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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rtonfink Dec 29. 2016

소나티네(sonatine), 1993

수렴과 발산 그리고 자살

※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음을 먼저 밝힙니다.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예술가인 반 고흐, 헤밍웨이, 커트 코베인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일생을 스스로 마무리했다는 점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들은 총기로 자살을 택했다. (커트 코베인의 공식적인 사인은 자살이다.) 유명한 사람일지라도 자살은 대게 개인적인 이유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니까 자살은 종교적이거나 사회적인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비극이기도 하지만 보통은 개인적인 범위에서 도저히 견디기 힘든 상황이 당사자에게 닥쳤을 때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소개할 영화에서도 현실세계와 자신의 세계 사이에서 어떤 괴리를 느낀 인물을 다루고 있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1993년작인 <소나티네>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결말은 꽤 명확한 의미를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글의 첫 부분부터 이 영화의 결말을 공개하고자 한다. 결말 그 자체보다 그 의미를 들여다보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야쿠자 중간 보스 무라카와는 결국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리고 페이드아웃된다. 90여 분의 러닝타임이 이 지점에서 강렬하게 수렴된다. 영화의 구성적인 측면에서 닫힌 결말의 형태를 띠는 것이다. 닫힌 결말로 구성된 보통의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관객에게 더 이상의 고민거리를 던져주지 않는다. 모든 갈등이 해소되므로 관객은 심리적으로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소나티네>의 경우 울려 퍼지는 총성처럼 의미적인 측면에서는 관객의 가슴에 감정의 파고를 남긴다. 그렇다면 영화의 엔딩이 왜 자살이고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엔딩이 설득력을 주는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라카와는 분명 동경에서 잘 나가던 야쿠자 중간 보스였다. 하지만 주먹의 세계에 영원한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야쿠자 인생에 대한 환멸을 느끼던 차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가게 된 오키나와에서 새 출발을 할 수도 있었다. 동경에서 냉혈한의 야쿠자로 자자했던 그가 웬일인지 오키나와에서는 그런 허물을 벗어버린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해변에서 부하들과의 인간적인 행동이나 미유키라는 여성에게 무심한 듯 털어놓는 속내에서 그랬다.


너무 무서우면 죽고 싶어져.

  야쿠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암호 같은 이 한마디로 축약했다. 야쿠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순진한 미유키에게 오히려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었을까? 뒤 이어 항상 두려움에 떨다 보면 차라리 그냥 죽었으면 싶다고 농담조로 털어놓는데, 마치 죽음을 예언하는 결말을 암시하는 듯 하다.


                                      (극중 무라카와의 장난에 당한 미유키의 모습)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는 왜 자살했을까? 무라카와의 삶의 무대를 살펴보자. 무라카와가 오키나와로 가기 전 동경에서 활동하는 야쿠자는 무라카와 조직과 다카하시 조직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무라카와는 다카하시에게서 보스의 명령이니 오키나와에 있는 나카마츠파의 지원 요청에 응하라는 명령을 전달받는다. 뭔가 수상한 낌새가 보이는 순간이다. 한 지역에 비슷한 크기의 세력이 둘이나 있다는 것은 헤게모니를 둘러싼 치열한 갈등이 불가피함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 상황인데 중간 보스더러 다른 지역에 지원을 가라니. 무라카와는 본능적으로 보스의 세력 구조에 대한 재편의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은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 또한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무라카와는 명령에 따라 오키나와로 향한다. 하지만 나카마츠파 보스와의 술자리에서 지원 요청은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동경에 있는 보스가 돈벌이가 잘 되는 무라카와의 관할 구역을 독차지하기 위해 꾸민 일이었음을 알아차린다. 무라카와는 버려진 것이다. 또 보스가 오키나와의 다른 조직인 아남파와 손을 잡고 싶어 했고 아남파의 걸림돌은 나카마츠파였다는 사실 또한알게 된다. 오키나와는 버림받은 조직의 유배지이자 무덤이 될 땅이었던 것이다. 무라카와라는 존재의 기반은 이제 극심하게 흔들린다. 무라카와는 최후의 복수를 결심하고 결국 복수의 대상을 모두 처단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한적한 도로 위에서 그는 권총으로 자살한다.
 
  결국 새 출발에 대한 의지는 없었던 걸까? 만약 무라카와가 그때 자살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다카하시와 보스를 죽였다는 소식이 본토에 전달되면 무라카와는 충성심 깊은 잔여세력의 끊임없는 복수에 시달리다 결국 타자에 의해 죽었을 것 같다. 조직을 배신한 야쿠자가 죽음의 딜레마에서 어찌 자유로울 수 있으랴. 더구나 언제 엄습해올지 모르는 수많은 살기(殺氣)를 무라카와가 감당해내기에는 극이 진행될수록 그에게서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 더욱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맹수가 살아가는 원리처럼, 살기 위해죽이는 행위를 반복해야 하는데 이빨이 점점 무뎌지고 마는 모양이 됐다. 결국 그러한 딜레마는 무라카와라는 한 인간이 극복하기엔 너무 거대한 문제이기에 차라리 자기 자신을 찌르는 것이 더 편안한 결정이 될 것이다. 현실에 대한 환멸이 자살로 이끈 것이다.
 
  프로이트-라캉의 개념으로 보충 설명을 하자면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항상 존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충동적 성질을 가진 존재라고 한다. 그러한 충동을 death drive 또는 타나토스라고 개념화한다. 사실  이러한 충동은 일반적인 상태에서 인간이 문제 삼게 되는 충동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욕동은 일상적인 현실에서는 가능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보통의 상태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쾌락이다. 일반적으로 좋으면 하고 싫으면 관두는 가장 본능적인 삶의 원리를 인간은 쾌락이라 여긴다. 고통과 불쾌함이 최소화되어 내적 안정을 이루려는 것이다. 이것이 쾌락원칙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다면 무라카와도 쾌락원칙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쪽으로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 예를 들자면 학교폭력으로 인해 피해자 청소년이 자살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학생은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그 학생이 전학을 가거나 학교를 관두는 식으로 고통을 피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피상적인 생각이다. 피해자 학생 역시 피해를 받은 양만큼 공격적인 방식으로 대갚아 주고 싶어 하는 분노가 여전히 내재해 있다. 하지만 그러한 대갚음을 가해자에게 실현하기엔 외부 세계가 너무나 거대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피해자가 그런 현실을 인식했다면 그러한 공격성은 휘발되고 마는가? 그렇지도 않다. 그 공격성은 그대로 남아서 자신을 찌르고 결국엔 자기 자신을 죽이는 방향으로 향한다. 모멸감, 분노, 열등감, 우울감등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까지 번지기 때문이다. 즉 쾌락원칙은 자신을 벗어난 외부 세계의 압력에서자유롭지 못하다. 이럴 때 쾌락원칙을 넘어서서 죽음에 대한 욕구가 고개를 들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무라카와 역시 조직에서 버려졌다고 느낀 이후 많은 밤을 그런 부분에서 괴로워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의 자살로 이 영화의 문을 닫는 느낌이 들지만 그의 절제된 고뇌가 여운이 남는다면 이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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