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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Jan 22. 2022

'좋은 사람'이 돼야겠다는 농담

허지웅 작가의 <살고 싶다는 농담>을 읽고.

 나름의 소신발언인데 개인적으로 유명인들의 에세이를 선호하지 않는다. 보통, '공부', '서사', '기타(자기계발, 에세이 등)'의 목적으로 독서를 하곤 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인데 공부하고, 읽어야 하는 분야의 책들은 끝이 없으니 기타의 목적까지 순위가 내려가는 일은 없다. 그런데 허지웅 작가의 <살고 싶다는 농담>은 예외였다. <마녀사냥> 이후, 보아왔던 시니컬하고 감각적인 예능인 허지웅이 아닌 '인간 허지웅', '작가 허지웅'이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항암 투쟁이라는 힘든 시기를 거쳐 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쓰였다. 인간 허지웅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썼을까. 그 의문이 내게 의외의 선택을 하게 했다.       

 



  <살고 싶다는 농담>은 허지웅 작가가 악성림프종 선고를 받고 몇 차례의 항암 치료를 받으며 겪은 상황들, 든 생각들을 모아 발간한 에세이집이다. 내용은 크게 '항암 치료 과정', '사회적 현상에 대한 견해', '이전 삶에 대한 회고'로 구성돼있다. 그의 책을 읽고 그에 대해 '예능인이라는 페르소나에 작가의 아이덴티티가 간과된 전형적인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좋은 글에는 세 가지 요건이 있다고 생각한다. '독특하고 세련된 표현력', '진솔한 이야기(감정)', '매력적인 사고방식(논리)'. <살고 싶다는 농담>에는 이 세 요소가 다 포함된다. 어떤 문장들은 길을 가다 좋은 노래를 듣고 무심코 멈추게 되는 것처럼 일연 시선을 멈추게 만든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해당 문장은 허지웅 작가가 특정 사례를 다루며 자본주의와 공권력, 집단주의의 이해관계가 합심해 한 공동체를 겨냥할 때 그 공동체가 어떤 과정으로 와해가 되고 구성원들이 어떻게 반목하게 되는지를 다루는 글의 뭉텅이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런 사례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개인과 개인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며 서서히 관계가 틀어지거나, 조직의 원칙에서 더 이상의 타당함을 찾지 못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한 개인이 마모되고 삭막해지는 것은 아마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인간성의 한 부분이 조금씩 닳아지고 있다고 느껴지던 참에 상기의 문장이 내게 다가왔다. 


 언젠가 출근길에 마주 오던 어르신 한분이 나를 보시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것을 깨달으셨는지 종종걸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마스크를 하나 드려도 되겠느냐고 여쭤봤을 때 고마워하시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야간까지 고생하는 인턴들에게 커피를 한잔씩 가져다주고 이따금 고충을 들어줄 때 밝아지는 표정도 그렇다. 마음 하나 보내고 작은 시간 하나 보태는 것만으로 타인들에게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 하루는 더 그래도 썩 나쁘지 않았다고 느끼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나에게도 나름 괜찮은 하루 아닌가. 와해된 공동체가 다시 화합하고, 내 주변의 삶이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면 그것은 거대한 보상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애정과 연대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힘들지만 그래도 이 작은 선의를 잃지는 말아야지. 


수면제와 진통제를 먹고 침대에 누우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내 삶에 고통을 안긴 사람들의 얼굴이 천장에 투사된다. 나를 배신하고 기만하고 속였던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이 내게 암을 심었다고 생각한다. 이자들이 천장에 맺혀 나를 내려다본다. 축축하고 무거워진 천장이 나를 향해 천천히 내려온다.
(…)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항암 치료에 대한 허지웅 작가의 묘사는 굉장히 진솔하고 치열해 사뭇 무거운 마음으로 읽게 된다. 어떤 글들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고 느껴질 만큼 과감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육체적 괴로움이 정신의 영역까지 침범해 온갖 감정과 생각들을 헤집어 놓을 때, 나라면 어떤 기억의 침전물이 정신의 최상층까지 부유할까 가만히 고민해보았다. 나 역시도 위의 인용처럼 나를 괴롭히고, 절망하게 했던 기억들이 부유할 것 같다. 인생을 메모리카드에 비유했을 때, 좋은 기억으로만으로도 용량이 아쉬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그 원망스러운 사람들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로 채워져 있고 지워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짐짓 괴로울 것이다.


 입사 초기에 모셨던 한 상급자는 몇 마디 말만으로 사람의 자존감을 뚝뚝 떨어뜨리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부하직원에게는 엄격한 데다가, 부하직원이 업무를 다 마무리해도 당신보다 먼저 퇴근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전형적인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 상급자가 회사를 떠난 것도 1년이 다 돼가지만 여전히 그때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면 특유의 찝찝함과 불쾌함이 역한 하수구 냄새처럼 올라온다. 그런데 별 수 있나. 가끔씩 올라오는 그 역한 냄새가 싫다면 내 기억을 탁 트인 숲 속으로 이전시키자. 그리고 좋은 기억을 심자. 이따금 그 냄새가 올라와도 내게 영향을 주지 못할 만큼 향기로운 기억을 심자. 


 지금 이 순간도 역한 하수구 냄새와 싸우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한다. 당신들은 당신들에게 그런 위해를 가하는 사람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들이 누군가의 기억과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을만한 자리에 올라섰을 때, 당신들은 악독했던 그들과는 달리 향기로운 기억 하나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처음 인용한 문장처럼 당신을 구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허지웅 작가의 말처럼 우리 모두 살아내자. 하수구 냄새도, 피해의식도, 현실도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자고 결심한다면 이전보다 나를 괴롭히지는 않을 테니까.


특히 젊은 날은 객관화가 어려운 시기다. 내 노력을 알아주는 조직도 어른도 드물다. 정당한 대가를 바랄 수도 없다. 타인에 관한 경험이 적어서 내 불행만이 굉장히 특별하고 잔인한 것처럼 느껴진다. 나이 든다고 상황이 개벽하지 않는다  

 자신의 젊은 날을 순도 100%로 진솔하게 고백하며 청춘의 난제를 진정성을 담아 기록한 문장도 퍽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한다. 불행은 세면대의 클렌징 폼과 같아서 끝이라고 생각한 시점에도 자그마치 몇 주치의 양은 더 남아있기 마련이다. 특히 허지웅 작가가 쓴 것처럼 젊은 날의 불행은 대처하기가 더 어렵다. 지금도 많은 나이는 아니나 지금보다 더 젊을 때는 '왜 내 삶만 이렇게 불행한 걸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타인의 삶은 나보다는 덜 불행하겠다고 넘겨짚고는 거기서 오는 불행의 우위를 때로는 카타르시스인 것처럼 위로 아닌 위로처럼 즐기기도 했다. 


 나이가 들며 세 가지를 알게 됐다. '그런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 '남들도 나만큼 불행하다는 사실', '그러나 초연하기는 여전히 어렵다는 사실'이다. 원점처럼 느껴지겠지만 나는 조금씩 나아지기 위해 노력한다. 과거에는 불행이 나를 일보 후퇴하게 했다면 이제는 일보 반의 반이라도 나아가려 고군분투한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일련의 불행과 마주했다. 야근을 하며 준비해온 테스트는 무산됐고, 주요 업무 배정의 우선순위에도 일반적인 조직의 논리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밀려났다. 신경이 잘 벼려진 칼처럼 극도로 예민해졌다. 옥상에서 가족 같은 형에게 전화로 이 사건에 대한 욕지거리를 하고 나서야 속을 진정시킬 수 있었으니.


 어쩌면 오늘의 내 상황이 위의 인용문과 같을지도 모른다. 노력과 대가는 외면받았고, 지금 이 불행은 나에게 너무 크다. 화산이 폭발한 후에는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는 것처럼 공허함이 정신상태를 짙게 메운다. 어쩌면 나는 끝없이 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피해의식에 휩싸여 독기로 나를 가득 채울 수도 있다. 일종의 시위로서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허지웅 작가가 인용문과 같은 페이지에 쓴 글처럼 당신이 화가 난다는 것은 당신이 인간이라는 증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두 번째 인용문에서 풀어쓴 글이 과거의 불행한 기억이 나를 고꾸라지게 하지 않도록 방향감각을 잘 잡으라는 의미라면, 세 번째 인용문에서 풀어쓴 글은 그 방향감각을 믿고 어떻게든 발을 내딛으라는 의미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식의 무례한 결론을 도출하자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아픈 게 당연한 청춘도, 노년도 없다. 그저 나아가자는 거다. 불행은 언제나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서 주어진다. 이게 어쩔 수가 없어서 짜증나긴한데 사르트르가 말하고 니체가 말한 것처럼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한다.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당신에게 불행을 준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힘내자.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심과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밝은 눈을 갖게 되기를(인간 허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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