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리수거'의 탄생
나는 회사를 입사 후 누구나 그러하듯 몇몇 남자 동기들과 친해졌다. 신기한 것은 우리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평소 주말을 보내는 방식도 달랐고, 이성관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남자들은 가끔 그냥 동기나 동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술 한잔을 기울이게 되고 그렇게 정이 든다. 회사 내 자칭 '분리수거'라고 불리던 우리의 모임도 그렇게 허무하게 탄생했다.
그것은 어느 평일 아침이었다. 사내 메신저를 통해 '체르노빌'에게 연락이 왔다. 가끔 사람들은 내게 이 친구의 별명이 왜 '체르노빌'인지 궁금해한다. '분리수거'의 멤버들은 '이보다 더 쓰레기 같은 남자는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고심을 했었다. 그는 극단적인 외모지상주의자였으며, 거친 입담을 소유하고 있었다. 주말마다 나이트에 가는 것을 즐겼고, 한결같이 나이가 어린 여성을 좋아했다. 현대 여성의 그 누구라도 '체르노빌'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비난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척박한 인간'이라는 뜻으로 '체르노빌'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는 가끔 그렇게 표현했다. 조그만 방안에 히틀러와 빈 라덴 그리고' 체르노빌'이 있고 현대 여성의 누구라도 총알 1발이 장전된 총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는 무조건 '체르노빌'을 쏠 것이라고 말이다. 그만큼 그는 답이 없는 영혼이었다.
"최사원, 미팅하자."
"미팅?"
나는 평생 미팅을 한 적이 없었다. 나의 대학시절은 동문회 선배들의 군대 같은 문화에 모든 것이 망해버린 체 끝났다. 그래서일까? 나는 미팅에 대한 판타지를 가진 철없는 인간이었다. 그렇게 '체르노빌'은 4대 4 미팅을 주선했다. 역시나 상대 주선자는 '체르노빌'이 나이트에서 만났던 한 여성이었다. 그는 묻지도 않은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얼마 전에 만난 애인데, 카톡을 보니까 친구들이 엄청 이쁘더라고. 그래서 내가 너희들을 위해 기획했다."
실제로 회사 기획팀에 근무하는 녀석이었다. 이럴 때 그의 보직은 회사 실적과는 반대로 빛을 발휘했다. 그렇게 '분리수거' 멤버들은 가벼운 습자지처럼 미팅을 승낙하였다. 멤버 중 가장 이번 미팅에 대해 기대를 품은 것은 외로웠던 '마약왕'이었다.
사람들은 또 궁금해한다. 왜 이 친구의 별명이 '마약왕'인지. 그것은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약왕'은 키가 190cm에 100kg가 넘는 거구이다. 인상은 한창 씨름을 하던 강호동을 닮았다. 요즘 밥 한 끼를 위해 온갖 깨방정을 떠는 강호동을 상상하면 안 된다. 그런 '마약왕'이 주말에 슬리퍼를 신고 라면을 가러 가는 길이었다. 정복을 입고 길에 서있던 경찰관은 '마약왕'을 불렀다.
"실례합니다. 근처에 형사사건이 발생해서 신원조회 좀 하겠습니다."
그렇게 '마약왕'의 불심건문은 시작되었다. 유신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던 '마약왕'은 갑작스러운 검문에 당황하며 지갑 속의 민증을 꺼내 경찰관에게 건넸다. '마약왕'은 문득 화가 났다. 내가 생긴 것이 이래서 검문을 당하는 것인가 하는 분노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핸드폰으로 '불광동 형사사건' 등을 검색하며 뉴스를 살펴보았지만, 무뚝뚝한 네이버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경찰에게 되려 심문을 시작했다.
"아니 주변에 사건이 있다고 검색이 안되는데 무슨 사건인가요?"
경찰관은 다소 당황한 듯 민증을 돌려주며 말했다.
"아직은 기밀사항입니다. 생일이 제 아들과 같으시군요."
'마약왕'은 황당한 이 대화에 기가 찼다. 그렇게 평생 건실하게 살아온 '마약왕'의 생애가 확인되었는지 경찰관은 이민 가듯 그 자리를 급히 떠났다. 순진한 '마약왕'은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하며 분함을 표출했고, 정이 많은 동기들은 그에게 '마약왕'이라는 별명을 하사했다.
여기까지 글을 읽으신 분들은 '분리수거' 4인방 중 세 명을 알게 되었다. '체르노빌' '마약왕', '글쓴이'. 그리고 이제 남은 한 명은 어떤 화상일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는 앞서 소개된 친구들 이상으로 인물인 녀석이었다.
'비둘기'는 배우 이선균을 닮은 외모를 가졌다. 왠지 모르게 지적임이 묻어나는 외모를 보유한 '비둘기'는 언제나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여자 동기들은 첫인상이 가장 좋았던 남자 동기를 뽑을 때 , 90% 이상 '비둘기'에게 표를 던졌다. 문제는 '첫인상과 가장 달랐던 남자 동기'에서도 1위를 했다는 점이다. 그는 외모와 다르게 식탐이 엄청났다. 교육 중에 누가 과자라도 뜯으면 어느새 옆자리로 와 과자를 뺏어 먹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먹을 것이 생기면 언제든 구구구 하며 날아온다는 느낌으로 그에게 '비둘기'라는 별명을 하사했다. '비둘기'는 심각한 연애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깊은 관계를 잘 갖지 못했고, 오래 사귄 인연도 없었다. 그것이 특유의 식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3주, 한 달, 10일 등 단기속성의 연애기간만을 기록하며 만남과 이별을 계속했다.
이렇게 구성된 '분리수거' 4인방은 미팅의 일자를 어느 토요일 저녁 6시로 잡았다. 그렇게 성인들의 미팅은 시작되었다. 그것은 엉망진창이었던 밤의 전주곡이었다.
당시 주말마다 출근을 하여 야근을 하던 나는 역시나 토요일에 출근을 했다. '그래도 6시 전엔 끝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는 아침부터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다들 목숨을 걸고 하던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오후 4시쯤 퇴근하던 상무님의 지시로 발생했다.
"음, 다들 주말에 고생이 많구먼. 어서들 들어가고. 아 맞다. 아까 말한 내용에 신규 지점들 실적까지 반영해서 월요일 아침에 보자고. 그럼 어서들 들어가."
다시 데이터 작업을 하게 만들고 어서 들어가라는 상무님의 은혜 가득한 지시로 나는 그렇게 6시가 넘어서도 계속 회사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전화기에서는 미친 듯이 불이 났다. 평소 나의 부서 분위기를 잘 알던 동기들은 일단 세 명이서 먼저 만나고 있겠다며 내게 조속한 합류를 촉구했다. 그리고 나는 7시 반이 된 시간에 약속된 술집에 도착했다.
나는 마치 디너쇼의 본 무대를 시작하는 가수처럼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분리수거' 멤버들은 시대의 귀인이 나타난 것처럼 나를 반겼고, 여성분들은 '저건 또 뭔가'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도착해서 분위기가 별로 안 좋다는 것을 직감했다. 몇몇 여성분들은 지루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고, 늘 그랬던 것처럼 '체르노빌'만 연신 떠들고 있었다. 나는 죄송한 마음에 다짜고짜 사과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회사에서 일이 좀 생겼습니다."
친절한 '체르노빌'은 구태여 한마디 보탰다.
"원래 가장 일을 못하는 친구라서 주말에도 일을 합니다. 하하하."
아무도 웃을 수 없는 드립이었다. 나는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말을 던졌다.
"제가 늦게 왔으니 죄송한 마음에 와인 한 병 사겠습니다. 샤도네이 한 병드시죠."
주중에 회사에서 실시했던 와인 강의에서 들었던 단어를 나는 그냥 뱉어냈다. 나는 평소 와인을 잘 모르던 녀석이었다. 어린 회사원의 허세가 있었던 것 같다. 다소 진지한 '마약왕'은 내게 되물었다.
"너 샤도네이가 뭔지는 알고 그러는 거냐?"
나는 당황하여 대답했다.
"와인 아냐?"
나의 솔직했던 당황함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약간의 웃음으로 분위기를 되찾게 되었다. 소가 뒷걸음치듯 업적을 남긴 나는 '분리수거' 멤버들의 신뢰 가득한 표정을 느끼며 본격적으로 미팅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게 꿈꾸던 생애 첫 미팅은 시작되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