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영화 <원더휠>
예전에 대학교 조교로 일할 때 알게 된 마흔 즈음의 미혼인 여자 강사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 친해졌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그 여자 강사는 국문과 박사 수료 후 강사 일도 하고 조교로도 일했다. 약간 촌스럽고 얌전한 원피스를 즐겨 입었고 늘 머리카락 끝이 안으로 말리도록 꽤나 정성스럽게 손질한 어깨 기장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또 간호사들이 병원에서 즐겨 신는 스타일의 투박하고 철 지난 구두를 신었다.
나는 그 여자 강사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 선생님에게는 정말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점심시간에 같이 점심을 먹고 나면 어떤 나이 많은 남자한테 전화가 온다는 거였다. 그러면 캠퍼스를 산책하다가도 그 선생님은 온 신경을 그 전화에 집중했다. 내가 뜨악한 건 그 선생님의 미치도록 간드러지고 애교스런 목소리와 말투였다. 지적이고 교양있는 여자가 털털한 목소리로 나와 얘기하다가 갑자기 돌변하는 것이다.
어느 날 점심시간마다 전화하는 그 나이 많은 남자가 선생님한테 옷을 선물했는데 선생님은 화가 났다. 할머니들이 입을 법한 잔꽃 무늬 몸빼 바지 같은 옷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도대체 나를 뭘로 보고"라며 씩씩거렸다. 그 남자는 선생님에게 맘에 안 들면 바꾸라고 했고 그 옷 판매점이 학교 근처에 있어서 같이 옷을 바꾸러 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바꿀 옷이 없어서 스타킹으로 바꿨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또 그 나이 많은 남자한테 전화가 오자 선생님의 목소리는 다시 간드러졌다. 아니, 이 성숙한 여성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둘은 무슨 관계일까. 그렇지만 대체 왜 그러시는 거냐고 차마 묻지는 못했다.
그 선생님과 김밥집에 갔던 날이었다. 선생님이 김밥집 아주머니와 담소를 나누던 중 김밥집 아주머니가 선생님한테 몇 살이나 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뗐다.
...저 마흔 다 됐어요.
마흔이면 마흔이고 아니면 아니지 마흔이 다 된 건 뭔가. 당시 이십 대였던 나에게 그 장면은 인상 깊게 남았는데, 나는 그때 선생님이 마흔임을 인정하기 싫어한다고 느꼈다.
자신이 마흔 살인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여자가 또 있다. 영화 <원더휠(Wonder Wheel)>의 여주인공 ‘지니’다. 지니가 내연남에게 그동안 숨겨온 자신의 나이를 밝히는 장면이 있다.
나 서른다섯 아니에요. (......) 서른여덟 살이에요. (...) 사실 서른아홉.
지니는 자기 나이를 고백하고 얼마 뒤 마흔 살 생일을 맞이한다. 음식점 종업원으로 일하는 지니는 생일날에도 서빙을 하는데 여러 가지 일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의붓딸이 “마흔 생일이 자주 와요? 기념비적인 날이잖아요.”라며 생일 선물을 내밀자 지니가 말했다. “(기념비적이긴) 묘비나 마찬가지지!”
마흔 살 그녀는 행복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외도로 사랑하던 전 남편을 떠나보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학교 빼먹고 맨날 불을 지르고 다녀서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지니는 재혼한 현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 지니에겐 내연남이 있다. 지니는 내연남과 결혼하고 싶어하지만 내연남은 그럴 생각이 없다. 그녀는 젊은 시절에 배우였으나 지금은 웨이트리스다. 그녀는 자신의 배우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녀는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한다. 이삼십 대였다면 뭔가 다시 시작해볼 마음을 좀더 쉽게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마흔 살이다. 더 이상 어리지 않다. 그리고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른다.
지니는 내연남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다. 그게 잘못이었다. 마흔 살의 여자가 인생이 잘 안 풀린다고 해서 남자에게 모든 희망을 거는 것은 위험하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을 꿈꾸는 일이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안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남자에게 희망을 거는 그런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리라.
마흔 살. 아직 매력 있다. 그리고 아직은 아름답다. 하지만 예전에 빛났던 그 아름다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사그라들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진화해야 한다. 내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 또한 힘겹게 마흔 고개를 넘고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다음Daum 지식토스트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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