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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Aug 17. 2021

티셔츠와 반바지, 선택하기와 선택받기

29cm 위클리 에세이 마지막회



지난번 원고를 보낼 때와 비교해 또 상황이 변했다. 코비드-19 확산세로 인한 전면 재택근무가 시작됐다. 일주일에 한 번 회의 때 성수동으로 가곤 했는데 이제 당분간은 그럴 일도 없다. 이론적으로는 전라로 일을 해도 상관없지만 그럴 수는 없잖아. 뭐라도 입고 일을 해야 한다. 


재택근무 차림에 셔츠와 타이 같은 걸 하고 싶지는 않다. 결국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우르르 사서 많이 입기로 했다. 마침 반팔 티셔츠들의 목도 늘어나 있던 참이었다. 여러 종류의 티셔츠를 골라서 비교해보기로 했다. 며칠 후 집으로 온갖 반팔 티셔츠가 도착했다. 다 시켜놓고 보니 총 9벌이나 됐다. 시켜놓고 보니 이게 다 뭔가 싶었다. 


1974년 개츠비와 2013년 개츠비.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성공한 개츠비가 좋아하는 데이지에게 잘 보이려고 침대에 색색깔 셔츠를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은 소설과 영화에서 모두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에(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1974년작2013년작에 모두 재현됐다. 둘을 손쉽게 비교해볼 수 있는 것도 유튜브 시대의 재미겠다. 데이지는 그 셔츠들 사이에서 "이렇게 예쁜 셔츠는 처음 본다"며 눈물을 흘린다. 유튜브 댓글 중엔 '데이지는 셔츠 때문에 운 게 아니다' 라고 하는 말도 있다. 과연 그럴까. 나는 그 장면이야말로 데이지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세상에는 예쁜 셔츠 같은 것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자가 있다. 물론 그런 남자도 있고. 데이지같은 사람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나도 괜히 침대에 티셔츠를 던져 보았다. 성공도 안 했고 데이지도 없지만 옷을 던져볼 수는 있잖아. 대신 나는 개츠비가 아니니 옷을 치우는 것도 내 몫이다. 잠깐의 치기에 반성하며 9벌의 티셔츠를 다시 곱게 접었다. 접으며 각 옷을 살펴보았다.


티셔츠는 웬만하면 면 100%를 산다. 오늘 고른 면 100% 반팔 티셔츠는 챔피언과 프린트스타다. 사이즈는 둘 다 XL. 챔피언은 흰색부터 점점 색이 짙어지는 걸 샀다. 흰색, 옅은 회색, 그냥 회색, 검은색. 암홀이 커서 편하게 입을 것 같다. 두꺼운 면직도 좋았다. 프린트스타는 면 32수다. 일본 브랜드인 걸로 아는데, 그래서인지 같은 XL라도 미국보다는 조금 작다. 챔피언보다는 여러 모로 조금 더 만듦새가 꼼꼼하다. 둘 중 뭘 골라도 나름의 다른 느낌에서 만족했을 것이다. 무채색 옷 사이에서 오렌지색을 고른 이유는 가끔 뭔가 빨간 국물 음식을 먹으러 갈 때 이런 걸 입으면 묻어도 불편할 게 없기 때문이다.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는 선택의 폭이 엄청나게 넓은 품목이기도 하다. 29cm에서 '무지 티셔츠'라고 검색하면 2021년 7월 23일 기준 24780개가 뜬다. 24780개의 티셔츠를 하루에 하나씩 입어보려면 67년이 넘게 걸린다. 그 사이에서 '남성의류' 가격 얼마 이하, 색상 등 29cm의 분류 기준을 한껏 적용해도 수천 개의 예시가 나온다. 그걸 찾다 보니 나도 피곤하지만 만드시는 분들도 피곤할 것이다. 무한에 가까운 선택은 사람을 피차 피곤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세상에 티셔츠 회사가 하나밖에 없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냥 문명 사회는 기본적으로 피곤한 것이다. 그 피로를 겪다 보니 반바지는 그냥 면 100%에 1+1인 걸 골랐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그야말로 반바지다.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지금도 입고 있다.  


반팔 반바지를 입었으면 신발은 뭘 신어야 할까. 운동화는 귀찮다. 버켄스탁? 플립플롭? 크록스? 다 안 내킨다. 버켄스탁은 코르크 바닥이라 비가 오면 못 신는다. 플립플롭은 구조적으로 내구성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애초부터 날렵한 신발이니 내구성이 보장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싼 건 줄이 끊어질 운명, 비싼 건 바닥이 닳을 운명이다. 크록스는 음…아직 거기까지 가고 싶지는 않다. 아저씨에게도 존엄이 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샌들이 남는다. 편하고 튼튼하고 헐떡이지 않는다. 덜 예쁘거나 경쾌하긴 한데 이 나이쯤 되어 누구에게 잘 보일 것도 없다. 그런 생각으로 마우스를 내리다가 이런 샌들을 찾았다. 바닥이 튼튼하고 끈의 조임새가 오밀조밀하다. 한국은 유행과 비유행 사이의 격차가 커서 이렇게 좋은 샌들이 대폭 할인중이다. 좋다고 샀다. 


이 샌들에 양말을 신고 다니려 한다. 동남아 배낭여행 지역 가 보면 샌들에 양말 신고 다니는 백인 남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릴 때의 눈으로는 그 모습이 그렇게 추레해 보였는데 그 사람들이야말로 지혜로운 여행자였다. 샌들에 양말 차림 정말 편하고 쾌적하다. 젊은이 분들도 해보시길. 더 쾌적한 게 발가락 양말에 플립플롭인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29cm에서 기회를 더 주시면 그때 하겠다. 


이 시대의 재택근무 룩을 완성하려면 필요한 게 하나 더 있다. 긴 팔 옷이다. 재택근무나 커피숍에서 나처럼 사무직 비슷한 일을 하려면 냉방병을 막아줄 긴 팔 옷이 필요하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이 참에 가을 겨울까지 입을 수 있는 모자 달린 옷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이 브랜드를 찾았다. 믹스. 이 브랜드로 이야기를 끝맺는 게 왠지 잘 어울릴 것 같다.



믹스라는 이름에 별 뜻은 없어 보인다. 믹스에서 중요한 건 이름이나 로고 디자인이 아니라 옷의 품질 그 자체다. 내가 믹스 후디를 고른 이유 중 하나는 수입 지퍼를 썼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지퍼가 수입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수입 지퍼를 쓸 정도로 귀찮은 공정을 한번 더 거쳤다는 게 중요하다. 뭔가 좋은 걸 만들어보고 싶어서 남들 안 하는 걸 한번 더 한 것이다. 누가 많이 알아봐 주지는 않는다고 해도. 나는 이런 태도를 좋아한다.


그런데 믹스는 더 이상 안 나오는 것 같다. 공식 SNS에는 2019년 12월 이후로 업로드가 없다. SNS에 연동된 공식 홈페이지는 도메인이 만료된 듯 다른 광고 사이트로 연동된다. 품질로만 보면 정말 좋은 옷인데. 디테일도 확실하고 상품 설명처럼 미국이나 일본의 옷과 견주어도 손색 없는 품질인데. 이런 옷을 만들어도 안 되려면 잘 안 된 모양이다. 


내 일도 그런 것 같다. 내가 일하는 문자+사진 콘텐츠 업계와 이쪽의 상품인 잡지 콘텐츠에도 나름의 품질 기준을 정할 수 있다. 그 품질 기준에 따라 우수한 것과 덜 우수한 것을 나누어 볼 수도 있다. 품질 기준상으로 우수하다고 살아남는 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드는 입장에서 종종 혼란스러워진다. 내게는 품질이 중요한데 다른 사람들이나 손님들에게는 품질이 중요하지 않은 걸까? 이 품질이 안 보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품질이란 건 없고, 내가 헛된 환상에 빠져 있는 걸까? 내가 아무리 좋은 걸 만들어도 사람들이 알아봐 주지 못하면 어쩌지? 아니면 애초부터 내가 아무 의미 없는 걸 위해 아무 의미 없는 노력을 해온 거면 어쩌지?  내 모든 고민과 나름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인 건 아닐까? 열심히 준비한 게 잘 안 되면 사람은 으레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라도 '아닙니다. 운이 없었을 뿐이에요' 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걸까. 홀린 듯 남아 있는 믹스의 모든 제품을 고르고 말았다. 로고가 큰 티셔츠는 평소에 잘 입지 않고 야구 모자도 이미 쓸 만큼은 있고 후디는 내가 평소에 입는 것보다는 암홀이 작지만 상관없을 만큼 잘 만들었다. 모자와 반팔 티셔츠의 품질 역시 훌륭하다. 


거기 더해 왠지 남 일 같지 않았다. 이렇게 성의 있게 옷을 만드는 곳도 있고, 그렇게 만든 게 잘 안된 듯하니 마음이 묘했다. 내가 만드는 게 좋은 거라고는 못 해도 나 역시 나름의 성의로 내 직업에서의 일을 해왔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도 믹스 후디를 입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어디를 봐도 품질 좋은 옷, 입고 세탁할수록 내 몸과 마음에 익숙해질 듯할 옷. 오랫동안 편안히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옷이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지난 4개월 동안 이 원고 덕분에 29cm에서 파는 여러 옷을 신나게 구경했다. 그동안 내가 적고 느낀 걸 요약하면 결국 소비하는 것과 소비되는 것의 까다로움이다. 소비자도 너무 많은 선택 사이에서 어렵지만 만드는 사람들도 너무 많은 경쟁자 사이에서 막막할 것 같다. 그런 생각 끝에 만드는 사람과 사는 사람들의 입장을 최대한 상상해 보았다. 실제로 내가 물건을 고르는 기준에 맞추어 물건을 골랐지만 내 기준이 남에게도 쓸모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아저씨의 요즘 물건 사이버 구경기가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었다면, 그리고 해당 제품을 판매하는 브랜드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럼 이만.


+ 이 원고가 29cm에 실린 며칠 후 내 SNS에 믹스 대표님께서 답글을 달아 주셨다. 굉장히 보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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