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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인희 Mar 21. 2024

불길한 예감

옛 이야기

정신 차리고 보니 화요일이다. 내 자궁은 수정에 성공하지 못한 설움을 온몸 구석구석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퍼붓고야 말았다. 이번엔 지지 않았다. 이겼다! 이렇게 먹고 또 먹다가 처먹으면 세포들은 그래, 노력이 가상하다며 수정되지 못하고 버려진 난소 따위, 다음 달에 또 해보지 뭐, 하며 우걱우걱 처먹음에 박수를 친다. 그래서 주말은 잘 순삭되었다. 이제 아이도 좀 컸으니 어디 갈 때 울고 떼부리고 그런 거 없어서 살 만하다. 비로소 인간과 사는 기분이다.     


언제 어디서든 뚜벅뚜벅 걷는 것처럼 글을 쓰고 싶지만, 뚜벅뚜벅을 꿈꿀 수 있는 엄마가 몇이나 될까. 종종 걷다가, 허리 굽혀 걷다가, 업다가, 안다가, 들쳐 매다가, 뛰다가, 날아갈 것처럼 뛰다가를 반복하는 게 일상이다. 그러니 밤만은, 나에게 밤만은 허락해주길 바라지만.     


자꾸만 불길한 밤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남들은 백일의 기적이니 어쩌니하며 떠들어댄 ‘통잠(성인처럼 밤에 잠들어 아침에 일어나는 것. 적어도 7시간 이상 쭉 자는 것)’은 기다리다 지쳐 포기할 때 즈음 찾아왔고, 그게 아마도 작년 봄인가 여름이었던 것 같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렇게 일 년 넘게 통잠 잘 자던, 이제는 곧 여섯 살 어린이가 되는 아이가 밤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서럽게 운다. 달랜다고 달래지면 좋으련만 안아주고 창문을 열고 눈뜨라고 꿈이라고 찬바람을 쐬어줘도 눈을 감고 운다. 짐승처럼 운다. 눈썹 사이가 일그러지고 넙죽한 코를 미간으로 올려붙을 듯 찡그리며 운다. 산짐승이 매서운 놈에게 잡아먹힐 때처럼 운다. 꺼이 꺼이, 흐엉 흐엉, 끄윽 끄윽. 그 소리를 오분 넘게 듣고 있으면 안쓰러운 마음 보다는 짜증이 밀려온다. 그러다가 다시 안쓰러운 마음으로 돌아와 더는 울음을 그치게 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아 그냥 체념하고 품에 낀 채 우는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그러노라면 이 삶은 저주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고여 나도 그만 왈칵 눈물이 고인다. 분명히 기억한다. 한가득 뱃속에 들어차 꿈틀대는 것을 부여잡고, 내가 저렇게 꺼이 꺼이 울었다. 흐엉 흐엉, 괜히 아이를 가지려 했다고. 끄윽 끄윽, 제발 다 꺼지라고 ㅅㅂ.     


축복이라고, 우리에게 온 선물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는 내 마음이 가장 불행했던 그 시절에 수정된 세포였다. 내가 잘못한 게 맞다. 불행을 잊으려고, 불행을 지우려고 한 생명을 만들어냈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사는 걸까? 내 생에 최고의 사랑과 최악의 불행은 모두 가족에게서 나왔다. 피가 섞인 가족, 피를 섞어낸 가족, 모두 나에게 그 두 가지를 던져 주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어쩌면 나는 이 불행을 토해내고야 말기 위해 글을 쓰고 무언가 작업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모든 것은 이 사람들이 세상을 뜨거나, 혹은 내가 모든 걸 끊어내고 혼자 살 수 있을 때 가능할 수 있다. 그게 뭐가 어렵냐고? 듣고 보면 가십 거리도 되지 않을 것들을 왜 토해내지 못하냐고?     


뻔하다. 고작 그것뿐이 안 되는 인간이라서다. 그래서 글이나 끄적이고 있고, 핏줄에 얽매어 이도 저도 못하지만 있어보이는 척은 또 하면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작 글 쓰고 책 내서, 그것도 이리 굼벵이처럼 굴어서는 먹고 살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어머, ㅇㅇ 엄마 유명한 사람이었어?’

‘와, 이런 일 하시는구나. 작가예요?’

‘진짜 멋지다. 여행하고 놀러다니면서 책도 쓰고.’

‘역시, 작가님이야.’

‘나도 너처럼 살고 싶다.’

‘우리 딸 멋지네. 어서 사람들한테 선물해야겠어.’

‘우리 며느리가 참 멋지다. 대단해.’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건 고작 저런 말 따위인가.      


그래,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대단하고 멋지다. 일련의 불행들을 고스란히 아닌 척 넘기고선, 결국은 멋져보이는 삶을 살고 있구나.      


그런데 다시 아이가 우는 밤이면, 나와 눈과 코와 미간이 똑 닮은 아이가 눈을 감고 꺼이꺼이, 끄억끄억, 흐엉흐엉 짐승처럼 울다가 언제 그칠 줄 모르게 울면, 아이는 무의식 중에 나를 따라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워지는 것이다. 그게 바로 처음 세상을 만나기 전 배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을 그 절규와 울음이 아니고 뭐겠냐고. 나와 똑 닮은 성격을 가져서, 그래서 자기 잘못이 아님에도 갈등이 생길 것 같으면 일단 아니라고, 괜찮다고 잡아 떼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이 삶이 저주일 수도 있겠다고. 부디, 저 아이만은 나처럼 살지 않길 바라는 게 그게 내 가장 큰 소망일진데, 그 소박한 소망 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건 저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냐며. 누가 그랬는데, 아이는 임신 기간 중에 미워하는 사람 얼굴을 닮는다고. 그게 나와 남편이고. 나는 엄마 아빠를 닮았고, 남편은 아이의 아빠이고.     


더 최악인 건 뭐냐하면, 그건 나의 마음을 해한 사람들을 미워하지 못하는 대신 그만큼 나를 미워하는 걸 아주 정교하게 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각종 죄책감으로 잘 코딩이 되어 있는 안타까운 로봇과 같다. 하루에 잠 자지 않고 지내는 시간이 17시간이라면, 나는 그 중 10시간 정도는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기분에 휩싸여 지낸다. 그 죄책감은 확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 밥을 먹다가, 청소를 하다가, 똥을 누다가, 커피를 시키다가도, 내가 무언가를 잘못한 건 아닐까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최악이 최악인 걸 아는 것 만으로 만족하고 살아야 하는가. 나는 왜이렇게 불행한 마음을 가지고 멋진 삶이란 옷을 입은 채 살아가고 있는가. 이러다가 정말 어떻게 되어버리지 않게 자꾸만 글을 쓸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여전히 진짜 토하고 싶은 건 토하지 못한 채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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