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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Sep 07. 2021

오버핏 앞에서의 말 못할 기분

레트로 트렌드에 대한 의견 중 하나

서울의 1990년대라고 전 세계에 떠도는 사진 중 하나. 스투시는 저 때도 있던 전통의 브랜드, 저 사진 속 분들은 최소 40대. 


레트로 유행의 가장 큰 토양은 유튜브와 구글이라고 생각한다. 레트로에 웬 IT냐고? 이 두 가지 플랫폼은 요즘 세상의 자료실과도 같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무제한에 가까운 동영상 덕에 인간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20세기의 자료들을 말도 안 되는 정도로 쉽게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한국 나이로 39세인 내 세대쯤 되면 지금 시대의 정보 열람이 얼마나 쉬운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릴 때는 체코어나 인도네시아어같은 언어의 원어민 억양을 접하고 익히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명 클래식 연주자의 고전 공연 영상이나 세계적인 밴드의 라이브 앨범 같은 건 전설 속에나 있는 것이었다. 지금으로는 옛날 사람 이야기일 뿐이다. 요즘은 검색만 하면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의 폴란드 공연 실황같은 것도 유튜브로 볼 수 있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로웬덜이 쓴 책의 제목이다. 이 책의 원제는 The Past is the Foreign Country로, '과거는 외국이다' 정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 말 그대로다. 레트로의 소스가 되는 과거는 이국적 외국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외국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구할 수 있다. 과거라는 이국적 정보는 어른에게 추억이 되고 그 시대를 겪지 못한 젊은이들에게는 이국적인 즐길거리가 된다. 온갖 분야에서 레트로가 조명받는 이유다. 


실제 라이프스타일 비즈니스에서의 레트로는 어떨까. 의미처럼 모호한 이야기 말고, 실제 비즈니스 면에서는 어떨까. 간단하다. 단가가 저렴한 레퍼런스다. 요즘 자주 발매되는 90년대 캐주얼이 좋은 예다. 90년대 캐주얼의 몇 가지 요소인 간단한 핏과 큰 로고만 구현하면 팔 수 있다. 발상도 생산도 어려울 게 없다. 근 몇 년 동안의 하이테크 운동화와 비교하면 둘의 차이가 더 선명히 드러난다. 나이키나 아디다스의 새로운 운동화는 별도의 금형이나 신소재를 만들고, 새로운 디자인을 대중에게 설득시키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비용도 상당히 많이 들여야 했다. 그에 비해 최근 한국에서 다시 만든 마리테 프랑소와 저버는 로고만 새로 박으면 되었다. 하이테크 운동화에 비하면 엄청나게 쉬운 게임이다. 


레트로 요소가 단가 저렴한 레퍼런스로 쓰인 경우는 라이프스타일 비즈니스의 다른 분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F&B 비즈니스에 속할 다양한 식당과 카페에서도 레트로 요소를 많이 차용한다. 특히 디자이너들이 총괄한 식당에서 그런 요소가 많이 보인다. 젊은이들이 많은 성수동을 걷다 보면 20세기 후반 미국이나 일본 식당의 디자인 요소를 사용한 식당들을 몇 개씩 찾아볼 수 있다.  


비즈니스의 참고 자료 관점으로 보면 결국 레트로 유행은 콘셉트계의 '가성비 템'이다. 공급자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저렴하고 기대 효과가 높으니까. 따라할 소스가 많으니 단가가 저렴하고, 알아볼 사람이 많으니 기대 효과가 높다. 다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반복되면 재미 없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큰 고민이 없고 돈도 조금 쓴다면 그럴듯한 효과를 내는 데도 한계가 있다. 박시한 실루엣의 티셔츠에 크게 박혀 있는 로고. 굵은 레터링으로 장식한 식당에서 먹는 그저 그런 버거의 맛. 젊은이들은 몰라도 1970-1990년대의 호황을 겪은 사람이라면 알지 않을까. 지금 레트로 유행의 평평하고 얄팍한 헛헛함을. 


그러거나 말거나 앞으로 레트로는 점점 더 유행할 것 같다. 유튜브에는 더욱 많은 20세기 동영상이 쌓일 것이고, 인쇄매체의 마지막 전성기이자 디지털 출판 대중화의 초창기인 90년대의 자료도 점점 많이 올라올 것이다. 더 많은 그때 그 시절 소스는 더 많은 어른들의 추억을 불러낼 것이고, 그만큼 젊은이들의 환상도 더욱 부추길 것이다. 어른의 추억과 젊은이의 환상을 현금화하고 싶은 사업가들의 시도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늘 지금이 아닌 시대의 것을 좋아해 왔다. 그러지 않고서야 몇 천년 전 유물이나 작품을 보관하고 좋아하고 값비싸게 사고 파는 문화와 시장이 생겼을 리 없다. 여기서 일반적인 '빈티지 애호'와 지금 레트로 유행의 차이가 나온다. '빈티지 애호'의 대상에는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있었다. 그 시대의 최고, 혹은 그 시대의 일상이었으나 지금에는 구할 수 없는 고품질이 된 것(미드 센트리 가구같은 게 여기 속한다)들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심사를 받아 빈티지의 지위로 격상됐다. 반면 지금 사람들이 돌아보는 20세기 후반이라는 레트로 소스에는 실질적 우수함보다는 호황의 분위기가 묻어 있을 뿐이다. 물론 90년대 물건만의 우수함을 찾아나서는 현대판 박물적 애호가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무척 적다. 우수한 90년대 빈티지의 시장 가격은 아직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나는 21세기의 가장 크고 슬픈 특징이 양극화라고 보는데, 레트로 역시 양극화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좋은 옛날 물건이나 풍조는 금새 모던 럭셔리로 재발견될 것이다. 90년대의 고품질 대량생산 제품들은 머지 않아 모던 빈티지가 되어 값비싼 값에 거래될 것이다. 반대쪽 레트로는 값싼 물건의 품질을 가려주기 위해서 쓰일 것이다. 요즘 인터넷 쇼핑몰에서 보이는 오버핏 티셔츠의 낮은 품질처럼. 그래서인지 요즘 길거리 청년들이 입고 다니는 레트로 오버핏 셔츠 재단과 원단의 품질이 높지 않은 걸 보면 왠지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이 든다.




<W korea>에 보냈던 원고입니다. 출판본은 약간 편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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