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는 무엇을 오래 바라볼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든 상관없이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겠다는 조용한 선언이다.
제니 오델은 참으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스탠퍼드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는 교수이면서, 동시에 일상에서 새를 관찰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새 관찰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예술 작업은 스크린샷을 수집해 미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는 것에서부터 자연 관찰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언뜻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이 활동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주의 깊게 관찰하는'이다. 디지털 세상의 파편화된 정보든, 공원에서 만나는 해오라기의 새빨간 눈이든, 그녀는 무엇이든 오래 응시하며 그 안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본질을 찾아낸다.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2016년 트럼프 당선 이후 그녀가 느꼈던 절망감에서 출발한다. 정치적으로 조작된 정보가 쏟아지는 온라인 환경에서 벗어나 집 근처 장미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새를 관찰하는 시간을 해독제로 여겼던 경험이 씨앗이 되었다. '그날 트위터에서 일어난 소용돌이 같은 논쟁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면 커다란 부리와 레이저처럼 새빨간 눈을 가진 해오라기 두 마리가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그녀의 문장은, 디지털 세계의 허상과 현실 세계의 생생함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관심이라는 화폐를 둘러싼 조용한 전쟁
우리는 지금 '관심경제'라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다. 소셜미디어와 디지털 플랫폼들이 우리의 관심을 상품화하고, 그 관심을 더 오래 붙잡기 위해 분노와 불안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공급한다. 우리가 무료라고 생각하는 서비스의 진짜 비용은 바로 우리 자신의 관심이다. 오델은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하며, 우리가 사로잡힌 관심의 주권을 되찾아 다른 방향으로 확장할 것을 제안한다.
그녀가 말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무기력한 도피가 아니라, '실제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인식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무는 것'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 온전히 인식하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사색과 참여, 그 사이의 다리
오델이 인용하는 토머스 머튼의 통찰은 특히 인상적이다. 수도승이자 사상가였던 머튼은 영적인 사색과 세속적 참여가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러남과 사색은 현재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상기시킨다. 중요한 것은 참여 여부가 아니라 참여 방식이다. 살아갈 시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어도, 그 시대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현재 일어나는 사건에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참여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한 발짝 떨어지는 것은 여기에 수반되는 모든 희망과 슬픈 사색을 품고 현재의 세계를 미래에 가능한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는 정의는 단순한 거리두기가 아닌,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준비하는 행위로써의 멈춤을 의미한다. 이는 절망하거나 타격받지 않고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며, 나아가 '거부라는 공동의 장소에서 다른 사람과 만나겠다는 다짐'으로 발전한다.
생각은 경계에서 꽃핀다
오델이 제시하는 인식론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모든 아이디어는 나 자신과 내가 만나는 모든 것 사이에 있는 불안정하게 변화하는 교차점에서 생긴다'는 그녀의 말은, 생각이 고립된 개인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자, 자신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인지과학의 발견처럼, '인지는 이미 주어진 정신이 이미 주어진 세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정신이 함께 창출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어떤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느냐에 따라 우리 자신도 달라진다. 스마트폰 화면에 갇힌 시선을 돌려 베란다에 방문한 하늘, 집 근처를 돌아 흐르는 개천, 동네 공원의 역사 등에 집중할 때 우리는 놀랍도록 생생하고 다정한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개인적 치유를 넘어서는 일이다. 우리의 관심이 향하는 곳이 바뀌면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지도도 함께 바뀐다.
수직으로 서 있는 삶의 자세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유 중 하나는 오클랜드 전망탑 개관식에서 나온 '도웰링 지그' 이야기다. 나무에 정확히 수직으로 구멍을 내도록 돕는 목공 도구에서 이름을 딴 이 비영리단체의 창립자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고꾸라지지도, 뒤로 넘어지지도 말고 땅 위에 수직으로 꼿꼿이 서 있으라.' 이 간명한 조언은 과거의 향수나 미래의 불안에 휩쓸리지 않고 현재에 단단히 뿌리내리는 삶의 자세를 상징한다.
천사에게서 역사의 본질을 읽어낸 발터 벤야민처럼, 우리는 진보라는 이름으로 쌓인 잔해 속에서 '죽은 자들을 깨워 부서진 것들을 다시 이어 붙이려'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냐민이 말하는 해체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훼손(dismembering)의 반대인 재구성(re-membering)을 위한 첫걸음이다. 마치 외과의사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먼저 감염된 조직을 제거하듯,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때로 용기 있는 해체가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때 도시를 가르며 공동체를 물리적으로 단절시켰던 콘크리트 고속도로를 철거하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재생의 시작이다. 그 콘크리트 아래 막혀 있던 것들—냇물의 흐름, 사람들의 동선, 이웃 간의 시선—이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과 감각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디지털 기술이 만든 파편화된 연결망에서 벗어나 우리 인간의 동물성을 치열하게 보호하는 것은, 무너진 관계와 감각을 재건하는 첫걸음이다. 비록 전과 똑같아지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을 복원해야 한다.
진짜 나, 진짜 세계와의 만남
오델의 목소리는 책의 말미에 가장 절실하게 들린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눈, 당신의 손, 당신의 숨결, 지금 이 시간,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는 장소. 이것들은 진짜다. 나도 진짜다. 나는 아바타가 아니고, 취향의 조합도 아니고, 매끈한 인지적 작용도 아니다. 나는 울퉁불퉁하고 구멍이 많다. 나는 동물이다.'
이 선언은 디지털 세계에서 매끈하게 가공된 자아가 아닌, 몸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간절한 호명이다. 우리는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보고 듣고 냄새 맡는 세계에 살고 있으며, 이 사실을 기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 그저 귀 기울일 시간, 가장 깊은 감각으로 현재 우리의 모습을 기억할 시간'이.
돌봄이라는 이름의 저항
결국 오델이 제안하는 것은 '비도구적이고 비상업적인 활동과 생각을 위해, 유지와 보존을 위해, 돌봄을 위해, 함께하는 기쁨을 위해' 우리의 공간과 시간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동물성을 업신여기는 모든 기술에 맞서는 치열한 보호 행위다. 그녀가 상상하는 건전한 소셜 네트워크는 현상의 공간이다. 오랜 친구와의 산책, 전화 통화, 소모임 등이 어우러진 공간.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만남을 위해 함께 작동하는 공간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 관심이 화살이 아니라 토양이라는 생각을 했다. 화살은 과녁을 꿰뚫지만, 토양은 씨앗을 품는다. 화살은 빠르게 성과에 도달하지만, 토양은 느리게 생을 키운다. 관심경제는 내 관심을 화폐로 만들지만, 나는 내 관심을 흙으로 만들고 싶다. 내가 오래 응시한 것들이 나를 닮아가고, 내 주변의 것들도 내 응시에 조금씩 자라난다면—그건 이미 참여라 불릴만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용인되지 않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품이 아니라 존재라는 것을, 우리의 가치가 생산성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술결정주의의 탄압과 역경 속에서도 '연이은 재앙 사이에 있는 작은 틈'들은 계속 자라나고 있다. 새들이 언제나 다시 돌아오고, 우리는 아직 알고리즘으로 축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오늘의 나는 무엇을 오래 바라볼 것인가. 어떤 이야기에 오래 귀를 열 것인가. 어떤 장소를 오래 지킬 것인가. 제니 오델의 조용한 혁명은 이 간단한 질문들에서 시작된다. 멈출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속도에 책임을 진다. 그리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야말로 조용하지만 정확한 방식으로 세상에 참여한다. 우리는 그 참여의 방식으로 서로를 초대할 수 있다. 당신의 눈과 손과 숨, 지금 이곳의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