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관광과 현지 투어, 그 사이 어디쯤.
효도관광과 현지 투어, 그 사이 어디쯤.
매 아침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왜냐면 아기가 한 시간의 시차에 무색하게 새벽 5시, 즉 한국시간 새벽 6시면 칼같이 일어나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다.
좋은 점은 하루를 길게 쓸 수 있다는 점,
나쁜 점은 좋은 점 빼고 다!
친정엄마와 친정아빠를 데리고 우붓으로 떠나는 날이다. 오늘부터 2박 3일간 동안 우붓을 둘러보고 돌아올 예정이다. 친정엄마와는 결혼 전에도 홍콩으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지만 친정아빠까지 함께 해외여행을 한 적은 처음이다. 원래는 친정식구 모두가 함께 하기로 했던 우붓 여행이었는데, 출국 전에 일정이 꼬여 버렸다.
첫째로, 남동생도 원래 함께 합류하기로 했지만 출국 몇 주전 갑작스러운 장기 출장으로 현재 이태리 나폴리에서 외노자 생활중이다.
둘째는, 아빠마저 출장이 잡혀 우붓 둘째 날에 혼자서 출국을 하러 다시 덴파사르로 돌아와야 한다. 내가 이 날을 위해 얼마나 고심하며 호텔을 골랐는데!
출국 전부터 우붓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빠에게 짜증을 냈다. 그 출장 미룰 수 있는 건데 꼭 아빠가 가야 하는 것처럼 그런다고. 꼭 그래 놓고 뒤돌아 서 후회한다.
그냥 말 좀 예쁘게 하지.
성격대로 지랄 맞게 군다 또.
장 컨디션이 좋아진 덕분에 아침부터 아가는 생글거린다. 어른도 장트러블이 나면 하루 종일 만사가 다 안 풀리거늘, 생에 중요한 일이 먹고, 놀고, 싸고, 자는 게 전부인 아기에겐 얼마나 큰 고역이었겠나 싶다.
채비를 단단히 했다. 가는 길에 혹시 모를 아기의 짜증과, 배고픔과, 피곤함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배낭 하나에 차고 넘치게 아이의 간식과 마실거리를 담고, 한 줌의 기저귀를 욱여넣었다.
여기에 내 짐이라곤 지갑 정도 되려나.
아이 몸무게에 좀 못 미치는 배낭을 메고, 9kg가 넘는 아이를 앞으로 매니 비로소 아기 동반 군장형이 완성됐다.
우붓 콘셉트에 맞게 사파리 콘셉트의 옷을 입혔다.
이 옷이야말로 장장 3개월 전, 이대리가 발리에서 입힐 날을 학수고대하며 준비했던 옷이다. 정글에 가니까 tpo에 맞게 옷을 입혀야 한다고.
이럴 땐 또 참 센스가 넘치는데...(말을 잇지 않는다)
오늘의 투어를 책임질 기사는 우리가 머무는 레지던스 겸 호텔의 소속 기사였다.
이름은 꼬망. 발리에서 자주 마주칠 수 있는 이름 중 하나다. 젊은 친구들 중에선 자주 못 봤지만, 그 이상의 나잇대를 가진 대다수의 발리인들은 이름이 꽤나 비슷비슷하다.
그들의 발리 고유의 문화에 따라 태어난 순서대로 이름을 부여하는데, 첫째의 이름은 와얀, 둘째는 마데 또는 까덱, 셋째는 꼬망, 넷째는 끄뚯이라는 이름을 주로 붙인다고. 아마 우리 기사 아저씨는 셋째 아들이었으리라.
복잡한 레기안 로드를 따라 내려와, 선셋 로드를 거쳐 덴파사르 시내로 들어서는 사거리에 도착했다. 원래는 이렇게 한산하지 않은데 사진이 유난히 그래 보인다. 원래는 러시아워 시간엔 오토바이 행렬로 가득 들어차는 곳이다.
시내를 뚫고 몇 개의 마을을 지나 우붓으로 들어서기 전, 꼬망이 우리에게 묻는다.
“내가 잘 아는 루왁 커피농장이 있는데, 거기 들렀다 가지 않을래?”
혼자 온 여행이었다면 단번에 “no”를 외쳤겠지만 앞에서 아빠가 말한다.
“루왁커피 그거 비싼 거 아니야? 농장 구경도 이럴 때 해보는 거지, 오케이 렛츠고~”
투어의 시작은 역시 타의적 쇼핑
속으로 왜 이런 데를 오는 거냐 싶었지만 참기로 한다.
아빠는 수의사다.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수의사는 아니고, 그 어드메쯤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농축산과 관련한 곳을 보면 꼭 이렇게 들러본다.
오늘도 아빠는 커피를 보며 ‘내가 소싯적에 인도네시아 출장을 왔을 때 말이야,’를 말하며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과거의 성과를 이야기한다.
나는 그런 걸 잘 들어주는 성격이 아니라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데,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어떻게 한 회사를 30년이나 다니면서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자신의 일에 애착을 가질 수 있을까’ 싶어 탄복하기도 한다.
물론 속으로 하지, 아빠에게 드러내 놓고 한 적은 없다.
루왁 공장의 초입에서 사향고양이들을 마주한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철장 안에서 멍하니 관광객을 응시하거나, 원통 안에서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여기서 파는 이 루왁들은 얘네가 만드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보여주기 식인 거잖아. 제한된 공간 안에서 바깥세상을 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또 무엇이 있을까. 희망고문도 이런 고문이 아닐 수 없다.
갑자기 한국에 있는 나의 고양이, 타래가 보고 싶어 졌다.
이내 몇 단계의 기계적인 루왁커피 재배 및 로스팅 시연을 거쳐 노천카페 같은 공간에 들어섰다. 이내 열몇 잔의 샘플링 커피와 차가 나온다.
마침 아침 일찍 나온 터라 커피가 고팠는데, 샘플로 나온 커피를 마실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또 그 와중에 루왁커피는 한 잔당 오만 루피아를 주고 사마 셔야 한단다. 그래 뭐 그리 비싼 커피라니까... 엄마와 아빠는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커피 맛이 어떤지 맛이나 보자고 했다.
나도 얼마나 맛과 향이 뛰어난 커피인지 궁금해서 한 잔을 시켜 나눠 마셨다.
곧장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나왔고, 한 모금을 마신 후 나는 아무 맛의 차이를 느낄 수 없어 더 슬펐다.
커피를 마시고 주변 정원을 거닐어본다.
여기도 발리 스윙이 설치되어 있다. 발리 스윙은 우붓의 정글을 마주하며 그네를 탈 수 있는- 그리고 sns에 올릴 인생 샷을 건질 수 있는- 곳인데 요즘은 눈 앞에 정글이 있다 싶으면 개나 소나 다 그네를 설치한다고.
이게 또 공짜가 아니라 한 번 타는 데 15만 루피아였나? 앞 뒤로 몇 번 밀어주고 끝나는 그런 이상한 놀이기구 되시겠다.
미혼일 때 왔다면 인생 샷에 눈에 멀어 한 번 탈 법했을 텐데 아기와 함께 하니 애를 내려놓고 그네에 올라타고 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눈으로만 즐겼다.
마지막 관문, 게임으로 치면 최종 보스인 상점을 통과해야 한다.
어느 여행이던 이 상점에서 정신을 똑띠 차리지 않으면 보스몹이 내 돈을 털어간다. 나는 많은 짐을 가지고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까르푸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들이기에 애초부터 관심 밖으로 두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엄마 아빠에게도 여기 말고 시내로 돌아가서 사자고 했지만, 또 언제 거기까지 가서 사냐며 줄 선물이 있으면 몇 푼 더 줘도 여기서 사자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백 원 이백 원이 아쉬워 더 싼 시장을 찾던 엄마가 이제 나이가 쌓인 만큼 여유도 쌓였나 보다. 더 말리지 않고 사고 싶은 것을 사도록 내버려두었다.
여기 직원들이 딱히 구매를 종용하지 않았기에 마음이 좀 편해진 것도 있고.
커피를 둘러보는 사이 한 배불뚝이 할아버지가 들어와 짜장을 올리고 기도를 드린다.
기도를 마친 후 아기를 보자 환하게 웃는다. 그의 손과 팔뚝엔 꽤 거친 칼자국들이 많았지만 웃음만큼은 손주를 바라보는 여느 할아버지와 같이 환했다.
아기도 그런 할아버지가 마냥 좋은 듯했고, 비록 영어를 할 줄 몰라 서로 대화를 나눌 순 없었지만 꽤 한참 동안 손과 발을 꼼지락대며 아기와 할아버지는 서로에게 인사를 했다.
농장을 나오며 생각한다.
이 농장이 사라지면 일자리를 잃게 될 이들을 떠올리니 마냥 농장은 사라져야 한다고 볼 수도 없는 일이구나. 뭐든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게 두는 게 맞다가도, 동시에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세상 사람들의 모든 이해관계가 결국 궁극적으로 ‘아다리’가 맞도록 조화를 이루게 만든다. 그 원리라면 이 농장은 또 사라져선 안 되는 게 그 이유다.
그렇다면 고양이 없이 고양이 커피를 만드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뜻밖의 최신 건물, 몽키 포레스트
커피농장을 지나 조금 달리니 갑자기 길이 막히기 시작한다. 창 밖엔 여러 상점이 즐비했고 요가복을 입은 외국인 무리가 요가매트를 매고 어슬렁 걷고 있다.
이내 시내가 나오고 우붓 번화가의 기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몽키 포레스트 입구가 나타난다. 입구는 두 곳인 듯한데 우린 정문으로 들어갔다. 널따란 주차장이 나오더니 사방이 훤히 뚫린 매표소 입구가 나온다. 새로 올린 듯한 이 건물은 누가 봐도 관광객의 수익이 시설관리에 매우 유용하게 쓰임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꼬망과는 한 시간 후에 만나기로 하고 우린 몽키 포레스트로 들어섰다.
10월의 초입이다 보니 날이 더워진다. 7~8월까지는 선선하다던데. 그래도 10월 정도면 다닐 만하다. 성수기도 아니고 우기도 아닌 낀 날씨. 누가 그러던데 ‘낀기’라고. 덥지만 그늘 밑에 서면 더위를 잊을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이번 더위는 한국이 최고였으니까.
아기 기저귀를 갈아야 할 듯하여 화장실을 찾는데, 이게 웬걸. 수유실(nursery room)이 화장실 옆에 그 자리를 마주하고 있다. 세상에, 쇼핑몰도 아닌 이런 공간에서 수유실을 마주하니 어찌나 고맙고 반갑던지! 뜻밖의 육아 선진국을 이렇게 마주하게 된다.
새로 지은 건물답게 수유실 역시 깔끔했다. 매우 관리가 잘 되는 듯 모든 시설이 때 하나 타지 않고 깔끔했음이다. 물론 한국의 최신 수유실처럼 전자레인지나 물통은 없지만 먹을 것에 대한 건 좀 조심해야 하니 이 정도 기본시설이면 매우 훌륭하지 뭐.
에어컨도 빵빵하게 나와서 바깥에서 흘린 땀을 식히기에 매우 좋았다. 애 기저귀 갈 땐 좀 춥기까지 했다.
하얀 화강암으로 지어 올린 매표소를 지나 조금 걸어 들어오니 비로소 발리 특유의 축축함과 세월이 묻어나는 표지석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도 원숭이중 하나인 마냥 매달려본다.
아기는 기저귀를 갈고 나서 이은 지 사진을 찍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낮잠에 들었다.
입구에선 원숭이가 소지품을 채어갈 수 있으니 항상 주의하라는 안내를 끊임없이 내보낸다. 아니나 다를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원숭이들은 각각 자신이 찍어둔 표적을 향해 돌진한다.
어떤 이는 안경을, 어떤 이는 가방 속 빼꼼 나온 초코바를, 또 어떤 이는 가방에 꽂아둔 안내 책자까지 뺏겼다. 방심하고 구경하는 사이 아빠는 가방에 꽂아둔 칫솔세트를 빼앗겼다.
몽키 포레스트에선 누구도 원숭이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 이 곳에 사는 원숭이 수백, 수천 마리가 모두 신으로서 자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의 상위 포식자는 원숭이며, 거기에 맞춰야 하는 건 인간인 셈. 한 켠에서는 인간들이 원숭이에 휘둘려 쩔쩔대고 있고, 한편에 선 원숭이가 가로막은 길을 뱅 둘러 걷고 있고, 또 한 켠에는 공원관리인이 원숭이들의 식사를 위해 고구마를 깎아 수북이 쌓아둔다. 아까 들렀던 루왁 커피 농장과 대조되는 분위기라 다시 고양이들이 불쌍해진다.
몽키 포레스트는 말 그대로 숲이라 그 바운더리가 꽤 넓다. 한 바퀴를 천천히 둘러보면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중 많은 이들이 감탄하는 이 나무는 실제로 그 모습이 어마어마했다. 나무 사이로 지나가는 다리가 장관인데, 아마 이 다리를 지은 다음 이 나무가 다리를 감싸고 자라지 않았을까?
일부러 이렇게 만들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 다리 또한 포토 포인트라 한가운데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면 엄청난 눈치게임이 필요하다. 난 이때부터 아기를 맨 어깨가 후 달리기 시작해 계단이고 뭐고 차에 가서 쉬고 싶었다만 아기는 그러던가 말던가 엄마 품에서 매우 잘 잤다.
그리고 갑자기 깸....
깬 틈을 타 원숭이와 함께 사진을 찍어볼까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후기에서 ‘원숭이가 제 다리를 물었어요!’ 또는 ‘원숭이가 제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물었어요!’라는 후기를 봐 혹시나 아기에게 해코지할까 싶어 멀찍이 떨어져 다녔다.
그러던 중 마이웨이를 하고 있던 원숭이 한 마리와 조우, 찰나의 순간을 엄마가 담아준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 다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것으로 충분하다.
몽키 포레스트를 한 바퀴 다 둘러보고 나니 이때 시간대가 점심때쯤. 자고로 효도관광이란 것은 쉬지 않고 일정을 빽빽이 채우는 것, 그것이 바로 돈 낭비하지 않고 모든 명소를 찍어보는 본격 핵심 (자유여행이지만 패키지스러운) 투어 아니겠는가. 아직 주변에 볼 것이 많다.
띠르타 앰풀 사원도, 고아 가자 사원도, 뜨갈랄랑 사원과 우붓 시장도 있는데. 거기다 아빠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 그리고 내일 낮뿐이다 보니 마음이 더 조급해진다.
꼬망과 만난 우리는 곧장 고아 가자 사원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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