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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Kwon Jan 03. 2022

우리가 사랑한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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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가파른 언덕 위에 있다. 여름엔 두어 번 걸음을 멈춘 채 숨을 골라야 하고 겨울엔 빙판에 미끄러질까 펭귄의 자세로 걸어야 한다. 다음엔 꼭 언덕 없는 동네로 이사 가야지. 몇 번을 다짐하며 하루 체력의 10%쯤을 언덕에 소비하고 나면 눈앞에 익숙한 우리 집과 그 너머의 작은 공원이 보인다. 집에 들어가기 전, 나는 마치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깊은숨을 내뱉고 허리도 한 번 곧게 펴준다. 극적인 감정을 더하기 위해 피곤함이 실린 눈을 슬쩍 감았다 뜨는 것도 잊지 않는다. 청량한 바람과 탁 트인 시야. 역시 언덕 위에 사는 맛이 난다니까. 방금 전까지 온갖 짜증을 부리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나는 해탈한 스님의 마음이 된다. 아니,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산악인의 마음인가.




집 앞 공원은 시청을 끼고 있는 작은 일본식 정원과 테니스 클럽하우스가 놓인 풀밭으로 나뉜다. 그 사이엔 연필깎이의 구멍처럼 홈을 내고 아스팔트를 깔아 만든 작은 주차장이 있는데, 이는 계절에 따라 파머스 마켓, 크래프트 마켓, 혹은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탈바꿈되기도 한다. 사실 그다지 크지도 않고 동네 주민이 아니고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공원이라고 말하는 게 가장 쉬운 설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공원의 구석구석을 밟아본 적이 있는 이라면 느낄 것이다. 아, 이 공원. 정말 사랑스럽구나, 하고.


공원의 매력을 발견한 것은 이사온지 몇 년이나 지나서였다. 집순이의 막중한 임무를 소화하기에 바빴던 나는 두어 번 파머스 마켓을 방문한 것이 고작이었다.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집에서 즐기는 창 밖 풍경이지. 이랬던 내가 공원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된 건 일 년 전 입양한 강아지 소다 덕분이었다. 실내 배변 훈련을 완벽하게 마쳤다던 입양 기관의 말과는 달리, 소다는 우리와 가족이 된 첫날부터 오직 실외 배변만 하기로 마음을 다진 듯했다. 아침 7시, 오후 4시, 밤 12시. 최소 하루 세 번씩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밖을 나가야 하는 현실에 닥치니 창 밖으로만 구경하던 공원의 존재가 더없이 감사하게 여겨졌다. 밤 12시 산책은 위험하고도 귀찮으니 신랑에게 맡기고 나는 아침과 오후, 그리고 예정에 없는 급똥 산책의 임무를 맡기로 했다. 세상에, 이 작은 생명체가 한평생 집순이의 생활을 송두리째 뒤흔들 줄이야.


소다는 세상의 온갖 냄새를 수집한다. 여느 개들이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붉은여우를 닮은 세모진 얼굴이 파묻힐 만치 고개를 땅에 박고 걷는다. 분명 구글 맵은 십분 거리라는데 우리의 산책에는 한 시간이 소요된다. 인내심이 부족한 내가 목줄을 살짝 당기면 소다는 마지못해 따라오다 나무나 전봇대에 부딪히기 일쑤다. 그러니까 고개를 좀 들으라고. 아무리 외쳐도 소다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 공원에서 얼마나 많은 냄새가 나는 줄 알아? 저기 개들이 남겨놓은 소변 자국 안 보여? 나 여기 다녀감! 하고 남겼잖아. 그럼 나도 답장을 남겨야지. 나도 여기 다녀감! 하고. 이렇게 응답하듯 소다는 보란 듯이 다른 개가 남긴 흔적에 자신의 흔적을 더할 뿐이다. 덕분에 나는 공원 사이에 난 길이란 길은 빠짐없이 밟아본다. 길이 나지 않은 덤불 사이도 온몸을 웅크린 채 들어가 본다. 아, 이건 너무 하잖아. 여긴 사람이 다닐 길이 못된다고. 가끔은 짜증을 내며 반대 방향으로 목줄을 당겨보지만, 내게 돌아오는 건 소다가 파헤친 잔 나뭇조각들과 거름진 흙더미뿐이다. 별다른 방도가 없는 나는 한눈에 봐도 영양분이 풍성한 흙으로 눈길을 돌린다. 이야, 나무들이 잘 자라는 이유가 있구만. 소다가 마지막 오줌 한 방울을 짜내는 동안 나는 '개 버릇 남 주나'라는 말을 믿기로 한다. 그래, 너는 냄새를 수집하고 땅을 파며, 온갖 덤불을 뒹굴어라. 나는 나대로 자연 속 느림의 미학을 즐겨보련다.





아침 7시. 한적해 보이는 공원에는 생각보다 많은 생명들이 깨어 있다.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를 걷다 보면 개중 익숙한 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유모차를 타고 산책하는 할아버지 개 거스, 파킨슨 병을 앓고 있어 끊임없이 머리를 떠는 할머니 개 올리비아, 소다와 비슷한 체격의 강아지 빌리는 만날 때마다 서로의 냄새를 맡고 차분히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이다. 늘 마주치는 콜리와 웰시코기도 있지만, 소다가 하도 짖어대는 통에 죄인이 된 나는 주인들과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뒤로 물러나기 바쁘다. 좀 잘하란 말이야. 이웃들 보기 민망하지도 않아? 소다에게 야속한 눈길을 건네보지만 물론 알아들을 린 없다. 언제 그랬냐는 듯 모양새 좋은 나뭇가지 하나 골라 입에 물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걸 보면 아무 생각 없음이 분명하다. 별 수 없는 나는 마음을 비우고 멀리 시선을 돌려본다. 저쪽엔 공놀이를 하는 활기찬 개가 있고, 반대쪽엔 아기를 안은 아빠와 보폭을 맞춰 걷는 점잖은 개가 있다. 저 멀리선 조깅하는 여자와 한 팀이 되어 뛰어오는 날렵한 개가 보인다. 정말이지 개들의 천국이 따로 없다. 그리고 돌아보니 소다는 어느새 고개를 파묻고 흙냄새에 열중이다. 흠. 역시 너를 홀리는 이 공원의 매력은 거름진 땅이란 말인가.


거름을 논하자면 공원에 자리한 다양한 식물들과 수려한 조경을 빼놓을  없다. 일본식 정원에는 이름 모를 식물들이 여기저기 심어져 있는데,  하찮은 크기와 화려하지 않은 모양새가 볼수록 마음에 든다. 냄새 수집 중인 소다에 이끌려 정원의 구석구석을 돌다 보면 어느새 잎줄기의 모양새와 색의 농도를 관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도 흔한 일이 되었다. ,  하찮은 것들  . 내가 할머니처럼 쭈그리고 앉아 혼잣말을 하면 소다는 이파리 하나하나에 얼굴을 파묻고 심각한 표정으로 코를 벌렁거린다. 덕분에 나는 공원의 풍경을 서서 즐기고, 앉아서 즐기고, 바닥 가까이 웅크린  즐기기도 한다. 그렇게  수도 없이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풍경은 어느  하나 버릴  없이 예쁘고 소중하다. 아무렇게나 심은 듯한 사소한 식물들이 이렇게 조화를 이룰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선인장도 버티지 못하는 우리 집과 달리 사계절 싱싱하게 살아  쉬는 것도 신기하고. 그래, 역시 거름진 땅이 포인트인가 보다.

 


오후 4시. 날씨가 좋은 여름과 가을 사이의 공원은 그 활기참이 절정에 이른다. 파머스 마켓을 중심으로 풀밭 여기저기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연인들, 어딜 가는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뛰고 보는 아이들, 벤치에 앉아 책 읽기에 열중인 사람들. 그리고 나무 사이에 설치한 해먹 안에서 낮잠을 자는 신랑이 보인다. 큰 덩치를 감싼 노란 해먹이 마치 바나나 같다. 그 옆에 자세 잡고 앉아 책을 읽는데 자꾸 소다가 얼굴을 들이민다. 아무래도 삼십 분째 같은 페이지인 것을 들킨 것 같다. 그래, 가자. 나는 하릴없이 잠자는 숲 속의 바나나를 두고 소다와 한 번 더 산책에 나서기로 한다.


이맘때의 공원엔 냄새 말고도 소다가 환장할 것이 무궁무진하다. 그중 가장 큰 매력을 풍기는 것은 다람쥐다. 파머스 마켓이 열리는 날이면 도토리 말고도 먹거리가 많다는 걸 아는지 유독 많은 다람쥐들이 눈에 띈다. 달리 겁이 없는 녀석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는 법이 없고, 본 거주지인 나무에서 한참 벗어나 식량을 찾기도 한다. 엇, 방금 뭔가 있었는데. 낌새를 챈 소다가 앞발 하나를 들고 주변을 샅샅이 살핀다. 삐. 삐. 삐. 찾았다! 다람쥐 한 녀석이 소다의 레이더에 걸린 순간, 우리는 단거리 선수처럼 미친 질주를 시작한다. 소... 허억, 소... 허억, 소다야! 가쁜 숨으로 소다에 끌려 뛰어가지만 승자는 언제나 다람쥐다. 바람처럼 빠르고 깃털처럼 날렵한 녀석은 이미 나무 꼭대기에 올라 있다. 내가 몇 번을 얘기하니. 넌 절대 다람쥐 못 잡는다니까. 아무리 말해줘도 분한 마음을 가실 길 없는 소다는 나무 주변을 빙빙 도며 엄한 하늘만 쳐다볼 뿐이다. 착하게 살아라. 쟤네 괴롭히지 말고, 좀... 파머스 마켓의 먹거리를 노리는 것은 비단 다람쥐뿐이 아니다. 까마귀와 이름 모를 새들도 사람들이 흘리고 간 음식 부스러기를 찾아 모여든다. 그렇잖아도 온갖 생명들이 넘치는 공원이 유독 부쩍이는 건 그 때문이다. 소다는 어느새 다람쥐의 존재를 잊고 새들의 무리에 끼고 싶어 호들갑을 떤다. 놀아줘, 나랑 놀아줘! 소다가 신나서 달려가면 새들은 홍해가 갈라지듯 길을 터주곤 저 멀리 날아가버린다. 내가 혀를 끌며 쳐다보면 무안해진 소다는 흙냄새를 맡는 척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친구는 그렇게 사귀는 게 아니라고, 인마.





한 시간쯤 뒤, 숲 속의 잠자는 바나나가 눈을 떴다. 우리는 정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가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풀숲 사이로 뱀처럼 굽이쳐 흐르던 물은 둥글게 패인 연못으로 모여들었고, 그 끝자락에는 다자녀 오리 가족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도 몽롱한 지 잠자코 앉아있던 바나나가 오랜만에 입을 떼었다. 여기 기부 벤치에 쓰인 글 보여?


6번가의 집과 공원을 사랑한 수잔. 당신을 기억하며.


수잔은 좋겠다. 이렇게 벤치에서 오래오래 공원과 그 너머의 집을 바라볼 수 있어서.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때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고 내 무릎에 고개를 기댄 소다가 킁, 하고 깊은숨을 쉬었다. 이제 집에 가자, 하고 말하는 듯했다.


우리 셋은 나란히 언덕 위 우리 집을 향했다. 뒤늦은 산책을 나온 개들과 이웃들, 도토리를 찾아 풀밭에 나선 다람쥐, 먹이를 찾아다니는 새들과 땅 아래로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물들. 한 때 이곳에 있었고 지금은 누군가의 추억이 돼버린 사람들. 기부 벤치들에 새겨진 그들의 이름 아래로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우리가 사랑한 공원.

소다야, 내일 다시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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