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카와 유코 활동가의 편지
안녕하세요? 저는 국경없는의사회 구호활동가 시라카와 유코입니다.
일본과 호주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2010년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에 처음 참여했고, 이후 지금까지 시리아, 예멘, 이라크, 남수단,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등 열 여덟 차례 해외 파견을 다녀오며 구호활동가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국과도 약간의 인연이 있는데요, 2014년과 2015년 사이 국경없는의사회 일본 사무소에서 채용 담당 직원으로 일하면서 한국 사무소의 활동가 채용도 지원했습니다. 한국인 해외파견 지원자의 면접을 진행하거나 한국으로 직접 건너가 채용 설명회를 개최한 적도 있습니다. 이후 직원 수가 늘면서 한국 사무소는 독립했죠. 이런 인연이 있어 저는 한국에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하다 보면 국경이 장애가 되는 현실을 직면할 때가 많습니다. 구호 현장에서 ‘아, 이 환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를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했던지요.
2012년 내전이 이어지던 시리아의 시타 병원에서 일할 때에도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한 시점이 있었습니다. 두 살배기 소녀를 치료할 때였는데요, 자그마한 몸에 몇 번이나 수술을 하는 동안 다친 곳은 나아졌지만 소녀의 몸이 약해지고 만 것입니다. 당시에도 만약 병원에 집중치료실이 있거나 혹은 소아전문 의사가 있었더라면 아이의 예후가 훨씬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사흘에 한 번 꼴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소녀의 자그마한 몸에 마취약을 주입하면서 수술을 반복했습니다. 사실 엄청나게 위험한 작업이었어요. 그렇다고 다친 곳을 치료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우리는 계속 고민했습니다. 그 아이를 이웃 나라에 보내야 할지 말지를. 인접국에서는 전투가 없었기에 가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설비를 갖춘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었죠. 아이의 호흡상태가 나빠졌고, 언제 호흡이 멈출지 알 수 없었습니다. 시타 병원에는 인공호흡기가 한 대 있었지만 그것은 수술받는 환자가 써야 했습니다. 앞으로 수술받을 다른 많은 환자를 위해서라도 그 한 대를 그 아이 한 명에게 쓸 수는 없었죠.
분쟁지에서는 이상적인 치료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장에 오면 그런 생각은 보기 좋게 깨집니다. 턱없이 부족한 의약품과 물자, 인력, 그리고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환경. 분쟁지에서는 이상과 거리가 먼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그런 한계 상황에서 최선의 의료를 환자에게 제공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국경은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있었고, 그 너머에는 큰 병원이 몇 군데나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절차로 국경을 넘는 것은 아니지만 통과시켜줄 것이라는 몇 가지 긍정적인 신호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구급차라면 더욱 통과시켜주지 않을까요? 우리는 민간 구급차를 수배한 뒤 시리아인 간호사 한 명을 붙여서 그 아이를 실어 보냈습니다. 한 시간쯤 후에는 도착할까? 우리는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구급차가 돌아온 것은 세 시간 후였습니다. 차 안에는 숨을 거둔 소녀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국경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인접국 측의 국경 경비가 강화되면서 구급차를 통과시켜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녀를 따라갔던 시리아인 간호사가 두 시간 가량 끈질기게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소녀의 호흡이 멈췄습니다.
“국경이, 생사의 갈림길이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 국경없는의사회의 정신 중 하나인데, 이 아이는 바로 국경이 생명의 갈림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아이의 죽음도 분쟁지 의료 활동의 한계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려면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일정 부분 마비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2017년 저는 다시 한번 시리아로 향했습니다. 2010년 국경없는의사회에 합류한 이래 열 여섯 번째 파견이었고, 시리아는 네 번째였죠. 그 사이 시리아 국내로 들어가는 경로는 점점 더 복잡해졌습니다.
전쟁터에서는 병원이 파괴되어 피해자가 의료시설을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위험한 장소일수록 의사 한 명, 간호사 한 명, 병원 하나의 존재가 더없이 귀중하죠. 부모를 잃은 아이들, 다리를 잃고 절망에 빠진 청년들, 그리고 가족을 부양할 방도를 잃은 가장인 덩치 큰 남자들이 분노를 감추고 눈물을 흘립니다.
사람들은 내게 말합니다.
“네가 굳이 그곳에 갈 필요가 있니?”
“일본에도 구할 수 있는 생명이 있어.”
그러면 그들의 생명은 누가 구할까요?
그들의 슬픔과 분노에는 누가 주목할까요?
도서 소개 | 전쟁터로 가는 간호사
시리아, 이라크, 예멘, 남수단,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등 열 여덟 차례 분쟁 지역으로 파견을 떠난 시라카와 유코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간호사)의 현장 활동 이야기를 담은 책을 소개합니다.
국경없는의사회의 활동 원칙 중에는 현장에서 의료활동을 하는 것 외에도 활동 현장에서 목격한 인권침해와 폭력행위 등의 부조리를 국제사회에 ‘증언’하는 일도 있습니다. 누군가 증언하지 않으면 이런 부조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묻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나라의 위기 상황은 현재까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진행 중입니다. 그 실상을 세상에 전하고 싶어 이 책을 집필한 시라카와 유코 활동가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 책 정보: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701417
국경없는의사회 한국 활동가들의 추천글
“전쟁, 재난, 빈곤, 전염병, 학대와 차별 속에서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삶을 사랑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서로 같은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 박지혜,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
“동료로서 현장의 상황에 깊이 공감해서일까요? 담담한 목소리로 전하는 시라카와 유코의 '증언'은 책을 읽는 동안 때론 나를 현장에 있게 만들었고, 미소를 짓게 하기도, 울컥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힘겨운 생활을 견디고 있을 것입니다. 저자가 전하는 세계 곳곳의 '생생한 증언'이 독자들에게 잔잔한 울림이 되길 바라며,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바쁘게 고군분투하고 있을 책의 저자이자 동료인 유코에게 존경의 마음과 응원을 보냅니다.” - 송경아,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
“저자 시라카와 유코는 저에게 감사한 은인이자 멋진 동료입니다. 유코가 한국 사무소의 채용 업무를 지원하고 있을 때 저를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로 채용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저는 2015년부터 남수단, 요르단,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수술실 간호사로 활동했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의료인과 언론인이 힘을 모아 설립한 단체로, 의료지원이 필요한 환자를 돕는 동시에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상황과 인도적 지원의 필요성을 전 세계에 증언하는 역할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유코는 국경없는의사회에서 간호사로서 의료인의 역할 뿐 아니라 이 책을 씀으로써 증언의 역할 또한 너무나도 훌륭히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유코와 같은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 박선영,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