ 다음에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흥미와 삶의 온도는 ‘그런데’와 ‘한편’에서 오른다. 복수 시점, 만화의 삽입, 어긋나는 시계들 같은 이 소설의 구조는 바로 그 ‘그런데’의 문법으로 사건을 훑는다. 그러니 '규칙을 어겨 미안한데, 지금 내가 한 말 중 거짓은 없어'라는 결말의 어떤 진술은 문법을 한 번 비틀어 진실을 지키는 선언처럼 들린다. 형식을 깼지만 의미를 살렸다. 때로 정직은 규칙보다 더 넓은 규범을 따른다.



가난.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눈송이는 가볍지만 어떤 머리는 그로 인해 이미 금이 가 있다. 그 금 위로 떨어지는 하얀 것을 사람들은 계절이라 부르고 우연이라 부르지만, 당사자에게는 지워지지 않을 사건이다. 같은 눈을 보면서 누군가는 풍경을 찍고, 누군가는 머리를 감싼다. 이 소설은 그 둘의 시차를 끝까지 잃지 않는다. 그래서 또 다른 눈의 장면, 차창에 매달린 눈송이들이 '어떤 거짓은 용서해 주고 어떤 진실은 조용히 승인해 주는 작은 기척'처럼 들릴 때 알았다. 거짓이 반드시 악의의 다른 이름은 아니라는 것을. 허위가 아니라 유예. 아무 말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아직 말할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한 잠깐의 침묵.


떠남.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이 문장에 도망이라는 단어의 먼지를 한 번 털어낸다. 누군가에게서 멀어지는 건 그를 향한 배반일 때가 있지만, 어떤 시간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충성이 된다. '너는 너의 삶을 살아. 나도 그럴게. 이건 희생이 아니란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서로를 향한 배려가 아니라 서로를 위한 배분이 된다. 각자의 생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일. 우리는 흔히 관계를 붙잡는 게 사랑이라 믿지만, 이 소설은 거리를 마련해 주는 사랑도 있음을 알린다. 멀어짐은 붕괴가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지지대일수도.


빛. '옛 화가들이 눈동자에 찍는 아주 적은 양의 흰 물감' 같은 빛. 그것은 거대한 서사의 구원도, 대낮 같은 밝음도 아니다. 단지 한 사람의 정수리를 데우는 소량의 온기. 겨울 바다에서 파도를 타다 쓰러지며 웃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위험의 빛이 번쩍일 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두려움의 반대’가 아니라 ‘두려움을 데리고 가는 기쁨’이다. 삶은 안전해진 다음에 시작되는 게 아니라 안전하지 않음을 감내하겠다고 결정하는 순간에 비로소 진행된다. 김애란 작가는 그 미세한 결심을, 눈썹을 스치는 정도의 바람으로 써 내려간다.


작가에 대하여 말을 보태자면, 그는 요약을 거부하는 인물을 오래 쫓아온 사람이다. ‘달려라, 아비’에서의 발랄함, ‘바깥은 여름’의 응시, ‘두근두근 내 인생’의 애수. 그의 작품들은 늘 제자리에서 반 보씩 옮겨 앉는다. 이 작품에서는 그리는 행위가 서사의 심장으로 들어왔다. 말로 하면 훼손되는 마음을, 그림으로 묽게 펴 바르는 일. 말보다 그림, 그림보다 침묵이 더 안전한 순간들을 그는 정확히 안다. 그래서 인물들은 서로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도 포개진다. '누군가와 악수하지 않고도 접촉하는 듯한 감각' 이 문장이, 김애란 소설의 오래된 미덕을 낯설게 다시 만든다.


다시 지우개로 돌아가 보자. 지우개는 틀린 것을 지우는 도구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진심을 옅게 만드는 도구였다. 어떤 진실은 날 것으로 건네면 칼날이 되고, 약간의 고무가 그 칼날을 뭉툭하게 만든다. 우리는 왜 가끔 거짓을 섞는가. 고의적인 속임이 아니라 도달하지 못한 성숙의 여백, 그 여백을 안전하게 통과하려고. 이야기의 거짓은 현실의 진실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실이 우리를 다치지 않게 들려주는 기술이다. '규칙을 어겨 미안한데', 그리하여 그 규칙은 잠시 깨지지만, 마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사람은 서로를 고치지 못할지 모른다.

대신 우리는 서로의 가장 아픈 문장에 작은 흰 점을 찍어줄 수 있다.

아주 소량이겠지만, 영혼을 표현하는 데 꼭 필요한 그 점.

누군가의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다른 선택지를 제안해 주는 것.


누군가의 눈송이가 유독 아프게 떨어질 때 잠시 지붕이 되어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데’와 ‘한편’을 아끼는 문장으로 서로의 삶을 이어주는 것.

삶은 그렇게 천천히 덧붙여진다.


덜 상처받는 쪽으로

더 무탈한 쪽으로


규칙을 어겨 미안하지만, 지금 이 글에서 내가 당신에게 한 말들 중엔 거짓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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