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에 위치한 피지, 투발루 등의 섬들이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30년쯤 뒤엔 수몰될 것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피지섬. 나는 이십 대에 만난 어느 여자아이를 떠올린다. 스타벅스 진열대에 있는 피지 워터를 볼 때, 우연히 피지섬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항상 그 여자아이를 생각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피지섬은 나에게 그 여자아이 자체였다.
나는 그 애를 대학생 때 영어 학원에서 만났다. 영어 회화 학원이었는데 외국인 선생님이 매 수업 시간마다 어떤 주제를 던져주면 수강생들끼리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종종 그 애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내게 그 애가 피지섬으로 각인이 된 그날의 주제는 ‘인생의 우선 순위’였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골라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얘기하는 거였다. 선생님이 나눠준 카드에는 돈, 자유, 가족, 사회적 지위 등 다양한 가치들이 영어로 쓰여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심오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번듯한 직업을 갖고 싶고 사회에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사회인이 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으로 초조했다. 내가 어떤 가치를 꼽았는지 모두 기억이 나진 않지만, ‘사회적 지위’가 중요하다고 했던 것만은 기억한다.
어깨까지 오는 까만 머리, 가는 실버 테의 동그란 안경을 쓴 그 아이 차례였다. 그 애가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가 뭐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사회적 지위’가 가장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던 건 기억난다. 그 애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꿈을 밝혔다. 그 애의 꿈은 피지섬에 가서 매일 수영하면서 사는 거였다. 자유로운 토론 시간이 되자 나는 그 애에게 물었다.
“사회적 지위가 안 중요해요?”
그 애는 겸손한 태도로 손사래를 치며 자신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거의 화가 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을 듣고 화가 났다는 게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나는 왜 화가 났던 걸까?
나는 그 애에게 질투를 느꼈다. 나는 이 사회에 어떻게든 속해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데 피지섬에 가서 살고 싶다니. 너는 어떻게 여기 이 서울에 살면서 이 자장에서 벗어나 있는 거야? 너는 어떻게 피지섬을 꿈꾸는 거야? 나도 자유롭게 살고 싶어. 이렇게 경쟁하며 살기 싫어. 비결이 뭐야? 대충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뾰족한 마음이었던 나는 그날 이후로도 그 애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그 애가 그 테이블에 앉은 사람 모두에게 예쁜 디자인 봉투를 한 장씩 줬다. 나는 봉투를 사본 적이 없어서 그 봉투가 어디서 받은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그 봉투는 교보문고 핫트랙스에서 파는 거였다. 생각해보면 그 애는 마음도 넉넉했다.
학원을 그만두게 되면서 당연히 그 애를 보지 못했다. 그 애의 이름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애가 자꾸 생각난다. 이름도 모르는 그 애를 그리워한다. 그 애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피지 섬에 갔을까?
30년 뒤 피지섬이 잠긴다고 하는데 그 애는 그 소식을 듣고 어떤 마음일까 생각한다. 피지섬은 그 애의 꿈이었다. 그냥 아무 섬에 가서 수영하며 살고 싶다고 한 게 아니라 콕 짚어 피지섬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유리병 속에 편지를 담아 그 애에게 띄우고 싶다. 그 애에게 말을 걸고 싶다.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때 나는 너를 시기했어. 니가 맑아서. 니가 자유롭고 너그러운 아이여서 부러웠어. 그때 너의 이름이라도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너를 질투하는 대신 너와 친해졌다면 좋았을 텐데. 니가 인생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준 덕분에 내가 얼마나 이 곳의 자장에 숨이 막혔었는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됐어. 피지섬 얘기가 나오면 나는 항상 너를 생각해. 잘 지내길. 피지섬이 아니더라도 자유롭길. 행복하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