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소프트의 차세대 컴퓨팅 생태계 전략을 오픈하다
마이크로소프트가 MWC에서 프레스 행사를 개최한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2015년 윈도 모바일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발표한 이후 마이크로소프트는 더 이상 바르셀로나로 미디어를 불러 모으지 않았다. 노키아라는 또 다른 채널을 활용할 뿐, 직접 나서는 일이 없던 것이다.
때문에 5년 만에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프레스 이벤트에 대한 소식은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웠다. 모바일에 대한 전략을 대폭 수정한 이후 바르셀로나에서 줄어든 존재감을 어떤 방법으로 되찾을 지 궁금했으니까. 그런데 이 행사가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마이크로소프트가 혼합 현실 장치인 홀로렌즈의 후속 모델을 공개한다는 소식이 흘러 나온 이후다. 물론 그것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 사실을 아는 모든 관계자들이 모르쇠로 버텨야만 했을 뿐. 결국 프레스 행사가 끝난 직후에야 부를 수 없던 ‘그것’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었다. 이제야 편한 마음으로 홀로렌즈 2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2월 24일 저녁 6시, MWC 전시장인 피라 바르셀로나 안의 마이크로소프트 부스에서 이벤트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멈춘 후 마이크로소프트 CEO 사티아 나델라는 무대에 올라 잠시 홀로렌즈를 회고했다. 처음 홀로렌즈를 공개한 이후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의대생의 수업을 바꾸고 일선 노동자에게 두손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보조 도구로 쓰여진 홀로렌즈의 활약을 기리는 듯했다. 이는 제품의 유용성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의 중심에 사람을 두는 ‘사람 우선'(Human First)의 기치를 완수한 홀로렌즈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지능형 클라우드와 지능형 엣지 시대를 맞아 그 바통을 이어 받을 홀로렌즈 2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내기를 바라는 기도문을 읊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홀로렌즈 2의 시간이 됐다. 알렉스 키프먼은 홀로렌즈 2를 공개하기에 앞서 지난 3년 넘게 세계 여러 나라의 엔터프라이즈 기업과 스타트업, 개발자들이 홀로렌즈의 사용으로 그들의 영감을 받는데 도움이 되기를 꿈꿨고 이제 그 여정의 다음 챕터가 시작된다면서 홀로렌즈2를 소개했다.
알렉스 키프먼의 손에 들린 홀로렌즈 2의 모습은 이전 세대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이마부터 콧등까지 덮었던 거대한 유리 패널이 훨씬 짧아지고 이마 부위를 덮은 부분을 새롭게 설계했다. 어쩌면 짧아진 유리 패널로 인해 세련미는 조금 떨어진 듯하나, 이전보다 더 압축된 듯한 덩치 덕분에 더 가볍게 느껴졌다.
그런데 느낌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홀로렌즈2의 착용감을 높이기 위해 선택했던 여러 결정 가운데 앞쪽에 치중된 무게를 뒤로 옮기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1세대 홀로렌즈는 모든 부품을 앞쪽에 배치한 반면, 홀로렌즈 2는 무게 중심을 뒤쪽으로 옮기고 본체의 소재도 초경량 탄소 섬유로 바꿨다. 때문에 앞으로 쉽게 흘러내리던 이전 세대의 문제도 줄였을 뿐만 아니라 오랫 동안 착용해도 부담이 줄었다. 또한 안경을 쓴 채 그 위에 홀로렌즈 2를 쓸 수 있고, 홀로렌즈 전체를 벗지 않고 외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본체 부분만 위로 들어올리는 바이저 형태로 재설계 했다.
하지만 홀로렌즈 2에서 착용감 못지 않게 신경 쓴 것은 시야각과 화질이다. 레이저 기반 MEMS 디스플레이를 썼던 첫 홀로렌즈는 시야각은 물론 픽셀 밀도가 낮아 선명도가 떨어진 데다, 디스플레이 중심과 눈 중심이 맞지 않으면 상이 빗나가는 등 불만이 집중됐다.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는 홀로렌즈 2의 디스플레이 품질부터 챙겼다. 그 결과 홀로렌즈 2는 각도당 47픽셀(Pixel Per Degree)을 구현한다. 이는 상당히 높은 픽셀 밀도다. 8포인트로 작성된 작은 글자도 읽을 수 있을 정도다. 또한 시야각은 종전 34도에서 52도로 끌어 올려 눈 중심에서 벗어나면 볼 수 없던 이전의 문제도 좀더 개선했다. 아직도 낮은 시야각이지만, 각도당 픽셀을 따지면 2K 이상의 픽셀이라 선명도는 높아진 듯하다.
착용감과 그래픽 품질을 우선적으로 끌어 올린 홀로렌즈 2는 다른 기능도 보완했다. 먼저 보안을 위해 홍채 인식을 추가 했다. 즉, 기업 현장에서 특정 사용자만 장치를 쓸 수 있게끔 생체 보안을 적용해 개별적으로 윈도에 로그인을 할 수 있게 처리한 것이다. 여기에 안구를 추적하는 재주도 더했는데, 이제는 이용자가 보고 있는 홀로그래픽을 좀더 정확하게 추적해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새로운 홀로렌즈 2는 기존 인텔 아톰 대신 퀄컴 스냅드래곤 850 프로세서를 싣고 있다.
실제 마이크로소프트 부스에서 체험했던 홀로렌즈 2는 이전보다 여러 모로 개선된 점이 있다. 먼저 착용감이다. 안경을 벗지 않고 홀로렌즈 2를 써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안경 이용자들은 홀로렌즈 안쪽 패널과 각도만 잘 맞추면 또렷하게 홀로그래픽을 볼 수 있다. 이마에 닿는 부분이 편해졌고 머리를 심하게 흔들지 않는 이상 앞쪽으로 내려 앉는 일도 거의 없다.
그래픽 품질은 확실히 나아졌다. 늘어난 픽셀 덕분에 글자를 읽는 것이 한결 수월하다. 다만 시야각은 개선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좁게 느껴진다. 간호 교육을 위해 실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홀로그래픽 환자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몸의 일부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눈 중심부에서 살짝만 벗어나도 보이지 않던 1세대보다는 훨씬 낫다.
눈동자 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도 살펴봤다. 눈동자 추적 기능은 첫 세팅을 할 때 여기저기 표시되는 홀로그래픽을 따라 다니면서 처음 경험하게 된다. 또한 홀로렌즈 2 체험 존의 환자 정보를 표시한 뒤 더 많은 정보를 보려할 때, 눈을 패널 아래쪽으로 살짝 내리면 글자가 위로 서서히 올라간다.
하드웨어는 이전보다 여러 모로 나아졌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맨 처음 홀로렌즈를 공개했을 때보다 차분하게 시장에 대응하려는 듯하다. 이날 발표에서 보았듯 게임이나 엔터테인먼트까지 모든 영역에 대응하기보다 혼합 현실의 수요가 있는 기업용 시장을 중심으로 먼저 홀로렌즈 2를 내놓기로 한 것이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는 지식 노동자보다 건설 현장이나 정비, 수술실 등 현장 노동자들에게 홀로렌즈 2를 중심으로 솔루션을 제공하기를 원하고 있고, 실제 홀로렌즈 2의 솔루션 파트너들은 컨설팅, 설계, 기계 설비를 제공하는 기업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장 교육 뿐만 아니라 현장의 문제를 원격지에서 분석하고 항상 연결된 상태에서 실시간으로 지원할 수 있는 여러 솔루션을 준비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현장은 안전이 중요하기 때문에 홀로렌즈 2 같은 커다란 장치를 쓰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는 홀로렌즈 2를 다양한 상황에 맞춰 적용할 수 있게 커스터마이징 파트너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홀로렌즈 2를 분해할 수 없지만, 몇몇 파트너는 홀로렌즈 2를 헬멧이나 모자 등 안전을 위해 맞춤 형태로 재설계할 수 있다. 이날 농업, 건설 및 인프라 분야의 비즈니스 장비 공급 업체인 트림블(Trimble)은 트림블 XR10을 발표했는데, 헬멧 위에 홀로렌즈 2를 손쉽게 결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형했다.
물론 외형적인 변화만 강조한 것은 것은 아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클라우드 컴퓨팅 플랫폼인 마이크로소프트 애저의 결합이다. 앞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애저 키넥트라는 모션 카메라가 애저 기반 지능형 엣지와 AI를 이어주는 길을 열었는데, 홀로렌즈 2도 이를 활용한다. 이는 강력한 컴퓨팅을 필요로 하는 작업들을 애저를 통해 해결하고 이를 홀로렌즈 2의 인터페이스로 조작해 더 효율적인 컴퓨팅 환경을 만든다.
첫 서비스 사례로 소개한 스패셜 앵커스(Spatial Anchors)는 설계된 3D 모델에 애저 환경에서 원격 렌더링을 한 뒤 곧바로 홀로렌즈 2에서 입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업체인 ptc는 CEO가 직접 등장해 씽웍스(ThingWorx)와 애저를 통합한 3D 모델링 응용 프로그램이 기계 설비에 대한 원격 교육을 진행했는데, 특별한 컴퓨팅 장비 없이 애저와 연결된 홀로렌즈 2 만으로 모든 것을 구현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이크로소프트는 홀로렌즈 2라는 제품을 엔터프라이즈를 위한 제품으로 자리 잡게 하려는 의도 만큼은 확실하게 드러낸 듯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은 마지막이었다. 홀로렌즈 2와 같은 혼합 현실을 컴퓨팅의 미래로 보고 이를 위한 개방적 환경을 만들겠다는 선언이다. 알렉스 키프먼은 “폐쇄된 생태계는 우리 세계를 무너뜨리는 벽”이라고 말하고, 마이크로소프트는 당신의 창의성과 생각들, 그리고 비전이 모두 열리는 미래를 바라고 있기에 개방적 생태계를 위한 세 가지 요소를 발표했다.
개방형 생태계를 위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선언은 개방형 앱스토어의 추구와 개방형 브라우저 개발, 그리고 개방형 플랫폼이다. 알렉스 키프먼은 이 세 가지를 개방형 요소를 발표하며 ‘믿는다’고 했다. 개방형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한 세 요소에 대해 의심하며 이를 방해하는 정책을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개방형 앱 스토어는 마이크로소프트 스토어 외에도 다른 경쟁 앱스토어를 차세대 컴퓨팅 생태계에 수용한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 스토어만 유일하게 유니버설 윈도우 앱을 통제하고 유통하는 현재의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플랫폼도 유니버설 앱을 유통할 수 있도록 길을 연다는 것이다. 더불어 개방형 웹 브라우징을 위해 이미 모질라가 홀로렌즈 2용 브라우저를 만드는 중이고, 더 많은 참여자를 생태계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개방형 API 및 드라이버 모델을 추진해 개방형 플랫폼으로 정착하겠다고 밝혔다.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지만, 결국 윈도의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이다.
흥미롭게도 마이크로소프트의 이러한 결정에 손을 맞잡아 준 사람이 에픽 게임즈의 팀 스위니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폐쇄적 스토어 운영 정책을 크게 비판했던 인물이지만, 홀로렌즈 2 발표회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이 정책들이 장기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지원할 뿐만 아니라, 홀로렌즈에 올려 실행되는 언리얼 엔진을 5월에 내놓을 것이라고 말한 뒤 무대를 떠났다. 어쩌면 마이크로소프트가 말하고 싶은 미래에 대한 보장이 필요한 순간,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등장해 보증을 선 장면처럼 비쳐졌다.
가볍게 보면 마이크로소프트 홀로렌즈 2는 MWC에서 발표하는 증강 현실 하드웨어 중 하나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전체 발표를 분석하면 차세대 컴퓨팅 플랫폼의 진화 방향을 정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미 홀로렌즈가 이러한 장치의 필요성을 충분히 입증한 만큼 이제 장치의 생태계를 이야기할 때가 됐기에 홀로렌즈 2는 그냥 혼합 현실 장치가 아니라 하드웨어를 둘러싼 생태계의 구성과 확대라는 다음 챕터의 줄거리를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미래를 압축하고 있는 혼합 현실 장치, 그것이 홀로렌즈 2다.
덧붙임 #
마이크로소프트 홀로렌즈 2는 3천500달러(약 391만 원)에 판매된다. 5천 달러였던 홀로렌즈보다 1천500달러 가격을 낮췄다. 한국 출시는 확인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