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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 장류진

삶이라는 끝없는 도로주행 위에, 우리는 여전히 연수생이다

by 세잇
우리는 속으로는 울면서도 겉으로 웃는 법을 배우는 사이에 겨우 사람다워진다.


이 소설집을 읽는 동안 내내 떠오른 감정은 '부끄러움의 경제학'이다. 돈으로 셈해지는 세계뿐 아니라 품, 체면, 말의 온도까지 저마다의 단가가 매겨진 세계. 「연수」의 문장들에서 이미 가격표가 달그락거린다.


카페에서 육아용품들이 거래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입던 팬티까지 사고파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입던 팬티를 천 원 주고 사는 삶과 입던 팬티를 팔아서 천 원을 버는 삶, 둘 다 생경하게 여겨졌다 - 「연수」


여기엔 가난만 있지 않다. 부끄러움을 견디는 기술, 나를 보호하기 위한 체면의 장치, 남의 시선을 건너 안전지대에 도착하려는 사람의 간절함이 있다. ‘천 원’은 우스운 금액이 아니라, 오늘을 건너 내일로 이어주는 최소한의 다리다. 이 소설집은 그 다리를 어떻게든 건너는 사람들의 일기다. 그리고 그 건너는 방식은 제각각 다르지만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품는다. 바로 '부끄러움을 다루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표제작 「연수」에서 운전을 배우는 주연은, 사실 핸들을 잡는 법보다 목덜미의 힘을 푸는 법을 배운다. 스피커폰 너머로 들려오는 강사님의 ‘잘하고 있어’라는 위로는 기교가 아니라 생존의 문장이다. 맘카페를 전전하며 얻어낸 '도로연수 추천 강사'는 만나자마자 주연의 혈액형과 나이를 셈하며, 돌려 깎는 조언으로 불편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우리는 불편에만 머물지 않는다. 운전석에 앉아 타인의 무례함을 통과해 결국 자신의 길로 나아가는 연습, 그게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나는 '연수'라는 단어가 기술 습득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다루는 편안한 자세를 익히는 수련'이라는 뜻으로 읽혔다. 이 소설이 운전면허 취득기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운전이 아니라 세계를 통과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동계올림픽」에서 선진은 작은 방송사의 인턴으로 얼어붙은 세계를 훑는다. 그 세계는 냉정하고, 꿈은 자주 미끄러진다. 그렇지만 꿈은 아주 묘한 방식으로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불러온다.


그 말, 그 말은 정말로 부드러운 말이었지만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 꽁꽁 봉인해 두었던 말캉한 주머니를 날카롭게 푹 찌른다. 그 말, 바로 그 말에 나는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그 말, 꿈속의 나는 그 말을 듣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해야 한다. 그래서 울어서는 안 되는 상황인데 꿈 밖의 내가 너무 놀란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난다. 분명 우는데 꿈속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다행히 그녀는 내가 운 줄 모르고 있다. 마치 방백처럼. 방백 같은 눈물. 그녀는 내가 우는 걸 알아차릴 수 없다. 도리어 웃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마땅하게 여겨진다. 나는 울며, 그러나 웃으며 대답한다. - 「동계올림픽」


그는 운다. 그러나 그 눈물은 무대 바깥에서만 보인다. 이 ‘방백 같은 눈물’이라는 표현은, 우리 모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속으로 흘리는 눈물의 문법을 정확히 설명한다. 회사의 메신저 창을 닫고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네, 확인했습니다’라고 답하는 순간의 통증. 그럼에도 선진은 화면을 잡고, 우리는 페이지 밖에 서서 그 장면을 본다. 결국 이 이야기의 메달은 성취가 아니라 지속에 있다.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너머에서 계속 서 있으려는 의지, 그게 금빛이다. 꿈이 좌절당하는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꿈이 좌절당한 뒤에도 여전히 출근하고 카메라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은 성공담이 아니라 버팀목의 기록이며, 우리가 보통 주목하지 않는 포기하지 않는 평범함을 조명한다.




나는 「펀펀 페스티벌」을 읽으며 시선의 거래가 얼마나 정교한지를 새삼 확인했다.


이찬휘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가사를 옮겨 적었다. 정말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 애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사실 이찬휘의 실물을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그 애가종이에 무언가를 적거나 태블릿 PC를 들여다보고 있거나 다른 조원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그 애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때마다 나는 그 애의 얼굴을 허겁지겁 눈에 담았고 면밀히 훑었다. 끊임없이 바쁘게 힐끔거렸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그 애를 보고 있는 동안은 무언가 좋은 것이 내 주머니로 와르르 쏟아져 들어온다는 듯이. 그래서 마지막까지 하나라도 더 필사적으로 주워 담으려는 듯이. -「펀펀 페스티벌」


우리는 멋짐을 소비하면서 동시에 멋짐의 그림자가 된다. 합숙면접이라는 인공의 장치 속에서, 지원은 찬휘를 싫어하면서도 사랑한다. 이 이율배반은 위선이 아니다. 생존의 속도에 맞춰 감정을 압축하는, 현대적 마음의 체력이다. 장류진 작가는 ‘좋아함’이 언제나 ‘통과증’이 된다는 사실을, 누군가를 좋아하는 행위가 때로는 합격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뜨겁다. 우리는 그 감정이 진심인지 전략인지 분간할 수 없고, 어쩌면 지원 스스로도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그 혼란 속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존 구조가 어떻게 감정의 순도마저 희석시키는지를 목격한다. 좋아함이 더 이상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면접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원으로 전환되는 순간의 씁쓸함을 작가는 냉정하게 포착한다.




나를 무리의 마지막으로 들여보내고 뒤따라 들어온 천 사장이 카운터 바로 옆 벽에 걸린 자그마한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노란끼가 많은 조명 아래에서 코트와 머플러를 벗어 든 채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집게핀으로 틀어 올린 풍성한 머리칼, 그 아래로 훤히 드러난 긴 목, 폭이 좁은 브이넥 스웨터와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딱 멈추는 브이넥의 깊이. 그 아래로 보이는 오목한 음영...... 그 그림자는 선이 아닌 점의 형태였다.
나는 그 점이 늘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공모」


「공모」는 권력의 촉감을 다루는 이야기다. 그 촉감은 뺨을 스치는 손바닥이 아니라, 선이 아닌 점의 형태로 남는 그늘이다. 회식이면 2차에 어김없이 들르는 주점 '천의 얼굴'. 천 사장의 목덜미에 박힌 작은 점처럼, 보이는 권력은 언제나 점으로 응고된다. 그 점을 보는 순간 누군가는 징그럽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아찔한 흥분을 느낀다.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그 점을 무엇으로 보나. 도덕의 흉터인가, 욕망의 표식인가. 회식의 관습, ‘은밀한 부탁’, 바뀌는 자리표. 이 모든 건 대문자 부패가 아니라 소문자 합의의 연쇄로 굴러간다. 그래서 더 무섭고, 그래서 더 바꿀 수 있다. 바꾸는 일은 선언이 아니라 다음번의 작은 거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현수영은 몸으로 배운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공모의 시작점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방관자에서 공모자로 전환되는가. 그 경계는 어디에 있으며, 그 경계를 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작가는 해답을 주지 않지만, 질문의 윤곽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한편 「라이딩 크루」는 웃으며 허벅지 근육의 윤리를 이야기한다.


사이클이란 말이야. 그간의 마일리지가 말해주는 거란다. 아무리 키가 크고, 근육질이고, 다리가 길고, 좋은 바이크에 좋은 저지를 입어봤자, 삼 년 넘게 탄 내 실력엔 절대 못 당한단다. 나는 내 허벅지 속 근육에 대한 자부심이 있단다. 삼단 고음의 맛을 좀 봐라. 아주 호되게 한번 당해봐라. 나는 바쁘게 페달을 밟아 아이유고개의 첫 번째 업힐을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라이딩 크루」


자전거는 정직하다. 장비와 제스처, 어휘로 치장해도 오르막은 허벅지의 과거를 증언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제일 시원했던 문장은 '삼단 고음의 맛을 좀 봐라'였다. 해학의 리듬 속에도 삶의 요령이 숨어 있다. 우리는 어느 순간 경쟁을 덜어내려다 또다시 경쟁으로 위안을 받는다.


˝뭐예요? 쿨팬티 입으신 거예요? 저는 순면이라 불리한데요. 팬티도 서로 벗으시죠. 공정하게.˝


라는 말은, 우리가 서로의 가벼움을 들춰보며 진짜 무게를 숨기는 방식에 대한 풍자이자 자백이다. 웃다 보면 우리는 무엇을 증명하려고 그토록 페달을 밟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 작품은 가볍게 시작해 무겁게 끝나는 구조를 지녔다. 처음엔 자전거 동호회의 소소한 에피소드처럼 읽히지만, 결국 우리가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욕망의 메커니즘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자전거를 탄다는 행위는 건강을 위한 것이라 말하지만 실은 누군가를 앞지르고 싶은 욕망, 혹은 뒤처지지 않고 싶은 불안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그 욕망과 불안을 웃음으로 포장하는 우리의 방어기제를 작가는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 소설집은 우리 안의 가장 작은 단위를 교정한다. 돈 몇 천 원, 말 한두 줄, 눈물 한 방울, 오르막의 몇 분—작디작은 단위들의 합이 결국 우리의 품격을 만든다고, 그래서 작가는 그 작은 것들을 미세하게 들어 올려 보여준다. ‘연수’란 이름으로 묶인 여섯 편의 이야기에서 인물들은 기술을 익히지만, 실은 체면을 새로 다룬다. 체면은 버려야 할 허례가 아니라, 나를 사람답게 보존하는 얇은 외피일 때가 있다. 때로는 그 외피를 벗어던지는 용기가 필요하고 다른 때에는 그 외피가 나를 얼음장 같은 바람에서 구한다.


중요한 건 언제 벗고 언제 감쌀지를 가늠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감각은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수없이 부딪히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조금씩 단련된다. 장류진 작가가 그린 인물들은 모두 그 감각을 연마하는 중이다. 완성되지 않은, 여전히 배우는 중인 사람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보며 위로받는다.


내가 그은 밑줄은 결국 같은 문장으로 합류한다. '방백 같은 눈물'은 사회의 장면에서 매일 흘리는 눈물의 문법이고, '마일리지가 말해준다'는 우리가 쌓아 온 삶의 근육에 대한 신뢰다. '입던 팬티 천 원'은 타인의 사정을 쉽게 재단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가격표다. 이 소설집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거창한 선언 대신 작은 단위의 진실을, 화려한 성공 대신 버티는 사람의 등을, 큰 눈물 대신 방백 같은 눈물을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더 진짜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잘하는 사람이 되기 전에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오늘 필요한 것은 거창한 신념이 아니라 아주 작은 단위의 연습들—부끄러움을 다루는 방법, 누군가의 말 한 줄을 내 편으로 돌려놓는 연성, 점으로 남는 권력의 흔적을 알아차리는 시력, 웃음을 핑계 삼아 체면을 조금 내려놓는 순발력, 그리고 아무도 없을 때에도 쓰고, 달리고, 버티는 습관.


그러니 우리는 속으로 울면서도 겉으로 웃는 법을 배우고, 그 사이를 지나는 동안 비로소 사람다워진다. 『연수』는 그 사이를 건너는 연습장이다. 읽는 동안 우리는 번번이 넘어지고, 그때마다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라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아주 조금, 내일의 나를 믿게 된다. 이 소설집을 덮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연수란 결국 실패를 견디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라고. 완벽해지는 게 아니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법을 익히는 시간이라고.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평생 연수 중이라는 것을 장류진은 알려준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위로가 아니라 동행이다. 함께 넘어지고, 함께 일어서는 이들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오늘도 나를 페이지 밖으로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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