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무언가를 완벽하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의 가장자리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아주 멀리 떠내려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가까워 서로를 잃어버린다. 숲 속에 있는 자는 숲을 보지 못하고,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의 형체를 만지지 못하며, 삶에 매몰된 자는 삶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 그러니 무언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탈이 필요하다. 중력을 거스르고, 발을 딛고 선 땅을 박차고, 기꺼이 고립을 자처하는 일. 그리하여 저 멀리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홀로 떠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떠나온 곳이 얼마나 눈물겹게 푸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서맨사 하비의 소설 『궤도(Orbital)』는 바로 그 거리두기에 관한 가장 아름답고도 서늘한 기록이다.
이 소설에는 우리가 흔히 우주적 SF에서 기대하는 극적인 사건이 없다. 외계인의 침공도, 우주선의 폭발도, 영웅적인 귀환의 서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 상공 400km, 국제우주정거장(ISS)이라는 좁은 캡슐 안에 갇힌 여섯 명의 우주비행사,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하루가 전부다. 하지만 이 하루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지구의 땅 위 하루와 다르다. 시속 2만 8천 킬로미터의 속도로 지구를 도는 그들에게는 24시간 동안 열여섯 번의 일출과 열여섯 번의 일몰이 찾아온다.
서맨사 하비는 이 기이한 시공간을 소설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장대한 산문시처럼 묘사한다. '이 시대의 버지니아 울프'라는 별명답게, 우주비행사들의 내면과 지구의 풍경을 의식의 흐름 대로 엮어낸다. 그녀에게 우주는 정복해야 할 미지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다. 작가는 꼼꼼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우주의 물성을 구현했지만, 그 묘사는 과학적 사실을 넘어 철학적 은유로 승화된다.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속도 속의 정지이며, 광대함 속의 밀실이다. 책을 읽는 내내 무중력 상태에 둥둥 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공기가 희박하고, 단어들은 별빛처럼 차갑고 명징하게 반짝인다.
시간의 파편, 생명의 얼굴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수없이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지만, 그것은 활자 위에 그은 선이라기보다는 마음의 궤적을 따라 그은 등고선에 가까웠다.
로만은 선실에 둔 기록지에 88번째 줄을 더할 것이다.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셀 수 있는 것으로 묶어 두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중심마저 떠내려간다. 우주는 시간을 조각낸다.
지구에서 우리는 시곗바늘에 맞춰 삶을 재단한다. 하지만 90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궤도 위에서 '하루'라는 개념은 산산이 조각난다. 낮과 밤이 수시로 뒤바뀌는 곳에서 시간은 절대적인 흐름이 아니라, 인간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임이 드러난다. 작가는 묻는다. 우리가 그토록 악착같이 지키려 했던 스물네 시간의 규율이,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덧없고 인위적인 약속인가를. 88번째 줄을 긋는 로만의 행위는 시간이라는 거대한 강물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인간의 가련하고도 숭고한 저항이다.
외계 문명이 본다면 아마도 의아할 것이다. 저것들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어디로 가지도 않고, 왜 맴돌기만 하는 거야? 모든 질문의 답은 지구다. 지구는 환희에 찬 연인의 얼굴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구가 잠들었다 깨어나고 자기 버릇에 푹 빠져 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구는 이야기와 기쁨과 그리움을 잔뜩 안고서 아이들이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다.
하지만 이 시간의 혼돈 속에서도 유일한 상수는 지구다. 저 멀리서 푸르게 빛나는 구체. 우주비행사들에게 지구는 단순한 행성이 아니다. 치에라는 일본인 우주비행사에게 그것은, 부모를 대신하는 생명의 근원이며 비행사들 모두에게는 죽어서라도 가고 싶은 천국이다. 지구에서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국을 상상하지만, 궤도 위의 그들은 땅을 내려다보며 천국을 본다. 이 시선의 전복은 우리에게 강렬한 현기증을 선사한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곳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낙원이었음을. 우리는 이미 천국에 살면서 지옥을 상상하느라 삶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경계가 지워진 자리에서 본 인간의 맨얼굴
이음매 없는 지구를 계속 보다 보면 벌어지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들었다. 충만한 지구를, 땅과 바다 사이 말고는 어떤 경계도 없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국가들은 지워지고, 쪼개질 수 없으며 전쟁은커녕 그 어떤 분리도 모르는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그런데 이곳에서는 저 멀리 작게 주름진 땅을 보고 산맥임을 알고, 웬 줄기를 보고 큰 강이 있음을 가늠할 수 있지만, 그게 끝이다. 장벽이나 장애물은 없다. 부족도 전쟁도 부패도, 뭔가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에는 국경선이 없다. 지도 위에 붉게 그어놓았던 선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던 이념의 장벽들은 그저 구름에 가려지거나 바다의 푸른빛에 녹아버린다. 작가는 이 이음매 없는 지구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만들어낸 갈등이 얼마나 작위적인지 꼬집는다. 그러나 작가는 단순히 평화주의적 메시지를 던지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더 깊은 곳, 인간 존재의 모순적인 본질을 파고든다.
달에 간 사람 중에 여자가 한 명이라도 있니. 비백인, 비미국인 여자는 말할 것도 없지. 이건 무르익은 남성성을 과시하는 남자들이 로켓과 추력기와 탑재 장비와 세계의 시선을 등에 업은 모습이란다. 이게 세상이야. 남자들의 놀이터, 남자들의 실험실, 경쟁할 생각은 하지 마. 그래 봤자 결국 사기만 떨어지고 열등감과 열패감을 느끼게 되니까. 왜 절대 못 이기는 경주를 시작하고, 기를 쓰고 지려고 달려드니. 그러니 딸, 꼭 기억하렴. 너는 열등하지 않아. 그걸 굳게 명심하고서 존엄한 존재로 보잘것없는 삶을 살아가렴.
우주선은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이지만, 동시에 지구의 불평등과 모순을 그대로 싣고 온 방주이기도 하다. 작가는 우주의 낭만에 취해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높이에서 지구의 치부를 더욱 선명하게 목격한다. 태풍, 산불, 전쟁의 흔적, 그리고 우주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벌어지는 강대국들의 힘겨루기까지. 궤도 위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정치적인 동물이며, 상처 입은 존재다.
아름다움은 선함이 아니라 '살아있음'에서 온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아름다워. 왜냐면 아름다움은 선함에서 오지 않거든. 너는 진보가 선하냐고 물은 게 아니었지. 인간도 선해서 아름다운 게 아니란다. 살아 있으니 아름다운 거야. 어린애처럼. 살아 숨 쉬며 세상을 궁금해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선한지는 상관없어. 눈에 빛이 감돌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 가끔은 파괴적이고 상처를 입히고 또 가끔은 이기적이지만, 살아 있기에 아름다워. 살아 숨 쉰다는 점에서 진보도 그렇단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움과 도덕을 연결하려 한다. 착한 것은 아름답고 악한 것은 추하다고. 하지만 서맨사 하비는 궤도 위에서 그 통념을 과감히 부순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평화롭기만 하지 않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화산이 폭발하고, 인간들은 서로를 죽이고 약탈한다. 그 모든 혼란과 파괴조차 우주의 시선에서는 거대한 생명력의 일부로 보인다.
작가는 말한다. 아름다움의 조건은 윤리가 아니라 활력이라고. 지구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꿈틀대고, 변화하고, 상처 입고, 다시 회복하며 맹렬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대한 위로로 다가온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삶이 올바르지 않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비하해 왔던가. 실수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이기적인 욕망에 휘둘리는 모습이 추하게 느껴져 고개를 떨구곤 하니까. 하지만 작가는 그 모든 소란스러움이, 그 모든 모순과 결핍이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그렇기에 눈물겹게 아름다운 것이라 말한다.
불을 피우고, 돌을 쪼개고, 철을 녹이고, 땅을 갈고, 신을 숭배하고, 시간을 세고, 배를 타고, 신발을 신고, 곡물을 사고팔고, 육지를 발견하고, 제도를 수립하고, 음악을 짓고, 노래를 부르고, 물감을 섞고, 책을 엮고, 숫자를 처리하고, 화살을 쏘고, 원자를 관찰하고, 몸을 꾸미고, 알약을 삼키고, 사소한 것에 연연하고, 고민하고, 마음을 가졌고, 또 마음을 잃고, 모든 것을 약탈하고, 죽음을 논하고, 과잉을 사랑하고, 과잉으로 사랑하며, 사랑 때문에 방황하고, 사랑을 결여했으나 사랑이 없어 허전함을 느끼고, 그래서 사랑을 갈망하고, 갈망을 사랑하는, 두 다리를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니고는.
저 긴 목록을 보라. 인류가 걸어온 길은 파괴와 창조, 사랑과 증오가 뒤엉킨 혼돈의 역사. 하지만 궤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 모든 행위는 단 하나의 거대한 춤사위처럼 보인다. 인간은 엉망진창이지만, 바로 그 엉망진창 때문에 찬란하다.
우리는 서로의 궤도에 머무는 우주비행사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고독한 우주선을 타고 타인의 주변을 맴도는 우주비행사이겠구나.
우리는 타인이라는 행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때로는 너무 멀어져서 춥고, 때로는 너무 가까워져서 타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섣불리 그 행성에 착륙해 깃발을 꽂으려 들거나 내 입맛대로 개조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묵묵히 궤도를 도는 일일 것이다.
그 거리감 속에서, 당신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게 빛나고 있는지, 당신이 뿜어내는 폭풍과 구름이 얼마나 생생한 생명의 징후인지를 그저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이 궤도가 내게 가르쳐준 사랑의 방식이다.
서맨사 하비의 문장들은 말한다.
당신은 선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숨을 쉬고 고뇌하고 흔들리며 존재하기에 아름답다고.
저 우주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당신만이 푸르게 박동하고 있다고.
그러니 오늘 밤은
당신이라는 행성의 자전을 조용히 지켜보고 싶다.
16번의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나는 당신의 궤도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