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근화, 여러 번 고양이를 쓰다
사진 속 아이들, 참 예쁘죠.
저 사이에 껴서 한없이 쓰담쓰담 하고 싶도록 센치해지는 깊은 밤입니다.
(제 옆에 와인이..있네요..쿨럭;)
잠시 매거진 소개를 할게요.
<홀연히 오롯이 고양이> 매거진은 '고양이'를 담은 글귀나 시를 담으려고 해요.
녀석들의 포근한 털과, 순수한 심장, 조용히 진행되는 생(生)이
한 편의 시, 한 줄 글귀가 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저에게 시와 고양이는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존재들입니다.
마음은 어떻게 쓰이는 걸까요?
마음은 행동이나 눈빛, 태도로 쓰이기도 하고요
또 글자로 쓰이기도 합니다.
시(詩)만큼 마음을 글자로 쓰기 좋은 도구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센치한 시간-
냥덕심이 아지랑이처럼 스물스물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읽으면 좋을 시집, 아니 시인을 소개합니다.
2004년 문단에 등장한 이 시인은
고양이를 꾸준히 자신의 시로 끌어올립니다.
이근화 시인을 소개합니다.
작품에 유난히 고양이를 많이 등장시키기에
이분은 분명 집사님이야. 냥님들의 노비이길 자처한 사람일 거야~
라고 생각했는데, 한 인터뷰에서 밝히셨더군요. 고양이는 집에 없다고.
(무려 네 아이의 엄마라고 하시니,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실 듯)
어릴 때 살던 동네에 길고양이들이 많았는데,
낮에 길게 드러누워 자는 모습이나, 혼자 놀기 좋아하는 모습, 그리고 담장에 서서 가만히 사람들을 보는 모습을 보면서 고양이만의 도도한 매력에 끌리셨다고 합니다.
딱히 시인 본인과 동일시하는 건 아니고, 비슷한 면이 많다고 하시네요.
처음 이근화 시인을 알게 된 건 도서관이었습니다.
대출하려고 줄을 서있다가 반납된 도서가 쌓여 있는 곳으로 무심코 시선이 갔습니다.
새하얀 커버에 샛노란 포인트가 예쁜 양장본 하나가 가만히 누워 있더군요.
어려울 듯, 안 어려울 듯 아리송한 제목이었습니다.
『칸트의 동물원』
막 봄이 시작할 무렵이었고,
환기를 위해 열어둔 유리창 틈새로 바람이 들어와 열람실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제 얼굴을, 머리칼을, 불규칙한 주기로 훑고 지나갔습니다.
제멋대로 왔다 가는 봄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충동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 시를 읽어보자, 고 말이죠.
대출할 도서 위에 『칸트의 동물원』을 얹었습니다.
어째서 제 눈엔 자꾸만 고양이가 들어오는 걸까요.
이렇게 우연히 집은 시집의 표제작에서 저는 또 '고양이'라는 단어를 발견합니다.
3
고양이와 나는
밤의 길목에서
따라 헤매고
밤낮없이 차들은 달린다
헤드라이트는 눈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104동을 기어오르는 달과
허물어지는 쓰레기 더미
뒤돌아보면 꼬리뿐인
고양이
4
한밤의 전화벨 소리
맥주병을 거꾸로 들고 깨던 사람이
갑자기 고요해진다면
얼마나 쓸쓸해질 것인가
하늘은 얼마나 새파랗게 금 갈 것인가
남의 머리통을 부수던 사람이
제 머리통까지 부순다면
얼마나 서러워질 것인가
한밤의 전화벨 소리
5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돈다면
그건 사라지는 놀이지만
사람들은 언제라도 중간부터
시작된다
「칸트의 동물원」일부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는 습관을 가지다 보면
어느 순간 눈 앞에 나타납니다.
곧, 작지만 경이로운 무언가를 저에게 건네주고 조용히 떠납니다.
우편함에서 걸어 나오는 나쁜 소식처럼
어지럽고 어려운 고양이
독자성을 버리지 못하고 걸어가는 저 낡은 포즈
고양이는 뜻 없이 멈춰 서고
고양이는 뒤돌아본다
나는 시궁쥐의 공포 속으로
고양이의 발톱 밑으로
고양이는 부드러운 발길질을 멈추지 않고
계단의 높이
난간의 높이
담장의 높이
높이를 잃은 고양이들과
나의 데드마스크
어떤 자세로도 고양이는 추락하지 않는다
붉은 꽃잎 같은 고양이
길의 이쪽과 저쪽에서
고양이와 내가 살아가는 교묘한 방식
고양이는 나의 눈 속으로 제 발을 담그고
나는 나의 눈에 고양이를 묻는다
「멍든 자국」 전문
당장에 시인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지요.
더 읽고 찾아본 시인의 작품 중엔 여러 동물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고양이의 낮잠을 방해하지 마세요
먼 바다
등대는 아직 꺼지지 않았고
물에 잠긴 길을 아직도 걷고 있습니다
고양이의 낮잠을 방해하지 마세요
지난밤
파도 하나가 쓰러지고
꿈속 일들이 꿈 바깥으로 조용히 넘쳤습니다
고양이의 낮잠
철길 옆의 철조망
철조망에 우수수 피어난 참새떼
참새의 꿈을 방해하지 마세요
기차가 지나가고
뜨거운 기차가 한 대
차가운 기차가 한 대
현실의 그림자만 밟아주세요
젖은 발로 끝까지 서서
떨어지는 해를 지켜주세요
「고양이의 낮잠」 전문
고양이의 낮잠을 방해하지 마세요.
시인은 분명 고양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녀석들의 행동, 습성, 매력을 통째로 끌어 안고서
하나씩 자신만의 언어로
차분히 내려놓으려 한 흔적을
시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만의 느낌일 수도 있지만요. 시는 읽는 사람이 느끼고 해석하기 나름이니까요~^^;~)
이쯤 되면
시인이 고양이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시와 시인이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이죠.
반쯤 뜬 눈으로 우유팩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흔들거리며 걸어도 모든 게 반 토막으로 보이는 건 아니야
물론 남은 우유를 위해 고양이를 키우는 건 아니지만
저기 아침 창가의 이다, 햇살과 먼지 속에 아무렇게나 찢어진 고양이
나는 쉽게 이다를 잊지만
쉽게 잊혀진 이다는 창문의 높이에 익숙하고
이다는 창가의 이다
장롱 위의 이다
본질적으로 지붕인 고양이
내가 앉아 있는 나무 위에서의 식사는 즐겁지
내가 앉아 있는 나무의 나뭇가지에서는 새들이 울고 야단이지
가끔씩 나는 검은 비닐봉지에 우유팩을 넣고 흔들거리며 걷지 모든 게 반토막으로 보여도 좋아
혹은 보이다 말다 해도 나는 보았다고 생각해
「본 적 있는 영화」 전문
의미보다는 이미지가 무척 선명한 시입니다.
그녀가 길에서 만났던 어떤 고양이 이름이 이다였을 거라고 제멋대로 추측합니다.
이렇게 또
위안을 주는 한 명의 시인과
몇 마리의 고양이와
몇 권의 시집을
만나고 왔습니다.
시인은 지금, 어떤 냥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아 - 저는 여전히 냥덕냥덕 센치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와인잔이 또 비었네요)
조금 더 읽기
세상에서 가장 큰 여자는
더 큰 여자가 태어날 때까지
외롭게 외롭게
끝까지 자라겠지
코끝에 있는 점을 보기 위해
천천히 두 눈을 모으면
당신은 지붕 위를 걷는 기분이 들겠지만
내가 모를까
쓸모없이 자라는 점은 바람의 먹이
오 층 칠 층 구 층 높이로 건물들이 자라고
더 이상 오를 필요가 없을 때까지
봄과 여름은
가을과 겨울은 이와 같을까
발목과 무릎과 허벅지는
치마의 길이 바지의 끝단
노란 머리 빨간 머리를 만들었지만
바람의 탓 이마의 탓
코끝의 방향은
걸음의 속도는 유행일 뿐
당신이 느리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당신의 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쿵쿵쿵 바람의 발소리
황금빛 먼지의 냄새
「고양이 불필요」 전문
■ <홀연히 오롯이 고양이> Brunch 매거진에서는
고양이를 모티프로 한 시나 소설 등 글로 쓰인 작품을 골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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