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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rtonfink Nov 21. 2017

영화 <그 남자 흉폭하다>, 1989

허무와 과잉을 표상하는 폭력적 인간상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



Beat Takeshi talks about his novel "Analog" in Tokyo on Sept. 19. (Naoko Kawamura)


영화감독으로서 기타노 다케시는 대중에게 어떤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할까. '그의 영화는 폭력적이다. 그러나 재미도 있다. 독특한 감독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한다. 영화감독 이전에 다케시는 일본의 코미디언으로 인기를 얻었고 여러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는 사실은 이제 새롭지도 않다. 그런데 그의 최근의 행보는 눈여겨볼만하다. 지난 9월 다케시가 로맨스 소설 <아날로그>를 발표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 그의 기존 이미지와 신작 소설의 장르 사이에 이음새가 매끄럽지 않은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출간 발표회에서 다케시는 다자이 오사무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아쿠타가와 상 수상을 청탁했던 것을 사례로 들며 나오키 상 수상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달 그의 신작 영화인 <아웃레이지:파이널>이 일본에서 개봉했고 박스오피스를 달구고 있다고 한다.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기타노 다케시. 종종 종잡을 수 없는 사람 같긴 하지만 그의 외연은 지금도 넓어지고 있다. 문득 그의 첫 연출작인 <그 남자 흉폭하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졌다.




<그 남자 흉폭하다> 포스터




우선 오프닝 시퀀스부터 보자. 밤거리에 풍찬노숙하는 걸인이 불량배 무리에게 구타를 당한다. 쓰러진 걸인이 미동이 없자 시시해졌는지 불량배들이 자리를 뜬다. 부러진 장난감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한 태도다. 불량배 무리를 조금 더 살펴보자면 그들은 10대 청소년으로 보인다(앳된 얼굴은 차치하더라도 책가방, 축구공, 자전거라는 소품을 그냥 사용할리는 없다). 소년들이 한 사회의 최하층에 속하는 걸인을 재미 삼아 두들겨 패는 장면은 관람객의 시선에서 보자면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특별한 이유 없이 폭력을 행사했던 무리들은 번듯하고 아늑한 집으로 돌아가고, 특별한 이유 없이 피해를 입은 아무개는 내일 또다시 누군가에게 휘둘릴지 모르는 세계. 밤은 이렇게 설정되어 있다. 낮은 어떠한가. 유치원생 혹은 초교 저학년쯤 보이는 어린이들이 다리 위에서 기다리다가 그 밑을 통과하는 배에 재미 삼아 깡통을 던진다. 노인 선장도 역시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외치는 외마디 고함도 다리 위까지 전해지면 이미 시시한 것이 된다. 폭력이 이렇게 일상적이고 만연해 있음을 보여준다. 도덕규범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어쩌면 이 영화에서 그런 기대는 접어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한 사나이가 다리를 건넌다. 아즈마 료스케(기타노 다케시)다. 바꿔 말하면 흉폭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사나이다. 그러나 아즈마는 왜 흉폭해졌나. 하나씩 살펴보자. 그의 직업이 경찰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폭력성은 일종의 직업병일까. 동료 경찰을 보건대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범죄자를 단번에 제압하기는커녕 오히려 차례차례 당하는 꼴을 보자면 한숨이 나온다. 한편 신임 서장은 경찰의 직업윤리에 대해 (명목상으로는) 강조한다. 서장은 아즈마를 불러 그의 과격함에 대해서 자신이 부임해 있을 동안만큼은 적절히 처신을 할 것을 요구한다. 경찰이라는 조직 문화에서도 그는 불편한 존재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의 과격한 행동들은 조금 더 넓은 시각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 아이들은 도덕규범을 학습하는 존재라기보다 폭력의 계단을 밟고 올라서는 것 같다. 그런 존재들이 어른이 된다. <그 남자 흉폭하다>가 그리는 세계는 낮에도 밤에도 환멸로 가득 찬 세계다. 이런 어두운 배경을 아즈마는 가장 잘 느끼는 사람이자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는 크게 두 가지 태도를 취하기로 한다. 허무와 과잉. 그에게 있어 그 밖의 중간항을 선택하는 것은 약간의 실없는 농담뿐이다.




허무와

세계


아즈마는 꽤 고독한 삶의 기반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여동생인 아카리(카와카미 마이코)가 유일한 혈육으로 등장함에도 말이다. 그녀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 아즈마는 동생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것 이상으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은 인물인 셈이다. 건강한 대화를 나눌만한 1차 집단이 붕괴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여타 영화에서 흔히 나올 법한 걱정하는 부모(혹은 유사 부모)의 존재가 없거니와 그렇다고 간담상조하던 친구가 등장해 불안한 심리를 대변하는 장면도 없다. 그러니까 아즈마는 자의든 타의든 실존적인 면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다. 영화를 통틀어 아즈마와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사이로 동료인 이와키(히라이즈미 세이)가 있다. 아카리를 걱정해주기도 하고 아즈마를 인간적으로 대하는 유일한 인물로 보인다. 그러나 아즈마가 마약 범죄를 수사하면서 이와키가 마약 사범들과 결탁한 부패 경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표정은 굳어진다. 그 후 이와키는 어느 날 죽은 채 발견된다.(이후 장면에 비추어 봤을 때 이와키는 타살된 것이라 생각된다. 자살한 사람처럼 죽었지만.) 이제 아즈마는 악의 뿌리를 제거하리라는 명분을 얻었다. 그래야만 이와키와의 우정에 대한 부채감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범죄조직의 두목 니토(키시베 이토쿠)를 먼저 죽이고 그의 심복인 키요히로(하쿠류)와 최후의 대결을 하게 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흔한 범죄영화라면 부하를 차례대로 죽이고 마지막에 두목과 맞서게끔 플롯을 구성할 텐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이와키를 제거하라는 명령보다 행동에 더욱 주목한 까닭은 뭘까. 키요히로는 명령에 의해서만 살인을 하는 인물이 아니라 재미 삼아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아이들이 죄의식 없이 저지르는 폭력의 최종적인 형태로 키요히로를 상정한다면 그를 마지막까지 살려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달리 말해 키요히로가 최후의 대결 상대인 것은 아즈마 자신이 흉폭한 사나이가 된 원인과 마주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대결은 치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허무로 향할 것이다. 완벽하게 악의 뿌리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아즈마에게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기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즈마에게 긍정성의 씨앗처럼 보였던 이와키는 이미 죽었고, 니토 패거리는 앞으로도 마주할 악에 비하자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악의 대결에서 실패한다면 그는 그 자체로 패자가 된다. 전자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허무함이 지속될 것이라면, 후자는 삶이 타인에 의해 끝난다는 점에서 허무하다고 할 수 있다.

정상인이라면 내릴 수 있는 주체적 결정을 아카리는 올바르게 내리지 못한다. 그리하여 아카리는 불온한 욕망에 가득 찬 남성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대상화된다. 종반부에 가서 약물에 취한 채 키요히로 일당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는 장면은 매우 불쾌하게 느껴진다. 이때 관객은 아즈마가 나타나서 뭔가 해결해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아즈마를 보자니 개인적인 '목표'와 더불어 여동생을 구하러 가는 구원의 주체로서의 역할까지 기대하게 한다. 마치 영화 <아저씨>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씁쓸함과 비감(悲感)을 느끼게 한다. 특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약을 찾는 아카리를 아즈마의 손으로 결딴을 낼 때 그렇다. 이때 카메라의 시점은 이 전체 사건을 관망하는 관객의 시선과 같다. 당신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듯이 멀찍이 떨어져서 사건 현장을 보게 하는 것이다. 필자에게 한 발의 총성은 이렇게 들린다. 어떤 기대도 희망도 없으니 차라리 그만하자고. 그렇게 사건 현장을 터덜터덜 걸어나가는 아즈마의 마음은 이제 완전히 텅 빈 것과 마찬가지다. 뒤늦게 온 니토의 부하는 아즈마의 머리를 쏘아버림으로써 그의 기억까지 터뜨려버린다. 차라리 잘 된 걸까. 아즈마에게 있어서 말이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하다가 수미상관으로 하는 것이 역시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 듯하다('아즈마의 허무한 삶은 끝났다. 그러니 관객도 좀 허무한 느낌을 받아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즈마의 후임 경찰인 기쿠치(아시카와 마코토)는 초반부에 아즈마가 건넜던 다리를 그대로 건넌다. 그러나 기쿠치가 향하는 곳은 경찰서가 아니라 니토의 사무실이다. 그렇다. 니토의 자리는 부두목이 대신했고 기쿠치는 이와키를 대체했다. 악은 건재하고 부패한 경찰도 없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와키보다 자신이 더 영리하다고 말하며 교활하게 웃음짓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우리가 실로 허무해지는 것이다. 헛웃음도 난다. 그러나 거악(巨惡)의 바퀴는 이리도 잘 굴러간다.




과잉-감정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좋아하거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남성 관객일 것이라 추측해본다. 까닭은 다케시의 영화가 남성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자다운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말하자면 다케시의 캐릭터는 폭력을 사용할 때와 사용하지 않을 때의 구분이 꽤 명확히 드러난다. 수치화해서 보자면 10 중 5 정도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톤이라면 다케시는 그를 넘어서는 정도로 보여주거나 그보다 과소화하여 보여준다고 간략히 정리할 수 있다. 그러니까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야수의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고,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극히 감정을 절제하는 방식으로 구현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성질이 다케시의 다른 영화보다 더욱 잘 드러난다. 즉 남성성을 긍정하는 관객 입장에서는 이를 재미있게 볼 만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허무함이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시각으로 설정되어있다면, 과잉은 그에 대한 태도로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내용을 이어가자면 이 영화에서 과잉은 두 가지로 구현된다. 감정을 과잉으로 드러내는 것이 하나이고, 과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나머지 하나이다. 우선 전자부터 살펴보자. 아래 이미지의 상황은 이렇다. 이와키의 죽음이 니토 일당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아즈마는 키요히로를 경찰서로 연행한다. 경찰서는 아즈마의 공간이다(경찰조직과 아즈마가 불화를 겪고 있으나 범죄 혐의를 조사할 때 경찰서는 아즈마가 통제 가능한 공간이다). 아즈마는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면서도 겁박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아즈마는 흥분한다. 여동생처럼 바보냐는 키요히로의 말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두들겨 맞았으나 키요히로는 심리적으로 승자가 되었다. 악을 마주할 때면 아즈마는 언제나 감정을 과잉으로 분출한다. 그럴 때마다 경찰이라는 지위는 폭력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그치게 된다. 이런 특징 때문에 아즈마는 악을 마주함에 있어서 냉정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허우적댄다. 결국 아즈마는 생존 방식으로 체득한 흉폭함을 극복하지 못해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다음은 감정을 과잉으로 절제하는 것이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 아즈마는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에 무미건조한 대화를 나눈다(이는 <소나티네>에서 무라카와가 오키나와에 있을 때를 비교해보면 극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까. 외국인의 시각에서 일본인은 담백하고 미니멀한 태도를 추구하는 듯하다고 치자(소박한 일본식 정원, 정갈한 식문화, 오모테나시 등을 떠올렸을 때 느껴지는 무언가에 대한 것을 참고해보자). 그렇다면 그런 태도에서 일본인 특유의 미의식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의 경우라면 다소 무뚝뚝할 줄 아는 것이, 여성의 경우라면 화가 나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겸양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좋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추상적인 특질에 대해 동의할 수 있다면, 아즈마의 경우도 일본 남성의 마초적 미의식을 잘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아즈마에게 있어 문제시되는 것은 감정을 과잉으로 드러낼 때라고 말할 수 있다(감정을 억제하는 것은 언제든 과잉으로 드러낼 수 있는 가능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즉 감정을 과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오히려 전형적인 일본 남성 특유의 미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즈마의 최후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기타노 다케시는 많은 작품을 남성적인 시각에서 그렸다. 그러다 보니 여성 캐릭터가 다소 수동적이거나 도구적으로 기능하는 한계가 있다. 훌륭한 영화라면 캐릭터 하나하나가 단순히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아카리라는 캐릭터가 도구적으로 쓰였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인물 설정부터 아카리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으므로 서사에 있어 주체성을 상실한 채로 영화에 등장하게 된다. 달리 말해 아즈마의 삶의 기반이 허무하다는 것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휘두르는 폭력에 철저히 무기력하게 당하기까지 한다. 특히 강간 장면을 너무 사실적으로 다소 오랫동안 묘사했는데, 불필요한 장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뒷부분과 연결 지으면 더욱 그렇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약물에 중독된 아카리를 바라보면서 아즈마가 끓어오르는 감정(나-세계에 대한 강력한 환멸감)을 참지 못하고 발포한다는 점 때문이다. 아카리를 죽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것 같다. 아즈마의 완벽한 죽음을 위해 아카리의 고난과 죽음이 수단이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무리하려 한다. 허무와 과잉을 드러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아즈마란 인물의 삶은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작가의 이전글 소나티네(sonatine),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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