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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 - 김영탁

삶의 진한 농도는 침묵과 기다림에서 온다

by 세잇
모든 그리움이 하나의 맛으로 수렴될 때, 우리는 비로소 시간이란 되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깊어지는 농도임을 깨닫는다.


영화감독으로서 따뜻한 휴머니즘을 선보였던 김영탁 작가는 첫 장편소설 『곰탕』에서 차가운 SF 스릴러의 외피를 두르고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감정인 그리움을 끓여낸다. 2063년의 디스토피아적 부산. 쓰나미로 인해 계층이 분리된 세상에서 고아 출신 주방 보조인 우환은 오직 ‘옛날 곰탕의 맛’을 배우기 위해 목숨을 건 시간 여행을 감행한다. 이 여행은 단순한 레시피 찾기가 아니라 존재의 기원을 향한 처절한 발걸음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었던 밑줄들은 복잡한 서사와 반전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이정표이자, 궁극적으로 삶이라는 거대한 곰탕 국물을 우려내는 데 필요한 핵심 재료였다. 그 밑줄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깊이를 더해가는 농축의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삶의 본질을 우려내는 게으른 기다림

곰탕 맛의 비법을 찾아 2019년으로 건너온 우환에게, 당시 부산곰탕 주방장인 종인은 말보다 행동으로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이 된다. 종인의 방식은 놀라울 만큼 느리고, 우리가 익숙한 ‘부지런함의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종인은 물을 끓이고 뼈를 넣고, 살을 집어넣고 국을 내고 살을 삶는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많은 주방장들은 물을 올려놓고 국을 끓이는 동안 뭔가를 부지런히 했다. 하지만 종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불 앞에 앉아 있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뼈가 속까지 우려 지는 동안 기다리고, 살이 삶기는 동안 기다리고 그 살이 식기를 기다리고 한 번 끓인 물을 버리고 새로운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다시 뼈가 더 속까지 우려 지기를 기다렸다. 그 긴 시간을 불 앞에서 기다리며 보냈다. 종인은 게으른 사람이었다. 새벽 4시에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사람이었지만, 불 앞에 앉으면 게을러졌다.


이 '게으른 기다림'은 현대인이 잊고 사는 존재의 태도이지 않을까. 2063년의 세상은 끊임없이 자극적이고, 욕심을 내고 바라는 게 많아야 인정받는 논리로 돌아간다. 끊임없이 남들처럼 살기 위해 무리를 해야 하는 삶이다. 그러나 진정한 깊이는 불필요한 움직임을 멈추고 기다릴 때, 즉 게으른 기다림 속에 우러나온다. 이는 곰탕의 깊은 맛처럼, 화려함이 아닌 한 가지 맛으로 풍부해지는 삶의 자세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가 찾는 삶의 진정한 맛은 수많은 첨가물이 아니라, 오롯한 시간 속에서 우려낸 침묵의 농도 속에 있다.


이러한 기다림의 미학은 소통의 태도와도 연결된다. 종인과 같은 '말이 적은 사람'의 지혜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듣는 데 있다.


말이 적은 사람이 일을 잘하는 경우가 많다. 말이 적은 사람이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말을 적게 해 보면 안다. 입을 좀 닫고 얼굴에 달린 다른 것들을 활용해 보면 훨씬 더 많은 게 보이고, 많은 걸 알게 된다. 말로만 말하고 말로 오해를 만들고 말로 싸움을 걸고 말로 인생을 망치는, 문제는 언제나 말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함으로써 오해를 만들고 본질을 놓치며, 심지어 말로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작가는 언어의 과잉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입을 닫고 대신 눈과 귀를 여는 행위가 얼마나 많은 진실을 알려주는지를 역설한다. 진정한 통찰은 끊임없이 말하는 화자가 아니라, 침묵 속에서 세상의 미묘한 파동까지 포착하는 경청자에게 주어진다. 곰탕을 끓이는 기다림처럼 삶의 진리를 깨닫는 데에도 말이 아닌 세상의 속삭임을 받아들이는 내면의 여백이 필요한 것이겠지.



소중함의 기원과 체념의 미학

우환의 삶은 고아원에서 시작해 끊임없이 속한 곳과 속할 곳을 찾아 헤맨다. 그의 고독과 그리움은 소설의 가장 차가운 밑바닥 정서이며, 이는 가족과 관계에 대한 간절함으로 이어진다.


한 번도 남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본 적 없는 사람들은 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건, 자신이 소중해져서가 아니라 더 소중했던 사람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걸.


이 문장은 관계의 본질을 건드리는 가장 슬프고도 현실적인 통찰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대체 불가능한 소중한 존재’가 되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그 자리를 지키던 사람이 떠났을 때임을 우환은 너무나 잘 안다. 이 깨달음은 우환에게 가족에 대한 간절함을 증폭시키지만 동시에 그것이 '선택하지 않아도 절로 주어지는 유일한 것'이며 '바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체념을 안긴다.


이 체념은 수동적인 포기가 아닌 능동적인 수용이자 방어 기제다. 우환은 순희의 교복을 빨던 긴 시간을 회상하며, 마침내 도달하는 경지를 고백한다.


우환은 순희의 교복을 빨던 일을 생각한다. 교복은 그냥 보아도 붉고 물에 담가도 붉고 빠는 동안도 붉었다. 그 교복이 다시 하얘질 때까지 긴 시간 매달렸었다. 교복이 흰색을 찾고, 왼쪽 가슴에 이름표가 드러나고 거기에 적힌 ‘이순희’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 그랬다. 생각 없이 피를 벗겨내고, 옷에서 빠져나간 그 피로 욕실 바닥이며 흰 세숫대야까지 온통 붉어졌을 때, 그 속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름을 보았던 그때, 그때도, 그랬다. 아무래도 피냄새가 났다. 그랬던 거 같다. 우환은 그걸 이제야 기억해 냈다.

필요했던 것 체념뿐이었다. 결국은 행복해질 수 없음을, 그때 알고 체념했어야 했다.


우환은 인간의 상처가 '욕심을 내다가, 혹은 너무 즐거워하며 있다가' 생겨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지나친 욕망과 과도한 기대가 고통의 씨앗임을 알기에, 행복해질 수 없음을 미리 선언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지금 주어진 작은 평화를 온전히 지켜내려는 삶의 전략인 것이다. '바란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닌' 가족의 부재를 체념하는 순간, 우환은 그 간절함으로부터 해방된다.


또한, 깨달음이란 고통스러운 짐이 됨을 예리하게 지적하는 문장은, 우환의 행보를 단순한 생존자를 넘어선 주체로 격상시킨다.


진정한 사랑이구나, 깨닫기 시작하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깨달음이 그렇다. 깨닫기 전에는 인생이 편하다. 하지만 깨닫고 나면 걸리는 게 많아진다. 깨달았으니까 똑같이 살면 안 되는 것 같다. 깨닫기 전으로 돌아가려 하면,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라는 질문을, 남에게, 주로 어른에게 듣던 그 질문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반복하게 된다. 깨닫고 나면 평온이 찾아올 거 같지만 사실은 아닌 거였다. 망할.


진정한 깨달음은 평온이 아니라 불편함을 동반하며, 우리에게 더 높은 책임을 요구한다. 이는 과거로 와서 자신의 이익과 신분 탈취를 일삼는 다른 시간 여행자들의 행태와 대비된다. 우환은 깨달음의 짐을 지고, 자신이 '돌아가야 할 사람들을 머물게 했고, 부지런히 살아야 할 사람들을 영원히 게으르게 만들었다'는 윤리적 죄책감을 깨닫는다. 그의 고통은 결국 인간의 존재가 타인과의 연결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간 여행의 종착지, '함께'

우환의 시간 여행은 단순히 과거로의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윤리적 선택의 순간이다. 그가 건너온 검은 바다와 구멍은 단순한 블루 홀이 아니라, '부산의 바다는 당신의 기억보다 먼 곳에 있다'는 첫 문장처럼, 삶의 불확실한 근원과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될 파국을 상징한다. 우환은 이 낯선 현재에서 순희와 강희를 만나고, 그들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부산의 밤을 달린다. 이때 느끼는 감정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따뜻하고 희망적인 순간이다.


멀미가 났다. 어지러웠다. 몰려오는 바람과 풍경들이 벅찼다. 하지만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뜨고 울었다. 슬프지 않았지만 눈물이 자꾸 났다. 바람이 사람을 울린다는 걸 우환은 마흔이 넘고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 알았다. 바람에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우환은 강희 뒷자리가 금방 익숙해졌다. 오토바이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편안했다. 우환은 순희 뒤에 탄 강희 뒤에서 편안했다. 셋이 부산의 밤을 달렸다. 달릴수록 달릴 곳을 내주는 도시였다.


이 편안함은 그가 과거에서 잠시 획득한 찰나의 가족이라는 공간이다. 특히, '달릴수록 달릴 곳을 내주는 도시'라는 묘사는, 고독했던 우환의 삶에 비로소 타인이 만들어준 여백, 즉 받아들여지는 공간이 생겼음을 상징한다. 그는 이 순간, 뜻밖에 어머니 뒤에 타고 아버지의 환영을 받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잃어버렸던 가족의 온기를 잠시나마 회복한다.


우환이 찾아 헤맨 곰탕 맛의 비결은 결국 레시피가 아닌, 특정 시간대의 사람들과 그들이 나누는 정서적 유대였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의 해답은 그가 미래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이 현재에 머물러야 할지 갈등하는 순간에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나타난다.


니는 어떤지 모르겠다만, 나는 모든 게 달라졌다. 니가 태어난 후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가장 강력한 존재의 증명. 미래에서 온 한 이방인이 잃어버린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 했던 처절한 여정 끝에 얻은 가장 큰 보상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변화의 기원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니가 태어난 후'라는 말은 우환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 불가역적인 긍정적 의미를 남겼음을 확증해 준다. 타인이 나의 현재가 된 순간, 삶은 비로소 ‘되돌릴 수 없는’ 의미, 즉 가장 진한 맛을 획득한다.



시간의 농도

김영탁 감독의 『곰탕』은 스릴러의 박진감과 SF적 상상력 속에 인간의 영원한 숙제인 상실의 무게를 견디는 법을 곰탕처럼 깊게 우려낸다.


우리는 되돌아가고 싶다는 그리움 때문에 시간 여행을 꿈꾸지만, 진정한 시간 여행은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라 공감의 깊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환은 2063년의 절망을 버리고 2019년의 따뜻한 곰탕집에 안착하려 했지만 그의 현재는 이미 종인과 순희, 강희라는 타인의 삶 속에 스며들었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깨달음으로 인해 평온이 찾아올 것이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깨닫고 나면 걸리는 게 많아진다'. 깨달음은 오히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한다. 하지만 종인의 '게으른 기다림'과 우환의 '체념 속 평화'는 이 깨달음의 고통을 넘어설 단 하나의 해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진한 곰탕 국물처럼 대하는 태도이겠지. 복잡하게 이것저것 섞어 화려함을 만들려 하지 않고 삶의 가장 단순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올 때까지 묵묵히 불 앞에 앉아 기다리는 것. 그리하여 나의 밑줄이 끝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시간이라는 국물은 옅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성찰로 인해 더욱 깊어지는 농도임을 깨닫게 된다.


그 진한 국물을 혼자가 아닌, 소중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삶이라는 식탁에서의 진정한 행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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