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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 mei mi Nov 13. 2020

10. 박완서- 굽이진 삶의 길목에서

청바지의  벨트 루프- 단단히 잡아주는 버팀목





-  미소가 아름다운 소설가 박완서 /이미지 출처: 구글  -






"하필, 나이가 많아서 어쩌니..."



학과의 만학도였던 내게 수식어처럼 들렸던 말이다.


2016년  내 나이 서른넷. 30대 중반을 시작할 무렵 대학을 졸업했다. 전공은 패션디자인. 졸업때까지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성적 장학금도 받고 다녔다. 하지만 빈약한 스펙에 많은 나이라는 핸디캡은 경기 불황 속 졸업을 반갑게 맞이 할 수 없게 했다.



우선 취업이 급선무였다. 나이 제한을 두지 않는 곳에 입사지원을 했다. 우연한 계기로 데님 디자이너의 길에 들어서 청바지를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임금체불과 돈을 떼이기가 부지기수. 부당한 처우와 인격모욕도 뒤따랐다. 취업을 위한 입성이 우선이니 참고 기다리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애초에 약속한 근로조건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올바로 재정비하기엔 나는 너무 하찮은 사람이 된 후였다. 올무처럼 발목을 죄여 오는 나이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제 나이'라는 시기에서 이탈한 내게 나이는 원죄였다.






(좌) 1955년 집 앞에서 큰 딸을 앉고 있는 박완서  / (우) 1970년  <나목>으로 당선되어 수상하던 날 남편 호영진씨와 함께./ 이미지 출처- 신동아 -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그녀는 내 영웅이다. 1970년 공모전에 소설 <나목>이 당선될 때 오 남매의 육아에 바쁜 전업주부 신분이었다. 당시 나이는 40세. 그녀가 불혹에 꿈을 이뤄낸 쾌거는 중년의 대학 졸업생인 내게 여망(餘望)이었다. 물론 뛰어난 실력과 재능을 겸비한 문장가인것이 성공의 요인이지만, 나는 무엇보다 시작의 시점에 큰 의미를 두었다.  "박완서 선생님도 마흔에 소설가가 되셨는데, 내 나이 서른넷에 시작이면  한~ 참 젊지!" 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분의 저서를 접하기도 전에 신문지상에서 주워들은 등단 나이가  너무 놀랍고 희망차서.



*여망(餘望): 앞으로의 희망







-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의 표지 / 이미지 출처 :구글 -








똥과 오줌을 보란 듯이 입에 올려도 더럽지 않고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글은 처음이었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박완서가 그리는 고향은 청정하다.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현재 북한의 개성 특별시에 속한 이곳이 그녀의 고향이다. 아이들 얼굴엔 노란 코가 수시로 나오고  산이며 들이며 뛰어다닌다. 시장하면  따먹었던 들판에 열린 색색의 작은 열매. 시큼 털털하면서도 새콤달콤한, 그 맛 같은 어린 시절 마을 풍경이 눈 앞에 말갛게 나타난다.



자전적 소설의 집필은  소설가 박완서 인생의 필연이었다. 1931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속에 자랐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해방되었다. 1950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과에 입학했지만 얼마 후 6.25 전쟁이 벌어졌다. 인심 넉넉한 가풍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의 고향이 주었던 안정감은 격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서 무력하게 넘어진다. 전쟁을 일으킨 이데올로기의 대립. 국민은 무력을 갖춘 권력 앞에 숨죽일 수 밖에 없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뉜 싸움, 엎치락뒤치락하는 판세 중에 그녀의 오빠와 숙부는 산 목숨을 빼앗겼다. 남겨진 가족을  위해 스스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이때의 그녀가 겪은 응어리진 마음이 추후에  반드시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진다. 




- 다양한 표지로 발행됐던 <나목> / 이미지 출처: 구글 -


- (좌) 박수근 화백  /  (우) 박수근 화백의 대표작  <나무와 두 여인>  -



<나목>은 전쟁 중 박완서가 근무했던 미 8군 PX의 초상 화부에서 만났던 서양화가 박수근과의 일화를 떠올리며 쓴 소설이다. 작고하신 화백의 유작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한 전기를 써야 겠다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말 수 없이 조용히 그림만 그리고 세세하게 서로를 알 만큼 친분 있는 사이가 아니라 쓸 내용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장르를 전기에서 소설로 변경하여 상상 속 인물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그려냈다. 난리(亂離)의 상흔을 몸소 겪은 그녀였기에 무너진 일상과 민족 분단의 아픔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글을 쓸 수 있었다. 결혼 후 40세의 나이에 작가로서 첫 작품은 이렇게 탄생 되었다. 이후에 본격적으로 글 짓는 인생이 시작된다. 꿈결 같은 유년시절의 기억과 불우한 전쟁의 시간은 작품 안에서 글감으로 재탄생한다.










-  <한 말씀만 하소서>의 초판 표지 / 이미지 출처: 구글 -




피 할 수 없는 역사적 시련과 고뇌도 글로서 승화시켰다. 하지만 1988년 여름, 오 남매 중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슬픔을 걷잡지 못한다. < 한 말씀만 하소서>는 가톨릭 월간지 <생활 성서>에 1990년 9월부터 1991년 9월까지 연재한 박완서의 일기 형식의 글을 모은 책이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비통함.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서려 있다. 절대자를 믿고 순종했음에도 자신의 목숨보다 아끼는 자녀의 생명을 앗아가 버린 것에  대한 증오였다. 같은 해 3개월 전엔  남편이 암투병 중에 세상을 떠났다. 곧이어 닥쳐온 아들의 죽음은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본 울음에는, 그 울음이 설사 일생의 반려를 잃은 울음이라 할 지라도 지내 좋고 보면 약간이나마 감미로움이 섞여 있게 마련이었다. 응석이라 해도 좋았다. 아무리 미량이라 해도 그 감미로움에는 고통을 견딜만하게 해주는 진통제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오직 참척(慘慽)의 고통에만 전혀 감미로움이 섞여 있지 않았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끔찍한 극형에 당해서는 그 영문을 물을 권리가 있다. 신의 권위가 장난칠 권리가 아닌 바에야 의당 그 극형이 무슨 잘못에서 연유했는지 밝혀 줘야 한다. 신, 당신의 존재에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 < 한 말씀만 하소서> 에서  발췌-


* 참척(慘慽) :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






1988년은 서울 올림픽이 열린다고 전국에 어딜 가나 개최 열기로 들썩였다. 아들 없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잔치가 달갑지 않았다. 출구 없는 고통과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신'에게 항의하는 것이었다. 남에게 헤끼치지 않고 바르게 살아가려 한 인생에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외침. 그러나 응답은 없었다. 곡기를 끊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염려로 억지로 조금 먹는다. 그러나 뒤돌아서면 먹은 것을 전부 토했다. 심신이 지쳐 사는 게 아닌 지경이었다. 수녀님의 권유로 지방 수도원으로 피정(避靜)을 떠난다. 하느님에 대한 박완서의 울분은 쉽게 삭으러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은 절망으로 인도했다.


*피정(避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살피는 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도원을 방문하는 여러 명의 사람들, 힘없고 병들어 있는 생명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수녀님들의 봉사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어루만지고 있었다.' 왜 하필 내 아들이 죽어야 합니까?'라는 물음과 마음에 환기가 일어났다. 이제는 아들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자신을 마주하며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다지게 된다.






2019년 전 직장에서 업무 중 상해로 다친 디스크 파열. 왼쪽 다리에 방사통은 나날이 심해졌다. 스테로이드 주사와 강도 높은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통증보다 더 큰 상처가 내 마음을 괴롭혔다. 인격모욕과 직장 내 괴롭힘. 그리고 나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여기게 했던 가스 라이팅은 회사를 떠난 후에도 여전히 메아리쳤다. 그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동은 기도였다. 아니  하느님께 억울함을 호소했다.




세례를 받기 전부터 미사 참석 시 봉헌과 별도의 행사가 있을 때도 감사 봉헌을 열심히 했다. 세례를 받고 나선 교무금 통장을 바로 만들어 매달 일정 수입을 냈다. 일명 '천원 헌금'이라 불리는 가톨릭 일부 봉헌의 폐해를 신부님께 들어온 터였다. 하느님이 다 지켜보고 계신데 낼 수 있는 성심성의껏 하는 게 신자로서 도리라 여겼다. 기도도 열렬히 올렸다. 묵주기도 책을 보며 열성을 다했다. 그러니 하늘에 계신 그분은 날 분명히 보우하실 거라 믿었 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절망이 찾아왔다. 게다가 나를 해한 그 사람들은 모두 가톨릭 신자였다. 사회에선 종교의 이름 앞에 '좋은 사람'의 탈을 썼지만 실제로는 극악무도한 사람이었다.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다."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하셨나요?"라는 물음에 반드시 응답 해 주시길 간절히 바랬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 이사야서 49장 15절-




가슴에 새겼던 이 말씀은  큰 힘이었다. 그런데 나를 잊지 않으신다던 그분은 내 존재를 잊은신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이렇게 놔두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절망에 빠져 있을때 운명처럼 이 책을 만났다. < 한 말씀만 하소서>.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 박완서의 하느님에 대한 솔직한 고백의 기록들. 자신에게 형벌과 같이 내려진 참혹한 그 일에 대한 이유를, 그분께서 단 한 말씀만이라도 속시원히 얘기해 주시길 소망했다. 인생의 힘겨운 시기를 여러 번 이겨낸 그녀였지만, 감히 상상조차 못 한 이 고통은 기필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었던 거다. 그러나 현실에 벌어졌다. 원망과 증오가 치미는 마음속 발악. 하느님은 시간을 통해 그녀가 납득할  이유를  스스로 깨닫게 하셨다.



그녀를 통해 내게 벌어진 일의 억울함 보다, 그것이 내게 뜻 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함부로 대하기 만만한 사람으로 자신을 방치한 지난날. 나는 현명하지 못해 간악한 사람을 판별하는 지혜가 없었다. 이것은 버림 받음이 아니라 혜안 없는 내 삶을 위한 단호한 쉼표였다. 그렇게 생각의 전환이 일어난 후 나는 미뤄 왔던 척추 수술에 대한 용기를 냈다. 2020년 3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무사히 수술을 받았다. 두 달쯤 지나 내 이야기를 글로 쓰겠다는 결심을 했다.






- (좌) 앞판에 2개 , (우) 뒤판에 3개의  벨트 루프가 달려 있다. -


- 연습을 위한 벨트고리, 옷에 부착되는 실제 간격보다 촘촘하다. 인생도 이렇게 잡아주면 안정적일 텐데 ^^;; -



벨트 루프 (belt loop)는 바지의 허리띠(waistband 또는 오비) 부분에 부착되는  재천으로 만든 벨트 고리다. 디자인에 따라 그 길이와 위치 모양이 달라진다. 청바지는 기본적으로 앞판에 2개, 뒷판에 3개가 달린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옷 위에 착용하는 벨트는 안정감 있는 지위를 갖게 된다. 허리를 감싸는 벨트는 인간의 일생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 세상에 태어나 탄생을 맞이하는 순간, 삶의 레이스가 시작되고  최종 목적지인 죽음과 만나게 되어있다. 인생의 경주는 각자의 얼굴 생김처럼 다양하다. 단거리, 장거리, 허들, 경보, 마라톤. 어떤 경기가 펼쳐질지 종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재미있고 살만한 게 인생이라 한다.



청바지에 달린 벨트 고리는 무너진 삶을 잡아 단단히 지탱해 주는 버팀목과 같다. 작가 박완서가  인생의 모진 풍파를 수 차례 겪어 오면서 휘청거리는 중심을 글로서 동여맸듯이. 처참한 전쟁의 파편과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낸 아픔은 살아갈 의지와 방향을 잃게 했어도 그녀의 마음을  완벽히 훼손하지 못했다. 희망은 잠시 사그라들더라도 그 본질은 지워지지 않기에. 굽이진 그 삶의 길목에서 나를 살리는 무언가는  언제나 자리 잡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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