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IRST
가 보지 않은 무덤이 있어요. 상상 속 그곳은 파도 부서지는 절벽 위입니다. 초여름이지만 바람이 차요. 다 자란 아이는 무덤 앞에서 울고 있어요. 그녀가 아직 아이였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예요. 지난 세월이 무덤과 그녀 사이에 괴어올라요. 아무리 애써도 가장 어릴 적 건너온 바다를 되짚을 수 없어요. 아이는 어른이 돼서도 자꾸만 파도 곁으로 갑니다. 그리워할 곳 몰라도 끝없이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그가 곁에 있어 다행이에요. 둘은 어제 결혼했어요. 그가 흔들리는 그녀의 어깨를 안아요.
저에게 덴마크는 이런 기억입니다. 이미지라고 해야 맞겠군요. 뭘 해도 세련되고 멋진 북유럽에서 열흘이나 있었는데, 절벽 위 무덤부터 떠올리네요. 아주 다른 소릴 하는 건 아니에요. 덴마크는 날씨가 음침하기로 유명하죠. 겨울엔 비가 많고 해도 빨리 져요. 반년이나 그렇게 살면 얼마나 우울하겠어요. 사람들은 백야가 이어지는여름을 손꼽아 기다려요. 그때 모든 에너지를 발산한다 해도 과장은 아닐 거예요. 덴마크 친구들을 만난 건 치기 어렸을 때였어요. 교환학생 명목으로 오리건 주 한 귀퉁이에 모여 싸구려 술을 마시고 늦게까지 잠자던 그런 시절이요. 자기네 사는 곳은 지루하고 재미없다며 술을 물처럼 마시던 녀석들. 복지 좋은 나라에서는 학생들 통장에 다달이 통 크게 용돈을 쏘았죠. 술값 걱정은 없어 보였어요.
지구별 어딘가에서 파티를 즐겼던 우리였건만, 시간은 흘러 십 년이 되었네요. M의 청첩장이 도착했을 무렵 저는 아기 엄마가 되었고요. 북유럽 열풍이 가득한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 미세먼지와 '맘충' 피해의식에 조금 찌들은 채로요. 무지개 말고 무채색을, 치렁치렁 장식보단 심플함을. 북유럽 인테리어, 북유럽 식사, 북유럽 스타일. 그런 게 탐났어요. 북유럽이 뭐길래 나도 간다며, 돌쟁이 아기를 떠밀듯 맡기고 비행기에 올라탔네요.
스마트폰 지도에 깜빡이는 GPS 좌표를 따라 작은 아파트까지 찾아갔습니다. 초인종마다 이름이 붙어있었어요. M을 찾아냈습니다. 새벽녘 일어나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갈아타고, 기차를 타고 걸어와 마주한 친구의 이름은 어쩐지 생경했어요. 현관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미세한 떨림을 느꼈죠. 친구의 목소리가 오랜만이기도 했지만, 현관에 붙어있던 M의 이름이요. 그게 마치 이정표 같았거든요. 결국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기어이 이 마음을 어떻게든 해야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어요.
M의 첫 이름을 알게 된 건 겨울방학 때였어요.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섬에서였죠. 저는 어디라도 따뜻한 곳을 원했고, M은 언제나 바다로 가고 싶어 했어요. 해변에 조악한 대나무 돗자리를 깔고 누워, 살갗을 태우거나 사진을 찍는 게 일과의 전부였어요. 점심이랄 것도 없이 과자와 초콜릿만 먹으면서요. 피부에 돗자리 자국이 남도록 잠들었다 깨도 해가 지지 않았어요. 여행 중반쯤이었을 거예요. 버스는 오질 않고 택시 탈 돈도 없는데, 배가 무척 고팠어요. 무작정 마땅한 식당이 나올 때까지 걸었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내뱉고 말았습니다.
근데 너 원래 이름이 뭐야?
아이는 태어난 지 백일 무렵 덴마크로 입양됐어요. 그녀의 출생이나 우리의 뿌리 같은 건 이야기한 적 없었어요. 일종의 방정식 같은 거였죠. '너와 내가 태어난 나라는 같다'+'그러나 자라온 환경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지금 잘살고 있으니 구구절절 상처는 건드리지 말자'의 정답이랄까요. 오히려 사람들이 너희 닮았다고 할 때, M은 대니쉬(Danish)라고 강한 엑센트로 말하는 걸 즐겼죠. 파라솔도 없이 뜨거운 볕 아래서 공복으로 있었더니, 금기됐던 질문이 부걱 솟아오른 것 같아요.
NARI YOON
M은 조금 쑥스러워하는 듯한 발음으로 대답했어요. 그 모습도 의외였지만, 이름 때문에 더 놀랐죠. '윤나리', 아까운 이름이잖아요. 자꾸만 불러줘야 할 것 같은, 부르는 것만으로도 빛이 되는 이름이요. M이 정말로 궁금했다는 듯 물었어요.
"부산에서 태어났어. 부산이 어딘지 알아?"
"응, 알지.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인걸."
질문을 꺼낸 건 저였지만 M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그랬구나,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주억이기만 했죠. 그녀가 입양된 가정은 평범한 중산층이었어요. M이 열 살 무렵, 그녀를 입양해 키우던 엄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아빠는 재혼했고요. 그 이야기를 몰랐더라면 어쩌면 덴마크에 가지 않았을지 몰라요. 언젠가 그곳에 다녀와야 채워질 것 같은 무연한 마음이 들었거든요. 허기 같은 거요. 여행 막바지쯤 M에게 중얼거렸던 말이 떠올라요.
네 이름 있잖아, 윤나리. 그거 참 예쁜 이름이다. 그러니까 빛난다, 반짝거린다, 뭐 그런 뜻이야. 너를 낳은 엄마는 네게 그런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야. 너무 미워하지 마.
술 취해 하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모조리 후회스러워요. 제가 M의 이름이 붙은 초인종을 누르며 느꼈던 그 떨림은, 일종의 최초 목격자 같은 거였어요. 꼭 전해야 할 말을 품고, 한국으로 돌아갈 의무라도 지닌 양 말이죠.
'아무것도 모른 채 떠나온 작고 파닥거리던 몸이 자라고 자라, 코펜하겐의 한 아파트에 잘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바다 옆에서 결혼도 하고요. 제가 직접 다녀왔어요. 파도가 잔잔하게 일렁이는 좋은 날이었어요.'
덴마크에서 결혼은, 며칠 동안 이어지는 파티 같은 거라고 해요. 수개월 전부터 초대장을 보내고 참석 여부를 답해야 해요. 여기에는 결혼식 전과 후에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는지, 본식에만 올 건지도 적고요. 숙박 여부, 음식 알레르기 등 세세한 사항까지도요. 축의금은 없고 각자 선물을 준비하면 됐어요. 신랑·신부 측에서 자신들이 필요한 물건 리스트를 작성해 보내주면, 하객들이 골라 준비하는 형식이죠. 선물이 겹치지 않도록 매니저 역할을 하는 친구도 따로 두었더라고요. 합리적이고 의미 있는 시스템이라 생각했어요.
결혼을 앞둔 M의 집에선 가벼운 칵테일 파티가 열렸어요. 천장이 높고 코펜하겐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꼭대기였죠. 피아노와 기타, 두꺼운 전공 서적과 여행 책자들이 창가 쪽 벽을 채우고 있었고. 가구와 조명은 한눈에 봐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요. 6인용 헤이(HAY) 식탁 뒤로는 비슷한 질감과 느낌의 그림이 쭉 걸려있었죠. 지붕으로 난 비스듬한 창 밑에는 벽면만큼 커다란 작품이 시선을 압도했어요. 그것들은 누가 봐도 한 사람 손에서 나온 것이었고요. 집 전체가 마치 작은 갤러리 같았죠. 제가 묻자 <Mother and Child> 시리즈라고 M이 나직한 목소리로 알려줬어요. 모두 그래픽 아티스트였던 M의 할머니의 작품이었죠. 종이와 신문을 오려 붙인 콜라주 속에는 엄마와 아이가 들어가 있어요. 아기를 안은 엄마, 엄마를 바라보는 아기, 엎드려 고개를 들고 있는 아이, 엄마 품에서 잠든 어린 M, 서로를 껴안은 모녀, 그들을 감싸고 있는 붉은 꽃과 푸른 잎사귀들. 작품은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담고 있지만, 더 나아가지 못해요. M의 엄마이자 작가의 며느리가 세상을 떠난 뒤, 모녀의 시계는 멈춰버렸거든요.
다시 벽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선 제가 알지 못했던 각도로 마음이 파였어요. 콜라주 속에서 가장 작은 조각이 제게 들어섰습니다. 아이의 눈, 단 하나의 눈빛이요. 엄마를 바라보는 눈, 엄마를 잃은 눈, 끝없이 그리워하는 눈. 작품들로 둘러싸인 벽 앞에 서 있는 M의 모습은, 제 속에 날 서있던 어떤 모서리를 굴곡지게 했어요. M은 매일 이 그림을 등 뒤에 둔 채 밥을 먹고, 여행을 계획하고, 창밖을 바라볼 테지요. 구석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몇 마디 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이 그제야 조금 이해가 갔습니다. 틈만 나면 덴마크를 떠나 오래 여행했던 이유도 알 것 같았어요. 여름인데도 코펜하겐은 쌀쌀했어요. 열어둔 창으로 종종 바람이 들이쳤지만, 벽에 걸린 그림들은 단단히 고정돼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고인 물 같은 십 년 전 추억 얘기가 공기 속을 떠다녔습니다. 그날 우리는 예전만큼 술을 이기지 못하고 마음도 이기지 못한 채 헤어졌어요. 밤은 맑고 어두웠습니다.
결혼식은 호숫가의 한 교회에서 치러졌어요. 식은 예에 따라 경건한 분위기였고, 하객들은 함께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죠. 하얀 드레스를 입은 M이 교회로 들어섰고, 그녀의 손이 신랑의 손을 맞잡을 땐 하객 몇몇이 눈물을 훔치기도 했어요.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졌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여러 색의 빛이 새어 들어왔죠. 식을 마친 뒤에는 끝 간 데 없는 들판을 달려 티스빌데(Tisvilde)의 작은 호텔로 갔어요. 덴마크 전통대로 딸기를 듬뿍 얹은 케이크를 먹으며 축배를 들었고, 파티가 시작됐죠. 전채와 메인, 디저트로 이어지는 식사를 하며 가족과 친구들이 축사를 낭독했어요. 전혀 모르는 언어였지만 지루하지 않았어요. 단어와 단어 사이, 새어 나오는 숨소리와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게 많았습니다.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득한 추억을 말하면, M의 작은 눈이 빛나거나 흔들리기도 했고요.
음악과 웃음,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어우러져 날은 짙어졌습니다. 새벽 동이 트도록 파티는 이어졌고, 몇몇은 바다로 뛰어들기도 했어요. 하객들이 모두 돌아간 뒤, 부부가 된 둘은 M을 입양했던 어머니 무덤으로 갔다고 해요. M은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그곳에서 많이 울었다(I cried a lot)고 이야기했어요. 영어로 들은 그 말을 왜 '펑펑 울었어'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 함박눈처럼 펑펑이요. 한참 동안 몰려든 먹구름이 마침내 새하얗고 커다란 눈이 되어 땅 위에 가지런히 자리 잡듯이 말이에요. 그 말을 하던 M의 표정을 기억할 때면 심장이 맥락 없이 내려앉습니다.
덴마크엔 차보다 자전거가 많아요. 신선한 해산물과 갓 구운 페이스트리로 가득한 시장이 연중 문을 열지요. 볕이 있다면 어디서든 앉거나 누울 수 있어요. 이곳엔 무엇이든 세련되게 꾸밀 줄 아는 사람들이 살아요. 집마다 꽃을 가꾸고, 아이들은 정교하게 레고를 만들죠. 의자와 바퀴만으로도 지루하지 않은 박물관을 만들기도 해요. 이들은 바로크 양식 궁전에 사는 황실을 지키는 동시에, 그라피티와 마약 냄새로 가득한 거리를 유원지처럼 드나들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고 소리칠 수 있도록 보장받습니다. 사람들은 400년 된 도서관에서 아직도 책을 읽거나 데이트를 해요. 가족들은 이른 저녁부터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남자들끼리도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광장에서 라떼를 마시고요. 집에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알록달록한 니트 양말을 신고 잡담을 나누는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꽃집과 카페, 양말가게는 망할 리 없어요. 누구라도 꽃과 나무, 신선한 공기를 친구 삼아 제철 음식으로 삼시 세끼를 먹을 수 있지요. 밥 먹을 땐 아무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않아요. 소소한 수다가 끊이지 않죠. 또 이들처럼 유기농과 홀푸드에 민감한 민족은 본 적이 없네요. 식당들은 그 민감함에 친절합니다. 물론 바이킹의 나라답게 고기를 튀기고 감자를 버터에 통째로 구워내는 곳도 있어요. 기다란 소시지를 넣은 핫도그(pølser, 팰서)와 생선과 채소를 올린 오픈 샌드위치(smørrebrød, 스뫼레브뢰)는 덴마크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음식이에요. 우리는 그런 것들을 먹으러 다니며 사진을 찍었어요. 이건 M과 여행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의식과도 같아요. M은 오래전부터 음식 사진 찍는 걸 좋아했거든요.
코펜하겐에 머무는 동안 매일 뉘하운(Nyhavn)에 갔어요. 도시를 가로지르는 넓고 기다란 운하는 밤늦도록 북적였죠. 자정에 가깝도록 볕이 끝을 모른 채 하늘에 머물던 여름이었어요. '휘게로움'을 즐기기에 최적의 계절이었죠. 사람들은 수구와 조깅을 즐겼고, 맥주와 아이스크림에는 언제나 관대했어요. 어느 날은 작은 배를 빌려 바다 앞까지 가기도 했어요. 우리는 배 위에서 비스킷에 치즈를 올려 먹으며 칼스버그와 투보그 맥주를 마셨어요.
여름에 만난 M은 어느 때보다 밝은 모습이었어요. 아이는 잘 자랐고, 좋은 짝을 만났어요. 갈 곳 없는 제 측은함을 헤프게 여기진 말아주세요. 그리움은 아직도 바다 어딘가를 맴돌고 있으니까요. 그 궤적은 아이처럼 자라나 이곳까지 왔네요. 계절은 벌써 겨울입니다. 눈바람 뒤집어쓰며 집에 걸어오는데 자꾸만 옛 생각이 나는 것이었어요. 여태 마음이 쓰여서요.
P.S.
M은 한국에도 왔었어요. TV에서 본 것처럼 친모를 찾거나 하진 않았고, 평범하게 여행을 했죠. 서울, 경주, 제주, DMZ에 다녀갔고, 부산에선 혼자 2박 3일 있었어요. M이 그곳에 머물렀을 때, 잠시도 해가 나지 않고 폭우만 이어졌다 해요. 꼬박 사흘을 비바람과 돌풍 속에 있다 왔을 거예요. 비 오는 부산에 있었을 M을 상상하면, 달려가 함께 우산을 쓰고 싶어져요. 그때 바쁜 핑계는 다 내려놓고 함께 갔더라면 하는 후회를 종종 해요. 같이 밀면도 먹고, 영화도 보고, 광안리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서 소주잔도 기울이고 말이죠. 부산에 갈 때마다 유심히 사람들을 보고 다닌 기억이 나요. M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마주치면, 당신 혹시 윤나리를 알고 있을까 속으로 물으면서요. M은 혼자서 부산의 수많은 골목과 언덕이 이어진 길들을 보고 걸었겠죠. 거친 파도와 사투리 소리도 들었을 테고요. 그녀는 어떤 기시감 같은 거라도 느꼈을까요? 그때가 장마철이었네요.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돌풍이었고, 다 지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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