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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도바다 Mar 22. 2020

<생각하는 어리벙벙> 그게 나의 이름이다.

---나의 인생 이야기 

<생각하는 어리벙벙>이 그게 나의 이름이다.    

                     ----20119037 윤 0 0    

1. 심부름꾼

  근엄한 큰형과 계산적인 로비스트 둘째형 세침 때기 유일한 여자인 누나 영악한 막내 놈 사이에 어정쩡 끼어있는 나는 어머니 아버지가 부려먹기 가장 쉬운 심부름꾼이었다.

잔심부름서부터 막걸리 받아오는 것까지 집안의 모든 심부름은 내가 했던 것 같다. 막걸리 받아 오는 심부름은 나에게 일찍이 막걸리 맛을 알게 해 준 짜릿한 유년의 추억이다.

아버지는 경찰서 유리창을 박살내고 경찰직을 사직하셨다. 그 멋진 패기가 어렸을 때는 영웅담으로 들렸으나 이제와 생각해보면 매우 어리석은 행동인 것은 분명하다.

어머니와 4남 1녀의 생활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런 행동을 하셨다니...

그 이후 아버지 말씀하시길 당신 동기 중 누구는 서울 관악경찰서에 서장이 되었느니 하시면서 경찰직을 못내 아쉬워하셨던 기억이 난다. 우울하고 불우한 기억이며 지금은 하늘에 계시지만 바보 같은 아버지다.

아버지가 강퇴 후 확실한 직업을 가지지 않은 것은 지금도 이상했다.

젊은 나이에 경찰직을 박차고 나왔는데 그 당시 직업의 분화가 활발하지 못해 일자리를 못 구하셨나?

무기력하고 왜소한 아버지를 보며 유년시절부터 어느 직장이던지 한번 입직하면 평생을 하리라 다짐하였고

현재의 교육직 공무원 생활도 30년을 넘게 지탱해온 근원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장 역할은 당연히 어머니가 맡았다.

바느질과 화장품 외판원으로 우리 5형제를 모두 키워 내신 어머니의 눈물겨운 사투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지금도 더 무섭고 존경스럽다.    

2. 땡땡이

 초등학교 때는 땡땡이치는 맛으로 학교에 다녔다.

산과 들판으로 쏘다니는 숭고하고 고상하고 자유를 만끽한 그 시절 행동은 낭만 그 자체였다.

소꿉놀이, 전쟁놀이, 물고기 잡기, 토기 몰이, 감자, 옥수수 서리, 술래잡기 등

동네 친구들과 산과 들녘을 쏘다니면서 노는 것이 나의 진지하고 특별한 수업이었다.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한 시점으로 회귀하라면 이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인간은 신비와 비밀을 감추는 데 있고 자연은 신비와 넉넉한 품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하지 않았나

가난했지만 행복했고 모든 게 부족했지만 자연에서 모든 것을 획득했다.

왕복 6km의 학교를 걸어 다니는 길에는 나를 유혹하는 것들이 왜 그리 많았던지....

어~휴 그 봄날의 휘청거리는 시골길의 햇살이라니..... 자연의 포근하고 넉넉한 품이라니....    

3. 휴학하고 기와 찍는 시다를 하다

 순전히 어머니의 의지와 노력으로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생으로 남는 기억은 별로 없다.

땡땡이만 안쳤지 그저 성적도 중간 또는 그 이하쯤, 친구와 선생님의 인정과 관계도 중간쯤 차지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중3 때의 일이다. 경제적으로 집안은 날로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일찍이 생활전선에 뛰어든 둘째 형이 경북 상주에 기와공장의 책임자로 갈 기회가 주어졌다.

식사와 기와 찍는 일을 돕는 어머니와 시다를 할 수 있는 내가 같이 가기로 했다.

1년 동안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을지 몰라도 어머니와 둘째형의 결정에 따라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1년 휴학을 하고 상주로 갔다.

나의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는 이상하고 힘든 일을 하면서 곰삭였다.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형과 셋이서 살면서 일만 죽도록 했다.

사모리를 개고 도시를 찍고 기와를 찍고 가다를 깨끗이 씻고 단순하고 반복된 일의 연속이었다.

일이 하기 싫어 가끔은 일부러 아팠고 국민학교 때 습득한 땡땡이를 쳤다. 많이 울었다.

학교 가는 아이들을 보면 부러웠고 시멘트로 하는 일의 공정이 사실 너무 힘들어 울었다.

1년이 거의 끝나 갈 무렵 둘째형이 군대 입대한다고 상주 버스터미널로 가는 형을 뒤 따라가며

왜 그리 서럽게 울었던지....

지금도 어머니와 둘째형 셋이서만 남으면 그때의 추억을 가만가만 들추는데

다른 가족들 모르는 잔잔한 유대감 같은 것, 또는 세 사람만 보유한 탑 시크리트가 있는 것처럼  

한 번쯤 씩~ 웃으며 오래되고 곰삭은 슬픈 눈물을 삼키지만 셋은 서로 통하는 공통분모가 생겼다.    

4. 서울 대성학원

 중3에 다시 복학하니 1년 후배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뒤 번호가 되었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다.

중학교 3학년, 1년 동안은 완벽하게 겉돌았다.

1년 동안 휴학까지 하면서 노동을 한 보상이 이것이란 말인가?

부모, 특히 아버지가 많이 미웠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큰형은 당연히 맡이니까 고등학교 졸업 후 초등교원양성소를 나와 초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고 있지만(2011년 현재, 00군 모 초등학교 교장) 누나와 둘째형은 중학교밖에 졸업 못 했는데 나의 입학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어머니의 힘이었다.

어머니는 지역에서 소문난 사람이었다. 민주공화당 당원이었고(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존경하였던 걸로 기억한다. 육영수 여사와 찍은 사진도 있음).

00 부녀 회장이었으며 비록 바느질과 화장품 외판원으로 5형제를 키웠지만 효부상과 장한 어머니상을 탈 정도로 생활력이 뛰어 난 사람이었다.

초. 중. 고등학교 1학년까지 10년 동안의 나의 학생으로서의 위치는 그냥 땡땡이치거나 무의미하게 보냈거나

휴학하고 기와를 찍는 막노동을 일 년 간 했던 중간 이하의 학생이었다.  

00종합고등학교 보통과(인문계열)에 입학한 나는 공부를 시작할 결정적 기회는 그 해 겨울방학에 찾아왔다.

그 당시 강원도 산골에서도 서울 학원에 가는 붐이 있었다.

역시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

우리 반에서 항상 1~2등으로 공부를 잘했던 도00이라는 친구와 친하게 지낸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친구가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다가오는 11월 말쯤

서울 대성학원을 간다고 하면서 나도 같이 가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집안 형편을 빠듯하게 아는 나로서는 난색을 표했지만 어머니에게 한번 얘기는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큰돈이 들어감에도 어머니의 흔쾌한? 허락으로 서울 대성학원에 1개월 반 단과반에 입학했다.  

지금 생각해도 신의 한 수였으며 도00를 지금도 절친으로 지내며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유다.

도00은 건강보험평가심사원에서 조사실장(공무원의 3~4급 정도)으로 퇴직하였고 나도 4급 서기관으로 

퇴직 후 잘 지내고 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해외 자유여행을 30일, 10일 같이 다닐 정도로 친하게 지내고 있다.

나의 다음 블로그 여행에세이 중 <동네 남아도는 아저씨 셋, 동남아, 30일, 자유여행> 시리즈는 우리들의 친함이 활성화된 우아한 모습이다. 나머지 한 명은 공무원 동기 중 강릉 사는 H라는 친구와 3인방 멤버가 되었다.  

진짜 열심히 공부하는 서울 애들과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화들짝 놀랐고

지금까지 나라는 학생으로서의 존재감, 그 미약함과 게으름, 너무 공부 안 했음에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그때부터 졸업 때까지 거의 잠을 안 자고 공부했다. 12년 치 공부를 2년에 다 해치웠다.

물론 수학과 과학은 기초가 부실해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지금도 수학의 인수분해를 풀면서 내가 답에 도달했다는 그 짜릿함에 전율했던 그 시절을 가끔 회상하면 대단했던 나에게 박수를 보내곤 한다.)  

진짜 열심히 했다. 여름철에는 마루에 모기장을 쳐놓고 숱한 밤을 지새운 기억은

지금도 어머니나 가족들에게 곧잘 회자되곤 한다.

우리 동네 이웃집에 살았던 어르신들도 어쩌다 명절 때 만나면 나를 보고  <열공하던 총각이 왔군!> 하면서

그때를 이야기하면서 대견해 하곤 했다.    

5. 첫 직장의 입직이 평생직장이 되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가을쯤 공부에 불이 붙어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하는 와중에

초등학교 교사였던 큰형의 말 한마디가 지금도 가슴 아프게 와 닿는다.

집안 형편을 고려해 대학은 포기하고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직하라는 말.....

몸에 기운이 쭉 빠졌지만 어찌하랴, 그래도 속으로 슬픔과 울분을 삼키며 정말 열심히 공부, 또 공부했다.

내가 벌어 대학을 갈 수도 있었건만, 형이 동생 교육시켜 대성시키는 본보기 사례가 간혹(?) 있기도 하건만

이래저래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 막급하고 큰형에 대해 무척 서운했던 시기였다.

전교 중간쯤 아니 그 이하였던 성적은 2학년 2학기부터 전교 보통과(인문계열) 67명 중 3~5등 (사실, 1~2등은 한 번도 못했다.) 안에 항상 들었다. 

상과 한 반, 토목과 한 반인 종합고등학교, 전부 3개반이었지만 다른 반과의 비교는 무의미 했다.

고등학교 시절 기억나는 거 또 하나, 2학년 국어 시간 작문 시간이었나?, 내 글이 괜찮다고, 우수하다고 우리반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국어선생님 이무섭, 지금도 그 당시 추억이 아련하다. 그 때 내 글이 어떤 글이었나 몹시 궁금하다. 그리하여 20여 년이 지난 199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서 시가 당선되고 나서는 이무섭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는, 큰 절을 올렸다는....

고3 말쯤 담임 선생님이 소개해준 공무원 시험을 치러 갔다. 우리 동네에는 고등학교가 딱 두 학교가 있는데, 남학교에서 버스 한 대, 여학교에서 버스 한 대(약 80여 명이라고 나중에 들었음)를 대절해서

춘천으로 시험을 치러 갔다. 남학교에서 2명, 여학교에서 2명이 합격되었다.

그 시험이 지금 내가 평생 봉직하고 있는 교육직 시험이었다. 사실 다른 기회도 많았을 텐데 너무 쉽게 편안하게 안주한 건 아니었을까 그런 후회나 성급함, 또는 아쉬움으로 나를 질책할 때도 많았지만....     

6. 군대에서 책 읽기

 졸업하는 그 해에(‘78.5.10) 모교인 00중. 고등학교 서무과(지금은 행정실)로 발령을 받았다.

나의 발령에는 아버지가 특히 좋아하셨다. 시험 당시 강원일보에 난 교육직 경쟁률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해서 보관하시면서 동네방네 자랑을 하실 정도로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담담하게 좋아하신 듯했고 큰형과 다른 가족들은 휴! 정말 다행이다라는 정도로 좋아한 것 같다. 

교육직이란 직종이 어떤 일을 하는 지도 전혀 모른 채 1년을 근무하고 군 입대를 위해 휴직계를 냈다.

신병 훈련소를 마치고 자대 배치 할 때 어리벙벙하게도 공무원으로 근무했다는 말도 못 하고

( 같이 간 친구는 일천한 공무원 근무 경력이지만 공무원으로 근무한 경력을 잘 이야기해서 행정병으로 빠진 친구가 부럽기도 했었다.) 제27사단 이기자 부대 사단 수색대대로 배속되었다.

27사단은 예비사단으로 특히, 사단 수색대대는 훈련이 힘들기로 유명한 곳, 매일 10km 구보를 해야 하고 수색정찰훈련을 위해 야간훈련을 하고 산악구보다 침투 훈련이다 전투체육이다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완전 신병일 때 한 번은 10km 구보 후 극심한 고통과 정신혼미로 공사 중인 내무반 지하에 웅크리고 숨어서

몹시 떨었던 기억이 난다. 간혹 장거리 구보 후 죽기도 한다는 그 패닉 현상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군대 생활은 죽음과 환희였다.

죽음은 힘든 훈련과 선임들의 횡포와 소외감과 고립감이었고 환희는 내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책 읽기였다.

물론 군대라는 모든 거부감과 부정합과 싫음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독서였지만 나에게 책 읽기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허리에 차는 실탄 탄띠에는 삼중당 문고의  작은 책들이 몇 권씩 들어 있었다.

훈련 중에도 읽었고 보초를 서면서도 읽었으며 심지어 행군 중에도 읽고 또 읽었다.

지금 아내에게 어머니에게 형과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하면 20장씩 장문의 편지를 쓴 것도

다 그 당시 독서량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7. 암흑의 시기, 술로 불 밝히다. 

  제대 후 복직 발령은 평창 00 중고등학교로 받았다.(‘82.3.1) 6개월 후 8급으로 승진하면서 정선 00 중고등학교로 전보되어 갔다. ’ 83년 결혼했다.(여학교의 교육행정직 합격자 2명 중.....)

결혼 생활은 빈곤했지만 나름 잘 살았다. 아이도 태어났다.

그러나 직장에 대한 회의와 가족과 사회에서 나의 어리벙벙한 역할 때문에 항상 방황했다.

나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술과 담배로 소일했다.

암흑의 시기를 술과 군대서 배운 담배로 환하게 밝힌 시기였다.

거의 10여 년을 그렇게 무의미하게 살았다.    

8. 날다, 까불다, 날개 없이 추락하다

 아내와 00교육청 및 학교에 같이 근무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무의미한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은 지루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가끔의 술로 나를 태우고 없애는 일탈로 가족들을 속상하게 하기도 했고

그러나 일을 시작했다 하면 심플하고 모던하게 처리하며 때론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00고등학교 근무 시 문학하는 교사들과 만남으로 인해 나의 인생은 바뀌었다.

1991년도에 현대문학연구회였던가?

00시에 근무하는 교직원들의 문학모임에 가입하면서 문학동아리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치열했다. 열정적이었다. 많이 아팠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동아리 활동이 너무 적다고 생각했다.

매일 만나서 문학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치열한 습작 시절을 보냈다. 물론 문학 습작 시절이 치열하다는 것은 어딘가 많이 아프다는 것, 가정이나 직장이 없었으면 했다는 것. 그냥 전업 작가가 되고 싶었다는 것.

때로는 귀가가 늦어져 가정의 불화는 있었지만 아내는 어느 정도 이해해주었다. 

그렇게 습작 시절에 몇 백 편의 시가 탄생하였다.

지금도 보관하고 있지만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작품으로 문학동아리 회원들에게 보이면

매정하고 단호하게 칼질을 숱하게 당하면서도 행복하다고 느낀 아름다운 습작 시절이었다. 

어느 날 토요일 오후 직원들과 테니스를 치고 있는데 강원일보사에서 전화가 왔다.

내 작품이 199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었다고.... 시 제목은 <세월>이다.

이 한마디에 나는 테니스 공처럼 공중에 약 10분은 떠있었다.

아니, 하늘을 날았다. 이때 날개 없이 추락하는 법을 배웠나?

갑자기 유명인이 되었다. 춘천, 원주, 강릉, 서울 등 대도시에서만 몇 해 동안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자가 

배출되었는데 00시라는 시골 마을에서 신춘문예 당선자가 나온 것이다. 아마도 신선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중앙 문단과 일간지, 지방 문단과 일간지에 여러 차례 시도 내고 수필도 내고 붕붕 떠다녔다.

그리고 그해 바로 00시 문단에서 00시 문인협회 지부장을 타의 반 자의 반 맡게 되었다.

내 인생 운명에 이렇게 문운이 번창할 운수였단 말인가.

갑자기 유명 문인이 되어 얼떨떨하였고 오만해지기 시작하였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너무 까불었다.  

비록 지방신문 신춘문예 당선이지만 그 위력은 한 2년은 가는 듯했다.

신춘문예 이후 독자를 감동시킬 작품을 계속하여 발표하지 못하니 차츰 청탁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그러다가 2년 뒤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공무원 문예대전을 처음 실시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공무원 사진대전, 미술대전은 그전부터 있었는데 문예대전은 처음 시작한 것이다.

아! 그렇군 하며, 신선한 감각으로 응모하였는데 시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시 제목은 <밤낚시>이다. 

또 한 번 문학으로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공무원 문예대전은 중앙지 신춘문예처럼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신경림, 김남조, 김후란 선생이 최종 심사를 했는데 극찬을 했다. 3천 여 편의 응모 시에서 1등이라니...

그러나 나의 시인인 문인으로서 유명세는 거기까지였다.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과 제1회(특히 제*1회에 방점을 둔다) 공무원 문예대전 시 대상을 바탕으로

시집을 내려고 하였으나 흔쾌히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었다.

창착과비평사에서 퇴짜(거기 주간이 강원도 출신 고형렬 시인인데...), 문학과 지성사에서 일 없음,

문학동네에서 담당기자 인터뷰 지연, 문학세계사에서는 끝없는 검토 중 등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강원도 등 타지방의  많은 출판사는 만사 오케이였다. 꼭 창비나 문지로 시집을 출간하고 싶었는데....,

그 꿈은 날개 없이 끝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제주도 다층 출판사를 알게 되어 2001년 첫 시집 <허공에도 집이 있다>를 발간하게 되었다.

그리고 00시 문인협회 지부장 자리도 6년 만에 내려 놓았다.

그 자리는 빨리 다른 문학인에게 물려주려고 했으나 적임자가 늦게 나타나 나를 곤혹스럽게 한 바 있다.

00시 문단의 인적토양이 워낙 척박했으므로....    

9. 다시 침묵이 맛있는 시기, 또는 사무관 시험기

 약 20년 이상을 교육직으로 근무하고  6급(계장급)으로 7~8년을 근무하던 2000년대 들어

나의 화두는 사무관(5급, 과장급) 승진에 쏠렸다. 2003년에 사무관 시험 칠 기회가 주어졌다.

1차 시험으로 헌법, 행정법, 2차 시험으로 교육학개론, 교육심리학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 강원도 수석으로 합격했다.

교육심리학은 100점을 맞은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벌써 사무관이 된 지 만 6년이 지났다.

서기관(4급, 지방에서는 국장급) 승진은 천운(사실은, 빽, 학연이나 지연이라도 있어야...)과 조상운이 있어야 되는 거지만 사무관 시험에 두 번 낙방한 것이 직장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실패를 통해 성취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 것이다.

그래서 사무관이 되어서도 겸손하고 직원들의 의견을 잘 경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특히 늦게나마 나머지 공부를 하러 청주시 강내면 한국교원대학교 정책전문대학원에 입학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며 내 일생에서 나에게 선사한 선물 중에 가장 특별하고 기특한 것이 되었다. 

(교육부를 포함해서 전국 교육기관과 대학교, 중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사무관과 장학사에게 입학자격이 주어지며 정원은 매년 72명 임. 1년은 교원대에 파견되어 완전 학생으로 집중 수업, 나머지 1년은 직장으로 복귀 후 출석수업 및 논문 작성 지도수업, 그다음 해 졸업, 또는 수료)  

사실, 30여 년을 근무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공직을 회피하기 위한 일종의 그럴듯한 도피였으니 강원도교육청 인사 부서에 다짐을 받듯 여러 차례 청탁을 해서 이루어졌다. 

어차피 방송통신대학에서 행정학 전공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했으니 한 번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었다.

솔직히는 아니다, 대학원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이 발동했거나 30년 가까운 직장생활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이것도 아니면 직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런 해방감을 즐기고 싶었다. 아니, 자유롭게 놀고 싶었다. 

대학원생 시절 라운딩을 했다 하면 늘 100돌이던 골프를 보기플레이(90타)로 만들었고, 여행, 특히 50이 되기 전에 인도 여행을 그렇게 염원 했었는데 대학원 여름방학 동안에 인도 배낭여행을 15일 갔다 온 것이다.

문학을 하면서 문우나 지인들에게 호언장담했던 인도 배낭여행, 류시화가 인도에 대한 꿈을 부풀게 만들었고 (내 생의 증거는 언제나 여행에 있었다. 내가 언제나 부러워 마지않는 사람은 이제 처음으로 배낭을 메고 새벽의 인도 공항에 도착하는 사람이다.), 후지와라 신야가 인도방랑을 적극 유도했던(걸을 때마다 나 자신과 내가 배워온 세계의 허위가 보였다. 여행은 무언의 바이블이다. 자연은 도덕이다. 침묵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침묵과 여행에서 나온 말이 나를 사로 잡았다.) 그 소원을 멋지게 이룬 것이다. 짝짝짝...

10. 프롤로그 없는 에필로그    

 내 인생은 어머니가 이야기 하셨 듯 대기만성의 징후가 만발한 늦깎이 인생이고 어리벙벙한 그 자체였다.

모든 게 남들보다 한 템포 늦는 듯했다. 어리벙벙해서 그랬고 심성이 착해서 그랬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에서 그랬고 웅숭 맞은 속 깊음에 그랬고 계산적이지 않은 성격 때문에 항상 먼저 카운터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그랬다. 자식들이 많지만 자네처럼 속을 전부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유일하다고,

그래서 진짜 좋아한다고...

그러나 <속이 넓다>는 말을 유년시절에 들었을 때는 그 말이 나를 놀리거나 조롱하는 말인 줄 알았다.

00교육청에서 과장으로 2년 2개월을 근무하면서 진정한 효도를 한 것 같다.

효도는 다른 게 아니더라. 어머니 옆에 항상 같이 있는 거라는 것, 과장 관사에 살면서 아침밥은 북실리 어머니 집에 가서 어머니와 매일 같이 아침식사를 하면서 알았다.  

그때는 매일 아침마다 방영되는 다큐 미니시리즈 <인간극장>을 보면서 먹은 어머니와의 아침식사, 특히 된장찌개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맛있고 짜릿하게 행복했다.

11. PS 

  이 글은 2011년 한국교원대학교 정책대학원 학생 신분으로 쓴 글이다.

<20119037> 이건 교원대 정책대학원 학번이다. 나를 증거하고 표식 하는 번호를 얼마 만에 부여받았던가?

숨어 있었던 그 당시 USB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어디 있다 이제 나왔니?

어느 교수가 기말 리포트로 개인 성장기를 작성해서 내라고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대학원 기숙사 내방(청주에 사는 룸메이트 덕분에 일 년 내내 독방을 사용했음)에서

저릿한 시간이 아니, 고독이 방안 가득 고여서 무섭게 침묵하고 있으므로 그냥 끄적거려 본 것인지는

거의 십 년이 가깝게 지난 지금(2020년, 봄)에는 기억이 당최 안 난다. 

이제는 4급 서기관으로 퇴직한 후(40년 8개월을 공무원으로 근무함) 연금수급자로 밥은 먹고살 만하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씩 국내외를 여행하며 여행기도 쓰고 이런 긴 글과 시를 쓰며 산다. 

또 골프도 확실하고 자신만만하게 보기 플레이어가 되어 가끔 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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