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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의 중경삼림

스쳐가는 혹은 진정한 인연에 대하여

by 미미
경찰663(양조위)의 그윽한 눈빛과 웨이트리스 페이,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중경삼림은 인연에 대한 그리고 사랑에 대한 옴니버스 형태의 영화이다. 중경삼림에는 주옥같은 대사들이 많지만, 이 글은 인연에 초점을 맞춰보았다.


이 영화는 1부 경찰 223의 러브스토리와 2부 경찰 663의 러브스토리로 크게 두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하는 1부 경찰 223(금성무)이 등장하는 초반부 장면 중 인연에 관한 대목이다.


우리는 0.01미리가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그리고 57시간 후 난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서로가 매일 어깨를 스치며 살아가지만 서로를 알지도 못하고 지나친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간략한 줄거리

1부: 경찰 223과 노랑 가발 머리의 여자

경찰 223은 만우절 헤어진 연인을 마음속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한 달을 외로이, 연인을 생각하며 보낸다. 외로워서 이곳저곳 전화도 해보고, 4.30일 날 간 바에 처음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기로 정한다. 그때 등장한 노랑 가발 머리의 여자(임청하).

당시는 몰랐지만, 이 여자와는 옷깃이 스친 적이 있다. 마약 밀매상인 이 여자가 활동하는 무대와 경찰 223이 업무상 뛰어다닌 공간이 겹치는 바람에 실제 옷깃 스친 사이이다.

물론 바에서 만나,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로 한 경찰 223 혹은 노랑 가발 머리 여자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경찰 223은 그 여자를 알아가기 위해 여러 질문을 하고 대화를 시도한다. 둘 다 만취하자, 결국 술 취한 그녀를 데리고 호텔로 간다. 여자는 침대에 쓰러져 자고, 경찰 223은 밤새 샐러드를 시켜먹으며 시간을 때워본다. 그리고 그녀의 구두를 깨끗이 닦아놓는다. 이후 아침근무를 하기 위해 사라진다. 그들의 인연은 딱 여기까지이다.


2부: 경찰 663과 페이

2부는 경찰 663의 러브스토리이다. 실연당한 경찰 663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매번 점심을 사러 온다. 그 곳의 일을 돕고 있는 페이(왕페이)는 그를 짝사랑한다. 경찰663은 이번에는 비행기를 타고 마주친 스튜어디스를 꼬셔보기로 마음을 먹고 그와 연인이 된다. 그리고 또 차인다. 그는 페이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페이는 그런 그의 집열쇠를 손에 넣게되고, 그의 집을 그의 근무 시간 중 수시로 방문해 바꿔놓는다. 결국 그 집을 또 방문하려다 걸린 페이는 경찰663과 그 집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게 되고, 노곤해져 잠에 빠져든다. 그녀의 짝사랑을 알게 된 경찰 663은 그녀의 일터로 찾아와 드디어 데이트 신청을 하지만, 둘이 만나기로 한 장소에 페이는 나타나지 않고 일년 후를 기약하는 편지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고 일년 후 스튜어디스가 된 페이는 다시 미드나잇 익스프레스가 있던 그 장소를 찾고, 그 곳을 인수한 경찰 663을 마주한다.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이제 시작이다.


나의 소감

1. 1부: 인연에 대하여

우리는 살아가며 수 많은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어떠한 인연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고 어떠한 인연은 진정한 인연이 되기도 한다.


법정스님은 우리에게 ‘함부로 인연을 맺지마라’는 명언을 남기셨다.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구분해서 인연을 맺어야 하며, 진정한 인연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고 스쳐가는 인연이라면 무심코 지나쳐 버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헤프게 인연을 맺어 놓으면 쓸만한 인연을 만나지 못하는 대신에 어설픈 인연만 만나게 되어 그들에 의해 삶이 침해되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1부에서의 인연은 사실 스쳐가는 인연이다. 그들의 인연은 같은 시공간에 있었던 그 인연일 뿐, 더 이상 붙들어야 되는 인연이 아니다. 흘려보내야하는 인연인 것이다.

실제로 저렇게 스쳐가는 인연인데 붙잡아서 얼마나 많은 고통이 남녀 사이에서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가?

만취해 쓰러진 노랑머리 가발의 그녀로 인해 그들은 호텔방에서도 아무 일(?) 없이 인연이 끝났지만, 그 인연을 붙잡았던들 경찰과 마약밀매상의 인연은 끝이 좋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지난 날을 되돌이켜보면, 나의 인연이 아닌데 스쳐지나가는 데 붙잡았던 인연이 여럿이었다. 그리고 그런 관계에서는 매번 고통받았다. 지나쳐가는 인연을 붙들고, 인연이 되기를 바라는 나의 욕심으로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내 인연이 아닌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받게 되는 고통. 어리석음의 댓가. 그렇다면 고통의 원인은 상대가 만든 것인가 내가 만든 것인가?


2. 2부

2-1. 2부 스쳐가는 인연에 대하여: 경찰663과 스튜어디스

2부에서의 경찰663의 여러 인연들이 등장한다. 그 중 하나는 그가 사랑에 빠진 스튜어디스. 스튜어디스와의 인연 또한 그가 상공에서 그녀를 유혹하기로 결정하고 그 유혹이 성공해서 만들어진 인연이다. 그리고 연인관계가 되지만, 그녀는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이내 그를 차버린다.

헤어진 이후 우연히 만난 편의점에서도 그녀는 이미 새로운 남자친구가 있다. 그녀는 애초부터 경찰663의 인연이 아니었다. 경찰663은 스쳐가는 인연을 붙잡은 데서, 흘려보내야하는 인연에게 진심을 다함으로서 고통을 얻었다.


2-2. 2부 진정한 인연에 대하여: 경찰663과 페이

반면 경찰 663은 페이와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웨이트리스와 손님으로서 (짧은) 인연이 계속 닿았다. 물론 경찰663이 근무 구역이 바뀌어 점심식사를 하는 곳이 달라졌을 때 페이는 그 (짧은)인연을 연장하려든다. 우연히 그가 식사하는 곳을 지나치며 인사한다던지, 우연히 손에 넣게 된 그의 집 열쇠로 그의 집에 무단침입하여 그의 공간에 머문다라던지, 억지로라도 그 인연을 연장해보려한다.


진정한 인연을 만들기 위한 페이의 결정

실제 그녀의 짝사랑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드디어 데이트 신청을 통해 그 응답을 받았을때, 그녀는 그 인연이 스쳐지나가는 인연인지 진정한 인연인지 시험해본다.

바로 그 때 덥석 그 인연을 물지 않는 지혜로운 여인 페이.

그녀는 그 인연에 몰두하기 보다 의외로 짝사랑해온 상대에게 쏟았던 시선을 거두어 일년간 캘리포니아로 떠나 자신을 찾고 돌아오기로 결정한다.

그녀는 자신을 찾았고(스튜어디스가 되어 돌아오고), 경찰 663이 자신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그와 이제는 진정한 인연이 될 수 있음을 감지하며, 그들의 인연을 이어나가기로 한다.


끝맺음

중경삼림에 등장한 인연들을 보며, 우리가 우리의 인연이 아닌 것에 매달릴 때 얼마나 고통이 많이 발생하는지와 진정한 인연을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찾을 때 얼마나 더 행복에 더 다가갈 수 있는지를 보았다.


법정스님 말씀대로 우리는 ‘인연을 맺음에 너무 헤퍼서는 안된다.’ 바로 그 연유로 피할 수 있는 고통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를 인연이라는 키워드로 읽은 까닭은 이 글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경찰663과 페이의 인연처럼, 진정한 인연을 발견하려면 그 인연의 고리를 덥석 물기보다는 진정한 인연이라고 달려들기 전에 먼저 자신을 찾고, 상호적으로 진정한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관계인지를 확인해보는 과정을 거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내 인연이 아니어서 발생한 많은 불필요한 고통을 피할 수 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스쳐가는 인연을 붙들어서 피할 수 있는 고통을 어리석게 감내했는가? 이것은 누가 나에게 행한 고통도 아닌 그저 어리석음이다.

진심이 아닌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해서 받은 고통.

내게 오는 인연을 지켜보고, 묵혀두고, 시험해보며 진정한 관계라는 확신이 들 때에 진정한 인연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런 신중함이 나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비록 한 세기를 대표하는 감독의 러브스토리지만, 사랑이라는 주제 외에도 인연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등 생각해볼거리가 곳곳에 숨어있다.


흥얼거리게되는 ‘몽중인’과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중경삼림 하면 떠오르는 두 대표곡이다.

또한, 금성무의 앳되고 순수한 얼굴과 양조위의 우수에 찬 그리고 진심어린 눈빛 연기가 이 영화를 완성한다. 왕가위 감독과 양조위 배우의 찐 팬이 될 예정이다.


법정스님의 주옥같은 말로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옷깃을 한번 스친 사람들까지 인연을 맺으려 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살아가는 우리지만 인간적인 필요에서 접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위에서 몇몇 사람에 불과하고 그들만이라도 진실한 인연을 맺어놓으면 좋은 삶을 마련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하여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좋은 일로 결실을 맺는다.

아무에게나 진실을 투자하는건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쥔 화투패를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인연을 맺음으로서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피해도 많이 당하는데 대부분의 피해는 진실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 부은 대가로 받는 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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