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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웬 Dec 17. 2022

Spanglish로 멋지게 대화하기

Vol.1 다시 멕시코 | #5. 언어는 달라도 마음이 통한다

약 3년 전에 우리가 만났을 때는 베네수엘라 친구인 R은 영어를 몰라서, 나는 스페인어를 몰라서 대화를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만나서 밥은 먹을 수 있지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때보다 내 스페인어는 부쩍 늘어 80-90%의 일상 대화는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말할 수 있는 건 그보다 훨씬 적지만… 


하지만 4시간이 순삭. 괜한 걱정이었다. 그동안 R의 영어 실력도 나의 스페인어 실력도 꽤 늘어있었다. 우리의 대화를 옆에서 누가 듣고 있는다면 엉망진창이었을지도 모른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이상하게 섞어 쓰는 Spanglish(Spanish + English)로 대화했을 테니까!


스페인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데 뇌를 풀로 가동한 터라 정확히 어떤 대화를 하는 맥락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께레따로와 달리 와하카는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해안(la costa) 지방… 뭐 이런 말을 하던 중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R은 내게 말했다.


“la costa라니! 놀라워 네가 그 단어를 쓰다니. 너 스페인어 실력 대단해. 보통 사람들은 그 단어를 몰라서 설명해야 했을 거야. 3년 전 S랑 G랑 같이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너 스페인어 하나도 못 했는데 지금 너를 봐! 이렇게 잘하다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네가 스페인어로 말하는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 그거 알아? 어떤 사람들이 스페인어 할 때 조금 듣기 불편한 경우도 있는데, 너는 전혀 아니야. 너 영어 할 때랑 스페인어 할 때랑 한국어 할 때랑 목소리가 다른 것도 좋고.”


기분이 너무 좋았다. 스페인어를 잘한다는 칭찬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내 스페인어가 듣기 좋다는 말이 미소 짓게 했다.


3년 전, 손짓과 몸짓으로만 대화했을 때도 R은 참 좋은 사람이라 느꼈었는데, 언어를 통해 대화를 나누어보니 정말로 그랬다. 이번에 나와 만나기 전에도 어떤 음식을 함께 먹을지 메뉴를 고민했단다. 께레따로에 산 지 4년. 그간의 데이터를 돌아보며 본인이 맛있게 먹은 음식, 멕시칸 음식이지만 께레따로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닌 것을 골랐단다. 그것은 바로 comida yucateca(유카탄 지역의 음식)!


멕시코는 이미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2개의 주(states)가 유명하다. 하나는 J의 로드 트립의 목적지인 와하카(Oaxaca - 100명의 멕시칸을 만나 물어도 모두가 예외 없이 와하카 음식에 대해서 입이 닳도록 칭찬한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칸쿤이 위치한 킨타나 루(Quintana Roo) 주 옆에 있는 유카탄(Yucatán)이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유카탄 지역 | 이미지의 출처는 위키피디아


비주얼이 예쁜 칵테일, 라이브 음악, 공간이 주는 느낌, 살랑살랑 스치는 바람, 음식. 그리고 R과 나눈 대화.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다. 


코치니따 피빌 cochinita pibil  오랜 시간 천천히 요리한 돼지고기. 풀드 포크와 비슷한 식감. 콩으로 만든 소스와 저민 양파를 함께 또띠야에 싸서 먹는다.
칠레 엔 노가다 Chile en nogada 위에 토핑 된 재료는 멕시칸 국기색이다. 원주민들이 스페인 사람들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대접했다는 음식.


한국에서 전통 민화가 그려진 엽서와 하회탈 자석 몇 개를 가져왔다. 멕시코에서 다시 만난 친구 혹은 새로이 알게 된 친구들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그리고 식사가 끝난 후 R에게 엽서 한 장과 하회탈 자석 하나를 선물했다.



"tengo un regalito para tí. 나 너한테 줄 작은 선물이 있어.”


자기는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라고 미안해하던 그는 내 선물을 보자마자 너무 기뻐했다. 눈망울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마음속 깊은 곳부터 좋아하고 있는지. 잔잔한 떨림과 함께 촉촉해지는 눈망울. 실제로 엽서도 모으고 자석도 모으고 있는데 어떻게 딱 알고 이런 선물을 준비했는지 모르겠다고.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이기에 너무 소중하다고. 친구들도 잘 모르는 취향이라고. 너무너무 너무너무 고맙다고, 볼 때마다 내가 떠오를 것 같다고 말하는 R은 정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그러고는 냅킨을 한 장 뽑아 들더니 엽서랑 같이 액자에 넣어서 걸어둘 거라며 내 이름을 한글로 써달라고 했다. 나는 R에게 그의 이름도 한글로 써줄까 하고 물어봤다. 보통은 자기 이름이 한글로 어떻게 쓰이는지를 궁금해하는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너무 아름다웠다. 자기 이름은 이미 편지에 한글로 쓰여있으니 괜찮단다. 본인의 이름은 영어 이름이라서 영어 스펠링으로 쓰이는 게 진짜 이름이고, 내 이름은 한글로 쓰이는 게 진짜 이름이니까 한글로 쓰인 내 이름을 기억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준 엽서와 함께 내 이름을 기억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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