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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혜 Mar 28. 2023

입봉은 뭐고 야마는 뭐야? 방송가 용어 사전

“이번 화 야마가 뭐야?”

“이 작가 입봉 했다며? 한 턱 쏴야지!”


야마는 뭐고, 입봉은 뭘까? 이 생경한 단어들의 뜻을 아시는지. 

(*야마는 프로그램이나 기사의 핵심 주제

**입봉은 본인이 주체가 되어 방송을 만들게 되는 행위. '데뷔'와 비슷한 뜻의 은어)



어느 분야나 업계 용어가 있겠지만 방송가는 유독 ‘내부자들의 언어’가 만연한 곳이다. 일본식 단어와 속어가 혼재해 처음 회의에 들어가면 쏟아지는 낯선 말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다. 또 어디서나 쓰는 단어를 업계 사람끼리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기도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방송작가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방송가 용어 사전 입문 편. 




올림픽, 월드컵 

:2년마다 돌아오는 작가들의 보릿고개


이 단어를 방송작가들에게 보여주면 다급하게 알바천국과 미디어잡 홈페이지를 여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대부분의 방송사는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대규모 국제 스포츠 경기 일정이 잡히면 TV 프로그램 다수를 휴방 또는 결방 조치하는데, 이는 프리랜서 방송 제작 인력에게는 사실상 일시적 실직 상태를 의미한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특별 편성되면 스태프와 작가들은 그 기간 동안 급여를 전혀 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급하게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다. 결방이 언제 끝날지 알기 어려울뿐더러, 업계 특성상 급하게 다시 방송에 투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계에서는 결방이나 휴방의 경우 ‘방송이 죽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사실 죽는 건 방송작가의 통장이다. 




자니? 

:장대한 밤샘의 서막


주로 자정을 넘긴 시간 카카오톡과 문자, 텔레그램 메시지로 오는 두 글자. 보통 연차가 높은 방송 종사자가 신입에게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남친이나 구여친의 “자니?”는 환멸만 남길 뿐 타격이 없지만 방송업계의 “자니?”는 다르다. 장대한 노동의 서막이며 ‘연결되지 않을 권리(비근무시간에 업무상 이메일이나 전화, 메시지에 응답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가볍게 무시하는 폐단이다. 유의어로는 “섭외됐어?”, “지금 확인해 줘”, “원고 아침 8시까지 넘겨줘.”가 있다. 자니?를 무시하고 정말 자다간 순식간에 실직자가 될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개편 시즌이라고요? 잠시만요.. (짐을 챙긴다)




개편

:실직과 취직의 교차로


개편은 방송업계 종사자에게 실직이나 구직을 의미하기도 한다. 직을 구한 이들과 직을 떠나는 이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시기. 통상 방송사는 3월에 봄 개편, 9월에 가을 개편을 단행한다. 성적이 좋지 않거나 방송가 고위 관계자들이 보기에 마뜩잖은 프로그램은 이 시즌에 물갈이될 가능성이 높다. 방송작가나 프리랜서 DJ들이 교체되거나 나아가 프로그램 폐지도 이 시기에 많이 이뤄진다. 개편과 관련된 유명한 명언이 있다. 30여 년 동안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진행해 온 배철수 씨의 말이다. “라디오는 6개월마다 개편을 한다. 6개월 단위로 끊어서 생각하기 때문에 향후 5~10년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는다. 6개월 넘어가서 개편에 살아남으면 또 열심히 하는 거다.” 최장수 단일 DJ가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계약서 

:정부가 만들면 회사가 고치는 신비의 문서


방송작가들에게 수십 년간 전설로만 회자되던 신비의 문서. 방송사에 요구해도 ‘원래 그런 게 없다’는 답만 돌아왔었는데... 그러다 지난 2017년 최초로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가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공개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접한 프리랜서 방송작가들은 몹시 기뻐했다. 종이 한 장 없이 구두로 채용되고 하루아침에 해고되던 나날들이여 이제는 안녕! 하지만 방송가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님을 그들은 몰랐던 것... 계약서가 생기자 일부 방송사들은 ‘계약기간 종료 전이라도 갑에 의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식의 창의적인 단서조항을 만들어 붙이기 시작했다. 방송작가유니온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A 방송사는 6개월 단위로 고용기간을 한정하더니 3개월, 급기야는 1개월짜리 계약서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정부가 계약서를 만드니 방송사가 계약 내용을 고친다. 가히 창과 방패의 싸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개런티 

:‘트렁크 이벤트’에 착잡해지는 이유


누군가 방송계의 현실을 묻거든 고개를 들어 개런티를 보게 하라. 방송계의 불공정과 불평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 기사를 보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건 연예인의 억대 개런티이지만, 방송가에는 최저임금 이하의 급여를 손에 쥐는 이들이 훨씬 많다. 같은 프로그램 안에서도 유명한 출연진은 회당 수백에서 수천만 원의 개런티를 받지만 신입 방송작가의 경우 회당 20만 원, 그러니까 한 달을 일해도 100만 원 안팎을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내 주변의 경우 한 달 급여 80만 원이 최저 기록이었다.) 빌딩으로 재테크를 하는 연예인의 뒤에는 밤새워 일하고도 택시도 못 타는 스태프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 스태프들이 연예인에게 열어주는 ‘트렁크 이벤트(자동차 내부 트렁크를 꽃과 풍선 등으로 꾸며 열어주는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보고 있노라니 피우지도 않는 담배 생각이 간절해지고 마는데... 자신보다 수십에서 수백 배 많은 개런티를 받는 연예인에게 스태프들이 돈을 걷어 이벤트를 해주다니 이 무슨 기이한 일이란 말인가. 물론 천사 같은 연예인을 만나 지극히 행복한 환경에서 일을 한 스태프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스태프와 연예인들이 처한 구조적 노동 환경은 다르다. 단칸방과 타워팰리스만큼 다르고 김밥과 캐비어만큼 다르다. 선한 마음으로 기꺼이 연예인을 위해 호의를 베푸는 스태프들에게 지적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불공정한 개런티 구조를 만드는 업계 환경에 대해 말하고 싶다. 스태프나 신입 작가에게 적정 수준의 개런티가 지급된다면 트렁크 이벤트를 보는 마음도 이렇게 착잡하지는 않으련만. 




쌈마이, 니마이(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식 단어들)

:자막으론 안 쓰는 일본어가 제작 현장에서는 난무하는 아이러니


이쯤에서 힘 있게 나와주는 일본 단어. 직역하자면 쌈마이는 3류, 니마이는 2류. 드라마 업계에서 쌈마이는 조연급을 의미하고 니마이는 주연급을 뜻한다. 사실 방송업계에서 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일본어는 몰라도 이런 일본식 단어들은 알 수밖에 없다. 선배들이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일본식 단어들을 모르면 회의에서도 애매하게 웃으며 외국에서 막 도착한 교환학생의 기분으로 우두커니 앉아있어야 하기에 업계 선배에게 속성 교육을 받기도 한다. 어쩌다 이런 일본식 단어들이 언론과 방송계에 대물림되어 왔을까?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방송과 언론의 경우 일제 강점기에 탄생했다는 태생적 특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태생’을 운운하기에 지금은 너무나 2023년인데... 세어봤더니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게 1910년이다. 벌써 100년도 훌쩍 지난 시점에 아직도 구다리(단락), 야마(주제), 우라까이(베끼기), 미다시(표제)라니. 방송에 송출되는 단어는 갈치 가시 바르듯 정성 들여 골라내면서 정작 제작 현장에는 일본어가 난무하는 아이러니를 어쩌면 좋을까. 




엔딩 스크롤 

:그럼에도 다음 방송을 만들 수 있게 하는 힘


모든 TV 프로그램에서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파트. 프로그램이 마무리될 때 엔딩 음악과 함께 화면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자막을 의미하는데, 방송 제작에 참여한 스태프들의 이름과 직군이 쓰여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엔딩 스크롤이 올라갈 때 TV를 끄거나 채널을 돌리지만, 방송 현장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름이 화면에 오르는 그 찰나의 순간으로 다음 방송을 만들 기력을 얻는다. 엔딩 스크롤에 등장하는 수십, 수백의 이름 대다수는 비정규직이거나 하도급 업체의 직원 또는 프리랜서다. 소수의 정규직과 다수의 프리랜서가 방송을 만드는 모습은 이제 너무 흔한 광경이 되었다. 오늘 밤에도 TV 프로그램 스크롤에 수많은 비정규직의 이름이 스친다. 나는 조용히 빈다. 이들이 부디 오늘은 “자니?”라는 메시지를 받지 않기를. 스포츠 시즌에도 결방을 피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부디 방송을 사랑하는 이들이 오래도록 엔딩 스크롤에 남아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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