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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웬 Dec 16. 2022

선택하지 않는 한 모든 건 가능해

Vol.1 다시 멕시코 | #4. 살사 댄스와 영어가 맺어준 인연

G를 알게 된 것은 지난 2019년, 께레따로에 5개월 정도 머물 때 들었던 살사 댄스 수업에서였다. 참여자들 중 유일하게 영어로 대화할 수 있었던 그와 빨리 친해졌고, 일본 라멘 가게를 운영하는 그의 부탁으로 신메뉴 개발도 도왔다(Asian taste!).


그렇게 해서 탄생한 메뉴는 이름하야 MEEJONG ROLL.

(여담이지만 여행 중 나는 영어 이름 '그웬'이라고 불리기보다 원래 나의 이름, 한국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니까 나의 한국 이름은 Mijeong이다.)


나도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 가게에 갔더니 메뉴판에 그렇게 쓰여 있더라. ‘G, 왜 내 이름 스펠링 틀리게 쓴 거야?’라고 묻고 싶었지만 (한국 이름을 제대로 스펠아웃하기란 쉽지 않은 거 잘 안다) 뿌듯해하며 내게 메뉴판 사진을 보내주는데 어떻게 그래. 몇 번씩이나 내 이름을 입으로 소리 내며 맞는 스펠링을 찾으려 노력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그저 웃음이 났다. 어떻게 쓰였든 내 이름을 단 메뉴가 께레따로에서 팔리고 있다는 사실은 기분이 좋았다.


레시피는 이렇다. 김밥말이 발 위에 단촛물을 섞은 밥을 깔고 김을 한 장 올린다. 바삭하게 튀긴 돈가스 한 줄, 크림치즈, 당근, 양배추를 넣고 돌돌 만 뒤 위에 채를 썬 양파와 실고추를 얹는다. 그 위에 마요네즈와 데리야키 소스를 지그재그로 뿌리고, 검은깨를 솔솔 뿌려주면 완성!


MEEJONG ROLL


옛날 얘기는 그만하고.


G는 이번에 내가 께레따로에 왔다는 말을 듣고 “메즈칼 마시고 춤추러 가자!” 고 연락이 왔다.

오 마이 갓. 너무 좋지! why not?


하지만 오늘 (26일 금요일) 저녁 8시에는 J가 준비한 웰컴 디너가, 내일 저녁은 생일 파티가 있어 스케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는데 G가 갑자기 “잠깐 만나서 맥주 한잔할래? Plaze de Armas에서 15분 뒤에 만나자. 어때?”라고 한다.


마치 동네 친구와 연락하다가 ‘나 근처야. 잠깐 보자, 나와.’ 하는 그런 느낌.


그렇게 G와 만나 공원 앞 야외 좌석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그간 근황에 관해서 서로 물었다. 최근에 오래된 집을 사서 리모델링한 이야기, 12살이 넘은 G의 반려견 아눅이 요즘 나이가 많이 들어서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 누군가가 트럭을 해체해서 부품을 훔쳐 가는 바람에 수리 중이라 요즘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이야기, 1980년대 빈티지 바이크를 선물로 받았는데 살짝 넘어지며 브레이크가 고장 났고 멕시코에서는 부품을 찾지 못해 이탈리아에 있는 친구에게 부품을 구해달라고 부탁한 이야기 등.



나는 2020년 9월부터 친구와 동업을 시작했다. 돈을 벌어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같았으나, 돈을 ‘어떻게’ 버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경험과 가치관, 그리고 생각이 너무 달랐다. 똑같은 단어를 써도 그 단어를 통해 이해하는 세계가 달랐기 때문에 대화할 때면 각자의 생각이 평행선 위에 있어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느낌을 종종(혹은 자주) 받았다. 누가 잘하고 못하고,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삶을 지탱하는 가치관과 서로의 결이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문제였다. 수많은 시도와 오랜 대화 끝에 함께 해오던 일을 정리하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이 지난 8월 초.


티켓팅을 할 때만 해도 그저 쉬고 즐기다 와야지 생각했던 멕시코 여행이었는데, 멕시코에 오기 전에 이미 삶의 한 챕터가 정리되고 원한다면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지금 하는 것 중 내가 책임져야 할 일들과 돌봐야 할 일들이 있다. 하지만 (무책임하여지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해야만 하는 것, 안 하면 안 되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걸까? 어쩌면 그건 우리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스스로 주는 의무감 같은 건 아닐까(다른 사람들은 크게 개의치 않을 수도)? 하면 하는 대로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그 선택에 따른 결과를 책임지면 되지 않을까?


아무튼… 이런 생각들이 요즘 머릿속에 지배적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멕시코에 눌러앉아버릴까 싶기도 하고, 다시 0부터 뭘 해야 할지, 삶에 선택지가 갑자기 많아져서 뭘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고민도 많이 되었다. 이런 내게 G는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 <Mr. Nobody>에 나온 대사를 읊어주며 말했다.


As long as you don’t choose, everything remains possible. (선택하지 않는 한 모든 건 가능해.) 그러니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 너 뭐든 할 수 있어.”


맞는 말이다. 선택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종종 흑백논리에 갇혀 스스로 선택의 폭을 좁히는 경우가 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여기 아니면 저기.

이번 아니면 다음번.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Derek Sivers 작가는 '두 가지만 있다는 생각은 스스로가 만든 딜레마'라 했다. 정말 뻔한 것부터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경우까지,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뭐든 상상해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나는 지금 뭐든 해볼 수 있는 상황이니까.


저녁 먹기 전에 J의 에어비앤비에 있는 수영장에서 놀며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수도 있었지만, 맥주 한잔하러 G를 만나길 정말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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