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영재인데요, 영재가 아닙니다
영재인데요 영재가 아닙니다
나의 유년시절과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영재였던 것 같다.
수과학 영재라고 하긴 어렵지만 초중고 의무교육 12년 내내 학업 성적이 매우 좋은 편이었고,
수능시험도 무난하게 통과해서 명문대학에 진학했으니 공부 잘하는 (학업) 영재라고 할만하다.
그래서 영재를 공부하는 건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지난날의 나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영재를 공부하면서 나를 대입해 생각하면 재미있기도 했다.
원래 인간이란 무언가를 모르는 채로 남겨두면 불안해하기도 하고,
서사를 만들고 의미 부여하는 것을 즐기는 존재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 나는 독서토론대회, 독서퀴즈대회, 사생대회, 글짓기대회, 수학경시대회, 과학발명대회 모든 대회와 상을 휩쓸었다.
발표를 좋아했고, 토론식 수업도 좋아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에게 하는 말이 많았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나는 수업시간에 조용한 아이가 되었다.
사춘기여서가 아니라 '아는 티를 내지 않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질문할 때 대답을 많이 하면 '잘난 척하는 애'로 찍혀서
시기질투를 받고 일진들도 괴롭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공부를 잘하고 열심히 하고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그랬다.
학교 생활에서 암묵적인 규칙은 티를 내고 튀면 안 되는 거였다.
이해할 수 없어서 그냥 외웠다.
선생님들은 모두 친절하셨고 나를 아껴주셨지만, 같은 반 애들한테 괴롭힘 당하는 건 정말 힘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튀는 것'을 못 견뎌하는데,
영재들은 기본적으로 '튀는 사람'이고
나도 그 '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고생 좀 했다.
'티를 내지 않는 것',
이것 하나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학교에서 공부뿐만 아니라 눈치를 배우면서
나는 조용해졌고
티를 내지 않게 됐고
학교 생활은 편안해졌고
친구가 많아졌다.
오늘 주제는 '숨김 효과'(hiding effect)이다.
동서양을 구분하지 않고 영재들은 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신의 영재성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게 된다.
아는 것도 모른다고 하고
어제 할 수 있었던 것도 오늘은 못 한다고 한다.
영재들은 다른 또래 친구들에 비해 너무 뛰어난 자신의 인지적 능력이나 호기심을 숨기는 일이 흔하다.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지 않고 비슷하게 무리에 녹아들기 위해서.
그러다 보면 영재들은 (이미 다 아는 내용이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종종 지루함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미달하는 학업성적을 내는 '미성취 영재(under achiever)'가 되기도 한다.
영재는 싸가지가 없고, 자기밖에 모르고, 머리만 좋은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편견이 있다.
마치 과거에는 외동일 경우 이기적일 거라고 쉽게 편견을 가졌던 것처럼.
내가 영재를 전공하면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들이 그거였다.
"영재들은 다루기 힘들죠?"
하지만 숨김 효과가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 걸 보면,
영재는 또래 친구들에게 소외받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재능과 호기심, 열정 같은 것들을 숨기고
흔한 아이로 보이기 위해서 애쓰기도 한다.
짠하다.
진짜 이기적이고 머리만 좋았다면 자신의 뛰어난 지능을 뽐내면서 다른 친구들을 수업시간에 지적으로 깔아뭉개고 무시하지 않을까.
물론 그런 아이도 있을 수 있지만, 대개 영재들은 예민하고 머리가 좋기 때문에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자신의 영재성을 드러냈을 때의 장점과
자신의 영재성을 숨겼을 때 장점을 비교하고
영재성을 숨기기로 결정할 확률이 높다.
아이가 영재성을 숨긴 채로 살아가게 두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아깝다.
영재는 자신의 영재성을 꽃피워 더욱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게 되고
영재의 가족들, 주변 사람들, 그리고 영재가 속한 다양한 사회 공동체도
영재의 잠재력이 발휘되지 못함으로 해서 큰 아쉬움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숨겨진 영재성을 찾아내기 위해서 많은 교육전문가들이 노력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부모도 아이의 영재성이 숨겨진 것은 아닐지 주시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최근에는 '선교육 후선발' 제도를 도입해서 국가에서 영재성의 잠재력이 보이는 아이들을 미리 교육시키고 영재성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노력하는 이유는 영재를 통해서 우리가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영재의 재능이 꽃피움으로 해서 영재의 삶이 풍성하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저출산이 심각한 요즘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영재성을 놓치지 않고 찾아 개발시키고
아이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