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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기가영 Apr 21. 2020

우리 주변의 비체 - 미소는 곁에 있었다

미소를 찾아서 2

비체 [abject / 非體] ‘주체(subject)’ 아니고 (인식의) ‘대상(object)’ 아닌 존재이다. 그래서 사고와 행위의 주인공인 주체는 인식할  없는 존재,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인 비체를 마주할  공포를 느끼게 된다. 비체는 주체-객체의 위계적 관계를 전복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본질적이라기보다는 관점적인 것으로, 인문사회학에서는 사회적 조건의 역학 관계 속에서 행위의 주체성을 가질 수 있는 위치성을 지닌 사람들을 ‘근대적 주체’로 개념화하기도 하였다. 근대적 주체는 우리가 보편적 인간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에 부합한다. 대부분은 ‘인간’이라고 했을 때 백인,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여기서 더 세분화하면 키도 꽤 크고 얼굴도 호감형인 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근대적 주체의 이미지는 현실에 개체로서 완벽하게 구현될 수도 없고, 그나마 비슷한 부류라고 칭할 만한 사람들도 인구학적으로 보았을 때 극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는 세상은 대체로 근대적 주체의 눈으로 그려진다.


결국, 주체 개념이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속성 때문에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다다를 수 없는 근대적 주체의 이미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점에서 주체성은 늘 취약하다. 그래서 주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주체와 객체의 구분에 포획되지 않음으로써 주체로 하여금 스스로의 가려진 부분을 마주하게 하는 비체를 만났을 때, 주체는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던 주체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비체를 공포스럽고 더러운 것으로 치부하여 자신을 보존하려 한다.


다시 영화 소공녀로 돌아가면, 미소의 사랑은 자본주의적 사고와 생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없기에 친구들에게 종종 오해를 낳는다. 친구들의 사고의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없는 미소의 행위는 쉽사리 ‘뻔뻔한 행동’, ‘(성적인 목적의) 호의적인 행동’, ‘눈치 없는 행동’ 등으로 여겨지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뻔뻔하고, 치근덕대고, 눈치 없다는 형용사는 그 친구들 자신을 설명하기에 완벽한 단어들인 것 같다. 그들은 미소의 조건 없는 투명한 마음을 통해 견고해 보이는 사회적 인격 너머에 있는 스스로의 진짜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비체라는 단어는 혐오라는 감정과 관련이 깊다. 혐오는 일차적으로는 이유 없이 싫어하는 감정을 뜻하고, 이차적으로는 그러한 감정을 표하는 행위를 뜻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때로는 내가 몰두한 일에 바빠 관심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유 없이 혐오하기도 한다. 한 생명을 책임지고 돌보는 어머니가 맘충으로 불리거나, 주류 정권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빨갱이로 불리는 모습을 보았다. 국경선으로 구분할 수 없는 인간 삶의 존재를 삶으로서 증명하는 난민들, 그리고 국가 보호의 부재를 스스로의 돌봄 노동으로 메꾸고 있는 비영리 단체 활동가들. 사이버 성범죄에 맞서 싸우는 개인/조직 단위 활동가들, 재난 상황 속에서 목소리를 내고 밤낮으로 일하는 의료진들.. 만약 이들의 존재가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면, 스스로의 위치에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지 모른다.


여러 측면에서 전환을 겪고 있는 동시대 포스트-사회에서, 이제는 주체성의 관계적 성격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서로의 비슷한 모습에 공감하고, 공감한다면 곧바로 행동에 옮겨 보자. 사실 늘 곁에 있던 미소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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