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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인희 Oct 14. 2020

먹천재 놀천재의 역사

이 또한 재능이라면 뽐내 보겠어요


전화통화를 싫어한다


첫 남자 친구에게 결별을 선언한 뒤였다. 스토킹을 호되게 당했고, 그때 전화로 받은 협박이 트라우마로 남았다.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급한 용무가 아니면 전화보다는 카톡으로 먼저 안부를 묻는다. 발신자 정보 표시 서비스가 없을 땐 전화벨이 울리면 불안에 떨었고, 서비스가 상용화되어 상대가 안전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한 후에도 그랬다. 벨 소리가 울리면 일단 가슴이 두근대고, 도망가고 싶은 기분부터 든다. 또 전화라는 게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수다의 목적이 가장 큰데, 그걸 별로 즐기지도 않는다. 내 이야기를 말로 하는 것에 늘 서툴다. 성의 있게 듣는 건 잘하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잘 들어주니 상대방 얘기는 길어진다. 정말 마음 편한 사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오래 듣고 나면 기가 쏙 빠진다.


제주에 살고 나서는 좀 바뀌었다. 웬만하면 전화는 재깍재깍 받는다. 대부분 급한 용무이기 때문이다. 일단 육지에 사는 이들과 겹치는 일이 없을뿐더러, 이야깃거리도 자연스레 줄었다. 제주엔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거의 없어 전화에서 해방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면서 아예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선을 긋기도 한다. 이런 유별난 점을 아무렇지 않은 척 떠들어 버리는 것이다. ‘저는 전화통화 싫어해요. 첫 남친이 전화로 스토킹을 했거든요. 그 뒤로 무서워요.’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저렇게 떠들어 버리면 상대는 ‘이 사람 좀 특이점이 있구나’ 생각할지라도 상황은 간결하게 종료다.




내게 걸려오는 급한 용무란. 먹고 싶은 게 있는데 어디가 맛있을지, 지금 애월인데 5살 아이와 갈 만한 곳이 어디인지, 갑자기 비가 오는데 어디로 가면 좋을지, 부모님이 놀러 오시는데 추천할 만한 곳이 있는지 등의 질문이다. 그런 거라면 기껍다. 신이 나서 머리 굴리며 떠들어도 기가 빨리지 않는다.


라무 엄마는 제주 백과사전이야!


언젠가 아이 친구 엄마가 나를 그렇게 호명해 주었다. 어떻게 매번 바로 답을 할 수 있으며, 제주 동서남북에 모르는 곳이 있긴 하냐며. ‘어떻게 이걸 모르지? 설마 이걸 몰라 묻는 거야?’하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미식가(家) 도련님의 첫째 딸     


아빠는 무지하게 잘 나가던 집 막내아들이었다. 불같은 성격을 이길 자 없었다는 그의 아버지(나의 할아버지)는 막내아들에게만은 살가웠다. 아빠가 아무것도 모르는 귀여운 도련님이던 시절, 할아버지는 기사를 대동해 서울에 이름난 음식점은 다 데리고 다녔다 하는데. 고모들 말로는 집에선 성질만 부리던 양반이 꼭 막내아들만 데리고 짜장면, 탕수육, 곰탕, 판모밀 같은 걸 먹으며 즐거워했다고. 그렇게 부잣집에 살아도 먹기 힘든 걸 쟤는 실컷 먹고 자랐다며. 기사 딸린 지프를 타고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녔다고, 중노인이 되어서도 투정하며 말한다. 귀티 나는 도련님은 그렇게 미(味)적 감각을 갈고닦았고, 반짝이는 보석처럼 늘 지니고 살게 된다. 훗날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이 그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그 귀한 짜장과 탕수육 따위를 먹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사업은 망했고,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살아 계셨다면, 내 출간 소식에 마을 입구에 플랑카드를 걸지 않았을까. 더불어 사업까지 쭉 번창했다면, 주말마다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 VIP 예약 명단에 내 이름을 걸어주시지 않았을까. <팔도밥상>, <세계테마기행> 이런 데에 호스트도 해보고 말이다. 상상은 자유.


도련님은 자신을 귀히 여기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흩어져 졸지에 외롭고 가난해졌다. 할머니와 형제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애매한 나이인 그만 한국에 남아 상업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월급 따박따박 잘 들어오는 은행에 취직했고, 결혼해 아들딸을 하나씩 낳았으며, 비교적 성공적으로 희망퇴직을 했다. 이로써 부유한 사업가의 후계자는 되지 못했지만, 이 시대 평범한 베이비부머 세대의 테두리에 안착했다.


우리 집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외식을 했는데, 당시 강북 변두리 동네에서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늘 무언가를 먹었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다. 너무 배가 고프면 많이 먹지 못하니 적당한 허기가 찾아오는 때를 노렸고, 찾아간 식당이 맛이 없으면 뭔가 불편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빠는 평생 이어온 외식 경험을 토대로, 품에 쥐고 있던 보이지 않는 유산을 물려줄 사람을 자연스럽게 찾았다. 그의 미(味)적 감각을 가장 많이 닮은 첫째  딸, 나다. 막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엄마, 오늘은 잡채가 먹고 싶어.’, ‘오늘은 동그랑땡 해줘.’ 하며 매번 먹고 싶은 걸 달리 주문했다는 나는 떡잎부터 남달랐다. 그는 식당을 고르는 법, 메뉴를 고르게 선택하는 ‘유도리’, 음식과 음식의 합 따위를 틈 날 때마다 내게 전수했다.          




외식의 추억     


미국에서 갓 들어왔다는 피자헛 강북 매장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자신만 빼고 식구 모두 이민을 가버린 미국이란 나라가 궁금했던 걸까. 세 살 먹은 나와 옹알이도 못 하는 동생을 데리고서 아빠는 외식을 감행했다. 빨간 테이블과 지붕 달린 샐러드 바, 유리 칸막이로 나뉜 테이블. 그곳이 바로 미국이었으리라. 생전 처음 접한 피자 맛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몇 입 먹지도 않았는데 내가 빨간 테이블 보와 유리 칸막이에 토사물을 잔뜩 뿜어버린 탓에 도망치듯 나왔다고. 엄마는 아직도 그때 얘기를 하면 ‘어쩔 줄 모르는 아기 엄마’ 표정이 되어 버린다.   


일요일 아침이면 공복에 어딘가로 실려갔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양평이었나 곤지암이었나. 아무것도 없는 국도변 상가에서 해장국을 먹으며 이 집 깍두기만큼 잘 어울리는 건 없다며 목청 높여 칭찬했다. 춘천과 평창에는 우리 집 식구를 알아보는 막국수와 오삼불고기 집이 있었다. 을지로 어느 골목에 있는 문이 좁은 식당은 방 마다 다락이 있는 소고기 구이집이었다. 거기서 아빠가 고기 굽는 아주머니에게 팁을 쥐여주는 모습이 왜 그렇게 야릇했던지. 단양호 근처 산골 마을엔 뜬금없이 횟집이 하나 있었는데, 주문도 따로 받지 않고 앉은 사람 수대로 만둣국을 내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만둣국을 만들어내는 횟집 주인의 자부심을 엿봤다.


생전 처음인 동네에서 아빠의 구미에 당기는 음식점을 찾아 돌고 또 돌다가 해가 저물기도 했다. 유튜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그때, 나와 동생은 뒷자리에 앉아 제발 제대로 된 식당이 나오길 바라며 인내심을 길렀다. 어느 날은 갈비를 실컷 먹고 시킨 후식 냉면이 ‘그지 같다’며, 그 자리에서 젓가락을 내려놓고 냉면 맛집을 찾아야 했다. 평범한 은행원인 아빠에게 물려받은 유전자가 비범하지 않음을 확인했던 날이었다. 내가 한없이 무뚝뚝한 고딩이 되어버린 어느 날엔 얼큰히 술에 취해 들어온 그가 방문을 두드렸다. 대학에 합격하면 역 앞 굴다리 밑에 있는 한치 횟집에 가서 함께 소주를 마시자고.        



이제는 뽐낼 수 있다     


그와 나는 단둘이 소주를 마실 만한 사이가 되진 못했다. 늘 서로의 입맛과 오늘의 메뉴, 새로운 맛집 탐방으로 가득한 대화 소재가 떨어지면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서로의 감정과 내면의 변화를 알아내는 건 그와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을 듯 어려운 일이었다. 무궁무진한 세상의 맛 좋은 음식들로 배를 채우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허전함을 채웠다. 한쪽에서의 결핍은 반대쪽에서의 완전함을 가져왔다.


지금부턴 일방적인 ‘엄마 피셜’

아빠는 할아버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지만, 성질머리가 조금 있는 편인데, 그건 배가 고플 때 특히 더티해졌다고. 엄마, 나, 동생은 그가 지나치게 배고프기 전에 나갈 수 있도록 빠르게 외출 준비를 마쳐야 했다. 그가 원하는 걸 먹을 수 있도록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행동해야 했다. 맛집 리뷰나 평점 따위는 없었기에 아빠의 컨디션에 따라 맛집을 찾아야 했는데, 그의 심기가 불편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의 촉은 놀랍게도 열에 여덟은 성공이었다. 가게의 위치, 손님의 분포, 간판의 낡음 정도, 주인의 행동과 표정, 메뉴의 구성 등이 통계치에 들어갔다. 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는 기민하고 섬세하게 그 촉을 복사해 붙여 넣었다. 그가 불안정할 때는 내가 나서서 맛집을 찾아내 그를 만족시켰고, 크게 칭찬을 받았다. 이런 건 훗날 나와 아빠를 연결해 주는 가장 커다란 연대감 같은 게 되었다. 공복에 날카로워지는 유전자는 다섯 살이 된 내 아들에게까지 전해져 내 손가방엔 늘 작은 뷔페가 차려진다. 아이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다양한 종류의 먹거리를 늘 준비해 둔다. 그게 육아의 결정적 비책이랄까.


맛있는 음식을 찾으려면 한 곳에 머무는 것으로는 절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이 넓은 세상에 맛있는 곳은 무궁무진하니 늘 새로운 곳에 가야 했고, 남들이 모르는 맛집은 모험가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우린 하늘색 프레스토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그 차가 퍼져서 소나타 2에서 LF소나타로 바뀔 때까지 우리만의 여행 지도를 만들었다. 내비게이션이 나오기 전까진 전국 지도를 펼쳐 길을 찾아야 했다. 아빠는 차가 막히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기가 막히게 지름길을 찾아냈고, 언젠가부턴 길눈이 좋은 나를 보조석에 앉혀두고 지도를 읽게 했다. 길눈이 어두운 엄마와 남동생은 뒷자리에서 수다를 떨며 지루하지 않게 해 주거나, 그것도 지루해지면 잘도 잠을 잤다.


   

미식가 도련님의 큰 딸은 시대를 잘 타고난 축복을 물려받았다. 5천 원짜리 티셔츠 하나 사려면 쩔쩔맸지만, 맛있는 식당이라면 얼마든지 추가로 시켜도 눈치 보지 않았다. 배낭여행, 해외 인턴십같이 외벌이 월급쟁이 가장에게 부담되었을 게 분명한 요구도 흔쾌히 승낙받을 수 있었다. 마침내 서른 살엔 여행 에세이를 출간했고, 곧이어 로컬 맛집과 남들 가지 않는 여행 코스로 승부하는 ‘디테일 쩌는’ 가이드북까지 내어 이 집안의 천재성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그래 봤자 작업하는 카페에서 커피 사 마실 돈이라도 벌면 ‘땡큐’인 상황이지만. 이걸로 소득을 창출한 이 집안 첫 번째 인물이니 기뻐하며 실컷 뽐내기로 한다.


짜증날 정도로 겸손한 평소 내 모습을 아는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 일이겠지만. 이제부턴 이런 사람으로 살아 보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든다.



송인희의 매거진을 소개합니다.


<내가 제주에 사는 여행작가라니> 안물안궁 여행작가 일상잡다사 끄적끄적.

https://brunch.co.kr/magazine/jejutripadvisor


 <섬에 살다 보니 생각만 많아져요> 제주에 살며 솟아오르는 생각을 주섬주섬.

https://brunch.co.kr/magazine/thoughtsto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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