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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주 May 21. 2024

정성이 느껴지는 책이 갖춘 것

주석의 쓸모 - 2 주석의 전개도: 무엇이 주석이 되나

책『에디토리얼 씽킹』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핵심을 알아보고 구조를 조직하는 능력이 
결국 타인에 대한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내 이야길 들을 상대방 입장에서 중요하다고 느낄 만한 재료가 무엇인지, 
신선하다고 느낄 만한 내용이 무엇인지 상상할 줄 모른다면 
핵심을 골라내기도 힘들 것이다. (p.143)



그리고 이런 구절도 나오죠.



이제 나에게 잡지 바이라인은
‘제 이름을 걸고 당신 생각을 참 많이 했답니다’라고 고백하는 공간으로 보인다.(p.145)


이 책에서 제가 가장 깊게 밑줄을 친 구간이었습니다. 바이라인에 이름이 많이 달리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 더 그랬죠. 줄을 치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정말 그 사람들을 많이 생각했을까. 성실하게 생각했을까. 정성껏 생각했을까.


자신 있게 그렇다 답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주석이라는 것의 쓰임을 연구하는 지금은 그래도 그때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최근의 저는 주석의 전개도, 그러니까 주석이 어떻게 책 속에 자리 잡히는지를 조금 더 파악해 볼 수 있었거든요.



본문은 머리로 쓰고 주석은 마음으로 쓴다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을 보며 한 생각입니다. 작년에 디자이너 권준호님이 안그라픽스에서 낸 책인데요.


책『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동그라미 주석, 미주로 분류
책『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마름모 주석, 글 끝에 달리는 덧붙이는 말이므로 미주로 구분하는 게 맞는 듯

주석은 모두 미주의 방식으로 본문 독서를 마친 뒤에 읽게 됩니다. 동그라미 주석은 본문의 문장 또는 단어에 붙여 설명하고, 마름모 주석은 글 전체에 덧붙이는 말을 넣습니다. 단어 풀이, 출처, 인용부터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변 사실, 후일담 등이 들어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달해 주는 느낌을 받지만, 주석에서는 종종 글쓴이의 태도와 마음이 보다 직접적으로 느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이 애틋하고 자랑스럽겠다(그와 그녀의 사정), 보고 싶겠다(대중가수 신해철), 통쾌하겠다(대표님, 우리 대표님), 씁쓸하겠다(정), 답답하고 억울하겠다(문법과 문체), 어이없겠다(블랙리스트) 등등...


덕분에 제목 - 본문 - 미주 이 흐름으로 읽게 되니, 객관적인 시선에서 주관적인 터치로 여운을 남기고 끝내는 기분이 들더군요. 이러한 방식으로도 독자들에게 어떤 균일한 감상의 흐름을 만들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학술적인 주제가 아닌 에세이의 설득력도 높일 수 있겠지요. 제 책에도 적용해 봐야겠습니다.



글꼴 디자이너 헤라르트 윙어르가 지은 책『당신이 읽는 동안』은 각주를 통해 많은 정보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시, 인용, 문장에 대한 근거, 연구의 조건(한계), 글의 흐름엔 안 맞지만 주제 또는 특정 소재와 관련된 첨언 등으로 각주는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어떤 것들은 이게 꼭 각주가 되어야 하는가, 본문에 넣어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러면 좀 구구절절하겠지 싶어요. 


제일 아리송했던 부분은 헬베티카에 단 주석이었는데....

헤라르트 윙어르, 『당신이 읽는 동안』, 워크룸(2014), 137.

저는 이 주석을 두고 몇십 분간 얘는 왜 달렸을까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단순히 윙어르 선생님이 전하고자 하는 말이 너무 많아서 쓰셨을까요? 정말이야! 정말 헬베티카는 너무 남용되고 있어! 뭐 그런 의미였을까요. 왜 저기에 각주가 삽입되었는지도 저에겐 고민거리였습니다. [1960년에서 1980년대까지 헬베티카가 이거 말고 다른 이유로 쓰인 사례가 얼마나 될까?]가 아니라 그 뒷문장인 [막판에는 너무 많은 회사들이 헬베티카를 사용하는 바람에 이것이 회사를 의미하는 글꼴로 인식될 정도였다.] 다음에 넣어도 되지 않을까요? 그게 더 이해하기 쉬울 거 같은데요. 의문 - 답 - 부연 설명의 느낌으로. 하지만 왜 여기였을까. 왜 본문이 아니고 주석이 되었을까. 내가 이 책을 너무 실용서처럼 보고 있나. 윙어르 선생님이 아니고 윙어르 아저씨로 보면 하나도 안 이상했을까... 


뭐 결국 다른 각주들을 분류해 보다가, 여기도 자신의 시선에 대한 타당성을 좀 더 높이고 싶어서 넣었겠다 생각하고 넘어가긴 했습니다. 다른 이유를 아는 분은 답글을 달아주세요. 살뜰히 독자를 바라는 마음으로 첨언했으리라 일단 생각하지만은 아주 코 풀다 만 기분...(나중에 교수님께도 물어보려고 접어뒀어요).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은 박보나 작가님의 미술에세이도 살펴보았습니다. 2021년 한겨레출판에서 나왔는데, 저는 디자이너 이기준 님의 편집 디자인에 탄성을 내며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박보나,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 한겨레출판(2021)

미주와 각주로 구분되며 해당 단체, 장소, 공간 등의 주요한 변화나, 작가의 해석, 단어풀이, 출처 등을 표기했습니다. 읽는 사람들이 작품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주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또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빠르게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형태의 주석 방식이기도 했죠.


이걸 하면서 제가 박보나 작가님의 책을 가장 교과서적인 단행본에서의 주석 사용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깔끔한 보조설명이라는 측면에서. 아무래도 윙어르 아저씨의 책은 조금 말이 많은 느낌이고,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은... 저걸 일반적인 방식이라고 보긴 좀 어렵죠. 진짜 많이 디자인을 해보았던, 해보았던?? 말이 좀 이상한데... 아무튼 애초 책을 기획할 때부터, 혹은 적어도 원고 작업을 할 때부터 작가님이 저 방식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면 못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편집단에서 잡기에는 너무나 계획적으로 독자를 자기편으로 만들겠다는 작가님의 속셈(?)이 느껴진달까. 그래서 나도 해봐야지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그건 만들면서 그에 알맞게 생각할 일이죠. 우선! 독자를 생각하며 책을 만든다는 사람이라면 주석을 무시해서는 안되겠구나, 절절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석: 읽는 이를 위해 준비한 제작자들의 말풍선


제가 최초에 이 주석 연구를 시작할 때의 질문은, 왜 해야 할 말을 한 흐름에 눈에 보기 좋게 담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에 분산해 놓느냐였습니다. 제겐 지면을 1단이 아니라 2단 3단 4단으로 복잡한 레이아웃을 만들어서 주석을 다는 것이 정말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양식이 필요한 책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그렇게 주석이 달린 책들을 보며 어떻게 제작된 것인지 전개도를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그것들 하나하나가 독자에 대한 배려였다는 걸 알겠습니다.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에겐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빠르게 이해하고 넘어가게 만들기 위해서.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도, 작가의 마음이나 태도를 좀 더 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만족할 수 있도록 작은 말풍선을 준비했던 거구나. 


제가 좀 감성적으로 말하긴 했는데, 상당히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이라는 거죠. 그만큼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것도 사실이고요. 독자는 이미 주석이라는 것이 어디에 들어가는지 알고, 그 양식에 맞춰서 읽기에 이미지가 아닌데도 본문을 보조해 주는 아주 자연스러운 소통의 도구가 된다는 것. 그게 이번 연구의 인사이트였습니다.

 

이 세 권의 책을 전에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와 지금 느끼는 게 정말 다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을 만큼. 여러분도 주변에 있는 책의 주석이 어떠한 이유로, 왜 본문과 떨어져 그 자리에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어?' 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추천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제가 이 글을 위해 본 책들은 편집 디자인의 문을 처음 두드릴 때 보기 좋은 책들입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본문 레이아웃이 복잡한 책으로 주석을 분석하기 시작하면 난이도가 너무 높을 것 같았거든요. 그 점을 감안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뽑다 보니 이 세 권이 모였습니다. 다른 책도 봤지만 그건 다음에 주석의 또 다른 면모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으면 함께 가져오겠습니다. 언제가 될까요... 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 연구는 저를 향상하기 위해 계속하려고 합니다. 또 읽다 오겠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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