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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Sep 07. 2021

라이너스의 담요

분리불안에 도움을 주는 애착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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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두 살이 되는 라이너스는 지난달부터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늘 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가 유치원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첫날은 교실 안에 들어가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울음을 터뜨렸지만 다음 날은 유치원 문 앞에서, 그다음 날은 차를 타는 순간부터, 그리고 며칠 전부턴 옷을 갈아입을 때부터 펑펑 눈물을 쏟았다. 아침이면 유치원에 간다는 사실 때문인지 평소 덮고 자는 작은 담요 '요요'에 대한 라이너스의 집착도 심해졌다.


- 싫어! 엄마랑 있을 거야. 엄마 가지 마!


엄마는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린 라이너스를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엄마 금방 올게. 친구들하고 재밌게 놀아.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라이너스의 울음은 거세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엄마의 눈에도 살짝 물기가 어렸다. 한두 발짝 떼는 시늉을 했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 끝에 엄마는 겨우 인사를 건네고 교실 문을 나섰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라이너스와 눈높이를 맞춘 채 앉아 있던 선생님이 이런저런 장난감을 보여주며 라이너스를 달래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들었을 때 라이너스의 엄마가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 자, 여기 '요요.'


엄마는 최후의 보루로 아껴두었던 요요를 꺼냈다. 담요에 대한 집착이 걱정돼 낮시간엔 절대 주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휴, 공갈젖꼭지 떼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요요를 두고 그 전쟁을 반복할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라이너스가 한 손으로 요요를, 다른 한 손으로 엄마를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가까스로 잦아들었던 울음소리가 다시 하늘을 찌르는 순간, 엄마는 아이를 꼭 안아주고는 그날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See you later, alligator! 이제 라이너스의 곁에는 선생님과 요요가 있다. 라이너스는 손을 잡는다든지 포옹을 한다든지 하는 식의 신체적 접촉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를 달래주려 가까이 다가가면 오히려 울음은 더 서러워졌다. 그래서 선생님은 라이너스와 두어 뼘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내가 여기 가까이 있어, 하는 느낌으로.


그날 이후 라이너스는 매일 아침 요요와 함께 등원했고, 그 덕분인지 유치원 생활도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엄마와 헤어질 때나 바깥 놀이를 위해 자리를 이동할 때면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요요를 만지며 선생님을 따라갔다. 누군가에게 안기는 것을 좋아하진 않아도 선생님이 내민 손은 꼭 쥐었다. 선생님, 라이너스, 요요. 그렇게 셋이 나란히 앉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사건은 느닷없이 일어났다. 낮잠을 자려고 누운 라이너스가 요요를 입에 가져가더니 대뜸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 요요 아니야. 요요 아니야!

- 자, 여기. 이거 라이너스 요요 맞아.


옆에 앉은 선생님이 아이가 던진 요요를 주워 손에 쥐어줬다. 라이너스는 한번 더 요요를 입에 대고는 귀퉁이마다 오물오물 물기 시작했다.


- 요요 없어!


그렇게 아끼는 요요를 손에 들고도 없다고 말하는 라이너스를 선생님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신, 목청 놓고 울기 시작한 아이를 가만히 토닥이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 앉았다. 괜찮아, 괜찮아. 한참을 울다 제풀에 지친 라이너스가 선생님의 무릎을 베고 눕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선생님은 조심스레 아이를 안아 잠자리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날, 라이너스는 처음으로 선생님의 품에 안겼다.


유치원 픽업 시간, 선생님은 엄마를 통해 라이너스의 담요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요요는 담요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담요의 네 귀퉁이 중 하나를 의미했다. 라이너스가 제일 많이 물고 빠는 귀퉁이, 그래서 좀 더 부드럽고 털의 결이 달라진 그 귀퉁이 말이다. 그제야 선생님은 그날의 소동이 왜 일어난 것인지 깨달았다. 라이너스가 점심을 먹다 요요에 흘리는 바람에 선생님이 급하게 세탁한 것이 문제였다. 집에서 쓰는 것과는 다른 유치원 세제가 요요를 만질 때의 느낌과 냄새를 전혀 다르게 만든 것이다. 그날 이후 라이너스와 선생님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점심시간에는 요요를 사물함에 두기. 그 약속을 지키기까지는 몇 번의 울음과 타협이 오가야 했다. 요요는 라이너스 옆자리의 의자에 앉아 점심시간을 보냈다가, 조금 떨어진 창문가에 놓였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사물함으로 자리를 옮겼다. 루틴이 익숙해진 뒤론 아이는 낮잠 시간마다 스스로 사물함에서 요요를 꺼내 들고 잠자리에 누웠다.


잘했어, 라이너스.


선생님이 라이너스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는 익숙한 촉감과 냄새를 즐기며 오물오물 담요의 귀퉁이를 물고 있는가 싶더니 어느새 스르륵 잠이 들었다. 유치원 생활 두 달 남짓. 라이너스가 유치원에서 한 번도 울지 않은 첫날이었다.






Charles Monroe Schulz의 만화 ‘Peanuts’에는 항상 하늘색 담요를 갖고 다니는 라이너스가 등장한다. 담요가 없으면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이는 캐릭터에서 유래된 ‘라이너스의 담요(Linus blanket)’는 흔히 위안을 주는 애착 물건, 혹은 사람을 의미한다.


Linus (출처: peanuts.com)


애착 물건(attachment object)은 보통 봉제 인형이나 작은 이불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다양한 물건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한다. 내가 유치원에서 겪은 실례를 들자면, 자신이 제일 아끼는 가방에 매일 엄마 양말을 한가득 담아오던 아이, 공룡 코스튬의 머리 부분을 늘 챙겨 오던 아이, 불이 켜지는 지압볼을 움켜쥐어야 울음을 그치던 아이, 딸기향 챕스틱을 손에 들고 자던 아이가 있었다. 돌멩이에 강한 애착을 보이던 한 아이는 바깥 놀이를 할 때마다 차곡차곡 모은 돌멩이를 두 주먹 가득 쥐고는 절대 내려놓지 않겠노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하지만 돌멩이는 그 끝이 뾰족할 수도 있고, 아이가 손에 쥔 채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 사고가 될 수도 있기에 여느 애착 물건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뤄야 했다. 나는 고심 끝에 사물함에 작은 병 하나를 마련해 아이가 주은 돌멩이를 수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날 이후 아이는 아침에 엄마와 헤어지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내가 "우리 사물함 돌멩이한테 아침 인사하러 갈까?" 하고 물으면 금세 신이 나서 달려가곤 했다.

 

애착 돌멩이, 혹은 애완돌


그렇다면 이런 애착 물건에 대한 집착은 왜 생기는 것일까? 주변 환경의 변화에 민감한 아이들은 정서적인 불안감을 느낄수록 그 집착이 강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애착 물건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분리 불안(separation anxiety)'이다. 아이들은 7개월부터 11개월 무렵 자신을 돌봐주는 주양육자와 강한 애착 관계를 형성하며, 주양육자와 떨어지기를 거부하거나 낯선 인물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분리 불안은 '대상 영속성(object permanence, 어떤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져도 그 존재는 계속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경우에 따라 생후 4, 5개월 아이들도 분리 불안이 생기지만, 보통 대상 영속성을 잘 인지할 수 있는 9개월 즈음부터 더 강한 분리 불안 증세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막 유치원 생활을 시작한 라이너스를 떠올려보자. 라이너스는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 매일 아침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가 사라져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갓난아기와 달리, 라이너스는 엄마가 자신과 떨어진 다른 장소에 있다는 사실에 큰 불안감을 느낀다. 교실 문 밖이든, 집이든, 회사든 상관없다. 엄마가 어디 있는지가 아니라 지금 당장 나와 같은 공간에 없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라이너스는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보통은 있는 힘을 다해 울거나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엄마를 대신해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담요, 요요가 마지막 한 수가 되겠다.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할 때, 혹은 무언가로부터 무서움을 느낄 때 애착 물건을 통해 불안감을 해소하기도 한다. 처음 유치원에 가는 아이나 병원에 가길 겁내는 아이에게 애착 물건이란 집과 낯선 공간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는 다리와도 같다. 집에서 늘 갖고 노는 코끼리 인형, 엄마 냄새가 나는 손수건, 잠들 때마다 아빠가 이불 안에 넣어주는 곰 인형. 정서적으로 불안한 아이에겐 손에 잡히는 작은 물건 하나가 그리운 집과 가족을 품은 소중한 보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라이너스의 엄마처럼 아이가 애착 물건에 강한 집착을 보일까 걱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보통 주양육자와의 강한 유대감을 나타내는 영유아기의 건강한 발달 과정으로 여겨진다. 또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만 4, 5살 즈음부터 친구들과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쌓으며 자연스럽게 애착 물건에 대한 관심을 줄이게 된다. 


분리 불안은 유치원 생활을 막 시작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첫날부터 웃으며 교실로 들어가는 아이들은 정말이지 흔치 않다. 비록 아이의 애절한 울음에 마음 아플지라도 그 순간이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임을 잊어선 안된다. 애착 물건 외에도 분리 불안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헤어질 때마다 규칙적으로 하는 일을 정한다.

라이너스는 교실 문 앞에서 엄마와 뽀뽀를 하고 세 번의 허그를 한다. 라이너스의 친구 찰리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아빠와 하이 파이브를 할지, 로우 파이브를 할지, 혹은 가볍게 손을 흔들지를 정한다. 루시는 엄마와 헤어지면 창문가에서 엄마가 운전해서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손을 흔든다. 


당신이 언제 돌아올지 알려주고 작별 인사를 분명히 한다.

라이너스의 엄마는 유치원 첫날처럼 교실을 떠날 듯 말 듯 고민하지 않는다. 라이너스의 얼굴을 마주하고 아이가 이해하기 쉽도록 "네가 낮잠 자고 일어나서 오후 간식을 먹으면 엄마가 데리러 올게."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 번의 뽀뽀와 세 번의 허그를 마치면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난다. 아이 몰래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은 되려 불안감을 키울 뿐이다. 또한 라이너스가 헷갈리지 않도록 다시 교실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간단한 규칙을 정하고 아이가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준다.

라이너스의 애착 담요 '요요'가 음식물로 더럽혀진 이후, 선생님은 라이너스와 한 가지 규칙을 정했다. 점심시간 동안 요요는 사물함에 보관할 것. 늘 손에 들고 다니던 요요를 따로 둔다는 것이 쉽지 않은 라이너스를 위해 첫날은 요요를 옆 의자에, 그리고 둘째 날은 조금 떨어진 창문가에 두는 것을 허락했다. 며칠이 지난 뒤부터 라이너스는 요요를 사물함에 보관하기 시작했고, 낮잠 시간이 되면 스스로 요요를 꺼내와 품에 안고 잠이 들었다.


집과 유치원에서 동일한 루틴과 규칙을 유지하도록 한다.

라이너스의 엄마와 선생님은 픽업 시간을 이용해 아이의 일상과 발달에 관해 자주 대화를 나눈다. 아이가 집에서 배변 훈련을 시작했다면 유치원에서도 같은 훈련이 반복되도록 도와주고, 유치원의 점심시간과 낮잠시간을 집에서도 동일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집에서 식사를 할 때면 라이너스는 요요를 사물함 대신 침대 위에 보관한다.






나는 아이들의 세상이 우리가 쉽게 보지 못하는 곱고 가는 선으로 그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중 몇 가닥이 얽히고설켜 문제를 일으켜도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때가 종종 있다고. 옷을 적신 아주 작은 물방울이 거슬려서 혹은 옷을 적실까 올려준 소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도넛을 잘라주어서 혹은 잘라주지 않아서, 원하는 물병이 아니어서 혹은 물병이 왼편 아닌 오른편에 놓여 있어서, 누군가 신발이 예쁘다고 말해주어서 혹은 말해주지 않아서. 아이들 세상 속의 미세한 선들은 사소하지만 분명한 저마다의 이유로 틀어지고 눈물샘을 터뜨리기도 한다. 때문에 아이들 각자의 개성을 배려하는 마음과 세심한 관찰 없이는 그 선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아이의 분리 불안을 이해하고 낯선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도 이와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 아이가 애착 물건이 없어도 잘 지낼 수 있도록, 새로운 선생님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관계와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도록 아이의 세상 속 곱고 가는 선들을 잘 관찰하고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유치원 선생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늘 아이의 주변에 머물러주는 것이다.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곳에, 내가 여기 가까이 있어, 하는 느낌으로.






캐나다 BC주에서 Early Childhood Education과 Child Care Licensing Regulation을 공부했습니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유치원 아이들과 함께 보석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  Cover image by Mylene2401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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