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학번 선배의 얼굴을 뉴스에서 처음 만났다. 젊음의 생기와 설렘이 담긴 낯빛이 어디선가 꼭 마주쳤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20대에 목숨을 끊었다. 4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은 그녀의 죽음을 쉬쉬했다. 모종의 이유가 있었겠으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직장은 그녀를 고장 난 부품처럼 대했다. 그녀의 빈자리는 다른 인력으로 채워졌고, 관리자는 왜 그녀가 사라졌는지 밝히지 않았다. 의문을 가진 몇몇 사람들에게는 개인 사정으로 포장했다. 사적 영역이 중요해진 시대에, ‘개인 사정’이란 답변은 모든 의문점을 차단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머물렀던 공간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이고, 세상의 온갖 바른 말소리들이 맴맴 돌았을 것이다. 그녀는 한 초등학교의 담임교사였다.
‘예절을 지키자’‘서로 존중하자’‘고운 말을 쓰자’
내가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내가 교직에 매력을 느낀 이유 중 하나는 복잡한 세상에 너무나 단순해서 이상이 되어버린 진리들을 마음껏 설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교육인적자원부 세대이다. 인적자원으로 길러진 삶이 퍽 불행했다. 내가 학생으로서 경험한 학교는 폭력과 경쟁으로 점철된 공간이었다. 머리를 묶었는데 옆머리가 흘러나왔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뺨을 맞고, 영하의 날씨에 패딩을 입었더니 코트를 입어야 하는 학칙을 위배했기 때문에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돌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며 교육인적자원부는 교육과학기술부로 바뀌었다. 학교의 분위기도 많이 개선됐다. 체벌은 점점 사라졌고,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방안들이 마련됐다. 나는 학교가 인본주의적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쩌면 학교가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각자도생이 지혜가 되어버린 냉혹한 현실과 달리 교실에서는 약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었고, 자본의 계급에 따라 생겨난 보이지 않는 벽을 교실 안에서만큼은 허물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작금의 학교는 철저히 정치적인 공간이자 자본에 물든 공간이다. 세 가지 현상을 통해 알 수 있다.
첫째, ‘일부’ 학부모들은 교사를 그들의 세금으로 고용된 교육 서비스 제공자로 인식한다. ‘고객은 왕’이라는 서비스 정신이 공교육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고객인 학생이 기분이 나빴거나,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받지 못하면(가령, 주인공이 되고 싶은데 되지 못했다거나 재미없는 수업을 듣게 한다거나) 고용주인 학부모는 서비스 제공자인 교사에게 불만을 제기할 수 있고, 즉시 시정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 표준 교육과정과 교사 개개인의 교육관 및 전문성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그들은 교사를 전문가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서비스 제공자가 권위를 갖는 것에 반발한다. 학창 시절 겪었던 교사에 대한 불신도 한몫한다. 돈으로 가치를 환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상 교육에 해당하는 공교육은 이미 그 자체로 권위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선생님 개인 번호를 왜 공개하지 않느냐며 민원을 넣고, 밤 9시가 넘는 시각에도 거리낌 없이 연락한다. 활동 중 학생이 약간 다치기라도 하면 교사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학부모도 부지기수이다. 어떤 선생님은 치료비 배상을 요구받았다며, 폭언만 하신 것에 감사하라는 자조 섞인 위로를 받기도 한다. 쿠션어를 쓰지 않고, 금쪽같은 우리 애를 혼내고, 친구들끼리 싸움에서 우리 애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선생님이 싫다. 급기야 담임 교체를 요구하는데, 고용주의 입장에선 말 안 듣는 피고용인을 얼마든지 해고할 수 있는 것이다. 몇몇 관리자들의 성직자적 교육관과 일부 학부모들의 특급 서비스 요구가 맞닥뜨리면 교사의 인격은 공공재가 되고 만다. 교사의 인격이 모욕과 갑질로 깎여 갈 때도 그들은 교사가 그거 하나 못 견디냐, 교사로서 자질이 없다는 말로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 돌린다. 결국 교사의 인격은 비교적 싼 값에 경제적으로 소비된다. ‘교사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는 비경제적인 논리가 기반에 깔려있는 점이 모순이다.
둘째, 직선제를 통한 교육감 선출과 교육 전문가가 아닌 교육부 장관의 등용이다. 교육감은 정당을 드러내지 않지만, 색깔과 표어로 그들과 가까운 정당을 암시한다. 몇몇 국민들은 그들의 공약을 읽어보기도 전에 색깔로 누구를 뽑을지 결정하기도 한다. 교육감들은 선출되기 위해 각종 듣기 좋은 공약들을 남발한다. 이러한 공약들은 교육 주체의 의견을 고루 수집하고, 실현 가능성을 검증하는 과정이 빠져 있다. 대부분의 교육감 후보들은 교사 출신이 아니기에 공약의 현장성과 핍진성이 떨어진다. 또한 현재 교육부의 수장인 이주호 장관은 경제학 박사 출신이다. 교육을 경제 논리로 접근하리란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새로운 장관이 임명되고, 교육감이 선출될 때마다 교사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절대로 교사의 편이 아니다. 그들은 유권자들의 표심에 의해 움직인다. 지금껏 말도 안 되는 민원들에 교사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쓰러져 간 것은 교육부와 교육청이 방패막이되어주기는커녕, 학부모들의 눈을 의식하느라 교사들을 징계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 교육청에서는 교사 임용 면접에 교육 전문가가 아닌 학부모가 참관해왔다고 한다. 이는 교육 전문성을 심하게 훼손하고 교사 집단을 기만하는 행위이지만 교육청은 밀고 나간다. 그들에게는 교육 전문성보다 학부모들의 지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공약과 관련된 각종 이권 사업들이 학교에 개입된다. 사업 계획 추진과 강사 채용 및 강사비 지급 등의 업무는 대부분 교사 한 명의 몫이다. 업무 경감을 표방하면서도 날이 갈수록 각종 (보여주기식) 사업 추진으로 교사 일 인당 업무량은 오히려 크게 늘어났고 국민 혈세가 어마어마하게 낭비되었다. 올해 2800억을 들인 4세대 지능형 나이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2800억 원이라는 예산 규모가 무색하게 디자인만 바뀌었을 뿐 실질적인 변화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몇몇 기능들은 퇴화했다. 교육부는 4세대 나이스 도입 전후로 담당 교사들에게 끊임없는 업무와 연수를 부과했다. 정작 학교 현장에서 실제로 쓰일 수 있고, 필요한 기능들은 탑재되지 않아서 무엇을 위한 개편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셋째, 학교의 자체적 갈등 및 문제 해결 기능이 마비됐다. 교사로서 바라본 학부모의 전반적인 추세는 우리 아이에게 작은 상처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의 작은 싸움에도 어른들이 쉽게 참전한다. 학부모가 교사에게 전화를 해서 한 아이를 헐뜯기도 한다. 같은 반 친구가 여우라 우리 아이가 힘들다는 민원을 학부모에게서 직접 받고 할 말을 잃은 적도 있다. 고작 10살인 아이들이었다. 학부모들은 교실이 아이들로 구성된 독립적인 소규모 사회라는 점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른의 시각과 논리로 교실 안의 현상들을 쉽게 재단하고 평가한다. 아이들이 품고 있는 관계의 재생력이 발휘되기도 전에 학부모 간에 고소, 고발이 입에 오르내린다. 때로는 고소의 칼끝이 교사를 향하기도 한다. 학생 간 갈등을 중재하거나, 학생의 폭력 행위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생긴 마찰들을 정서적 아동 학대 혐의를 포괄적으로 적용해 그 즉시 교단에서 삭제시켜 버린다. 고소의 주체자가 학부모가 아닌 교장이 될 때도 있다. 그 혹은 그녀는 학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져볼 정성도 없이 ‘아동학대 신고 의무’를 들이밀며 간단하게 처리해 버린다. 본인은 의무를 다했기 때문에 어떠한 피해도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단단히 내세운다. 허울뿐인 교칙들은 사회의 매서운 법과 입김에 따라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숨겨진다. 학교폭력 담당 전문 변호사와 아동학대 전문 변호사들이 늘어나는 것은 학교의 갈등 해결 시스템이 외주화 되고 자본화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사법 시스템을 사적 복수의 용도로 이용하기도 한다. 명백한 학교폭력 가해자의 부모가 교사를 아동 학대 혐의로 고소하는 것이 대표적 예이다. 교원과 교원과의 사이에서도 신규 교사나 전입 교사에게 기피 학년과 업무를 떠넘기는 역사는 유구하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 나 역시도 내게 업무와 학년 우선 선택권이 있다면 기피 학년과 업무는 피할 것이다. 교원 개개인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은 현재 학교에 없다. 관리자는 교원 간의 갈등이나 문제를 해결할 적극적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매년 운에 맡겨야 한다. 운이 그나마 좋았던 교사들은 운 나쁘게 떠내려간 교사들을 바라보며 내년도 운이 나쁘지 않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학교 공동체 사이에 신뢰는 무너져 내린 지 오래다.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손 내밀어줄 동료가 우리 학교에 존재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오늘 함께 웃으며 연락했던 학부모가 언제 내게 고소장을 들이밀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학생들의 귀여운 투정 한 마디에도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아 학생들과 거리를 두려 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친구들을 믿어주자고 이야기하고, 서로 사랑하자고 말한다.
부끄럽다. 나는 대한민국 교육의 교사고, 거대한 시스템의 작은 부품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동안 내가 목격한 교실 붕괴와 교권 추락의 현실을 내 개인 공간에 적고, ‘그래도 교사는 방학이 있잖아요’라는 예상 댓글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는 것뿐이다. 나는 작은 교실의 미세한 부품이다. 오늘도 끼익, 끼익 갈라지는 목소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혼을 내다가, 기분을 상하게 하진 않았을까 걱정하며 내가 있는 자리에 박혀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