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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멋대로 유럽(9)

그림알못의 내 멋대로 벨베데르 관람기

by 효구


벨베데르 궁전의 내부는 외부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화려했다. 특히나 높다란 천장에 그려진 천장화는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어쩌면 예술이라는 것은 특정한 어떤 것을 거의 집요함에 가깝게, 극적인 수준으로 내비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극치'라고 하는 모든 것 말이다.


이날 내가 목격한 예술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벨베데르에 방문한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 작품'을 보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가장 유명한 '그 작품'을 향해 가는 길에 만나는 그림들은 나의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촤르륵, 작은 보석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듯했다.




드디어 만나게 된 그 작품, 클림트의 '키스' 앞에는 많은 관람객들이 몰려있었다. 늘 미디어에서만 접했던 유명한 작품을 직접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그림이기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것일까.




황홀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어딘가 향기롭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런 그림을 그린 이는 과연 어떤 사랑의 감정을 경험한 것일까 궁금했다.


꽤 오랜 시간 그림을 바라보다가 이만하면 됐다는 만족감을 가지고 발걸음을 돌렸다. 원하던 작품을 보았고, 제법 즐겁게 감상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눈길을 진정으로 사로잡는 작품은 따로 있었다.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그림 한 점 앞에서 발걸음을 우뚝 멈추어 섰다.


Richard Gerstl (1883-1908), Self-Portrait Laughing, 1908


리하르트 게르스틀.

작품과 작가 설명에 따르면 이런저런 사연이 많았던 모양이다. 가정이 있는 여인을 사랑했고, 모난 성격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외면도,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는 평생을 아웃사이더로 살다가 이 그림을 (아마도) 유작으로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반 고흐라고도 불린단다.


작품 설명을 듣기 전부터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남자의 표정에 사로잡혔다. 허망함, 슬픔, 고독, 허탈함. 복합적인 감정들이 느껴졌다.


나는 원래 기념품을 잘 사지 않는 편인데, 벨베데르 기념품샵에서 이 그림엽서를 샀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다섯 살짜리 조카에게 그것을 보여주며 물었다. 순수한 아이의 감상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채린아, 이 아저씨 기분이 어때 보여?"


"음, 좋은 것 같아. 웃고 있어."


허망함 따위의 감정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아이에게 그림 속 남자의 웃음은 곧 '좋은 기분'으로 연결되었다. 이 아이도 자라면서 언젠가 잿빛의 감정들도 경험하게 될 테지.


상처 없이 어른이 될 수는 없을 테지.



그렇게 벨베데르 궁전에서의 관람을 끝마치고 나는 다시 비엔나 중앙역으로 향했다. 맡겨두었던 가방을 찾고, 예약해 둔 숙소를 찾기 위해 나섰다.




그런데 아무리 지도를 들여다보고, 여기저기 표지판을 찾아다녀도 내가 가야 할 탑승구를 찾을 수 없었다. 평소 길눈이 어둡지 않았기에 무척 당혹스러웠다. 거의 30분 가까이 헤매다가 결국 단란해 보이는 가족을 붙들고 길을 물었다. 중년 남성에게 질문했으나 그 옆에 서 있던 어린 딸아이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아주 친절하고, 야무진 소녀였다.


그러나 트램에서 내려서도 나는 숙소의 입구를 찾느라 비엔나 밤거리를 또 한참 헤맸다.



겨우 찾아 들어간 숙소는 규모가 큰 호스텔이었는데, 오스트리아 인싸 여행객들은 죄다 이곳에 모인 것인지 거의 파티와 다름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어두운 밤, 길을 찾다가 지쳐버린 나는 그들과 어울릴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기에 잠자코 배정받은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자 먼저 그곳에 머물고 있던 말레이시아 여성이 반갑게 인사해 주었다. 그녀는 무척 발랄한 중년 여성이었는데, 자신이 코를 골 수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여러 사람이 머무는 호스텔에서, 그쯤이야.

나는 자못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코골이에 대해 조금 더 사실적으로 설명해야 했다.


엄청나게 커다란 코골이 소리를 밤새 견디며 오스트리아에서의 첫날 밤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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