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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온 Nov 28. 2023

결핍

결핍과 충분의 인과관계

40대의 나는 결핍투성이었다. 직장에서는 실적과 성과에 몰입해 주변 하나 돌아볼 줄 몰랐다. 그저 나를 해롭게 하지 않을까 날을 곤두세우고 조금이라도 내 생각과 어긋난 견해를 보이면 수긍하지 못하고 왜 그 방법이 틀렸는지 단점을 찾아내려고 기를 썼다. 정말 꼴 보기 싫은 완벽을 추구하는 자기중심적 인간이었다.



반면 종교생활에서 나는 달랐다. 어느 파트에 인원이 부족하다고 하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빈자리를 어느새 내가 들어가 메꾸고 있었다. 신앙생활에서 나의 자아는 매우 이타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참 이중적인 인간이기도 했다. 일에서는 완벽을 핑계로 타인에게 상처 주고 그 가운데 생겨난 얼룩진 빈틈을 봉사라는 실리콘으로 막아가며 내가 좀 더 정제된 인간이기를 바랐나 보다. 50대의 내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40대의 나는 이제야 몹시 측은한 마음이 든다.



그때의 나는 대체 어떤 결핍에 시달려 이토록 앞뒤 구분 없이 스스로를 질책하고 홀대했을까?​​





오늘 우연히 '응답하라. 1988'을  다시 보기 하다  덕선이에게서 공감을 얻었다. 덕선이는 둘째라 뭐든 양보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쉽게 가지지 못했다. 치킨을 먹을 때 다리는 늘 다른 가족의 몫이었고 공부 잘하는 언니와 이틀 차이의 생일파티는 언니 생일에  겹쳐서 한다. 덕선이는 다 이해하며 참다가 결국 밖으로 뿜어내는 스타일이라 존재감을 드러낸다.



둘째로 자란 나는 이 장면에 빙의될 정도로 공감이 되었다. 중간에 낀 둘째 딸은 절대  센터가 될 수 없다는 진리!  치킨을 시키면 한 번도 닭다리는 내 몫이 될 수 없었다. 4남매 중 둘째가 치킨 한 마리를 시켰을 때 다리를 먹을 확률은 몇 퍼센트일까? 그때의 나는 '다리는 맛없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나 보다. 나는 아직도 치킨을 시키면 다리를 먹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다리는 맛이 없다는 고착화된 생각 때문 아닐까?




50대의 나에게 '결핍'의 자리를 채우는 '충분'은 만족감을 주는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단 유통기간이 짧은 단점이 있다. 금세 또 다른 결핍이 찾아와 그 자리를 메꾼다. 반복되는 감정의 순환 속에서 결핍이라는 모자란 감정을 쫓아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둘째 콤플렉스로 가라앉아버린 내 안의 인정욕구가 나이 들면서 엉뚱하게 스멀스멀 솟아올라 나를 드러내고 싶었나 보다.



갱년기가 시작되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  감정에 휘둘리는 내 모습이 싫어 읽기 시작한 책은 의외로 고독의 결핍과 인내, 사유의 결핍들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채워진 자리에는 차곡차곡 끈기와 긍정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 싹들은 감사라는 꽃을 계절을 가리지 않고 피우고 있다.





산책길에 올려다보는 파란 하늘도 감사하고 10년째 내 곁을 지키는 나와 동년배의 고양이 아로가 건강한 것도 감사하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건강함에 감사하고 잘 자고 일어난 소중한 아침이 감사하다. 생각해 보니 결핍이라는 단어는 결코 나쁘지 않다. 결핍은 충분을 갈구하며 한 개인을 노력하게 만든다. 그 노력은 새로운 경험으로 자리 잡고 개인을 성장시킨다. 결핍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의미를 다시 바라보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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