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봉투》의 주인공 주희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여성이다. 갓 피어난 꽃처럼 화사해야 할 그녀의 삶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치킨집으로, 또 편의점으로 이어지는 알바의 연속일 뿐. 돈도 빽도 없는 그녀에게 젊은이의 낭만이란 구경할 수는 있어도 가질 수 없는 신기루이다. 그녀는 백화점 간판에 걸린 모델의 모습을 바라보며 알바만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시급 3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의 알바.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수상한 남자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이다. 1. 연락이 오면 언제든지 저택에 온다. 2. 남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3. 노동의 합당한 대가로서 돈을 받는다.라는 단순한 규칙만 지킨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더군다나 주희가 대가로서 받는 돈은 치킨집이나 편의점 알바로는 벌 수 없을 만큼 액수가 큰 돈이다. 주희가 남자의 저택을 드나드는 횟수가 증가하면 할수록 주희의 집은 온갖 화려한 명품들로 치장되어간다.
고급 원룸을 가득 채운 명품 구두와 옷, 냉장고를 가득 채운 비싼 식재료. 주희는 그 안에서 공주처럼 군림한다. 하지만 그녀의 삶이 화려해질수록,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악화되어 간다. 같이 삼각 김밥을 먹으며 우정을 쌓았던 친구와도 멀어지고, 그녀 삶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남자친구 해규와의 갈등도 깊어만 간다. 그럼에도 주희는 책 읽어주는 알바를 그만두지 못한다. 자신의 화려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희는 가난하고 초라했던 자신의 과거를 망각한 채, 풍요롭고 화려한 삶을 즐긴다. 주희의 세계는 ‘돈’에 의해 평가되고 ‘돈’에 의해 결정된다. 주희는 돈으로 남자친구를 사(애인대행알바모집)기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땅에 떨어진 마카롱을 주워 먹기도 한다.
마카롱은 두 개의 과자 사이에 초코크림, 바닐라크림, 산딸기 크림 등을 넣고 만든 샌드형 과자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서질 만큼 조직이 연약하고, 과자 사이를 채운 크림은 찐득거리며 입 안에 붙어 버린다. 주희가 가지게 된 부(富)의 속성도 마카롱처럼 이에 쉽게 들러붙고, 부서지기 쉽다. 그녀의 부(富)는 자신의 힘이 아닌 저택에 사는 남자로부터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주희를 부르지 않는다면, 아무 능력 없는 주희는 스스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로지 돈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보희의 모습은 말하자면 주희의 타락한 미래이다.
주희의 곁에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친구라고 생각했던 보희는 실상 ‘돈’밖에 없는 속물임이 드러나면서, 주희는 자신의 돈이 가진 속성을 깨닫는다. 그것은 자신에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린 것,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것,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된다. 주희는 이제 성장한다. 저택의 남자에게 저항하고, 다시는 그곳으로 향하지 않는다. 비록 많은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다시 고시원에서의 삶을 이어나간다. 비록 겉모양은 가난하고 초라할지라도 마음만은 당당하고 떳떳한 자신의 삶,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바야흐로 봄이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피어나는 이 계절에, 무엇이든 새로 태동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 새로 피어난 이 꽃들은 연분홍, 연노랑의 여린 빛깔을 하고 있다. 여리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고, 약한 것은 부서지기 쉽다. 그러나 새로운 생명이 태동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봄의 꽃들은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다. 여리고 연약한 주희의 삶은 ‘돈’에 의해 한 번 무너졌지만, 그녀는 성장하고 성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