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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인희 Jul 08. 2015

#1 고양이의 방식으로 엮은 시집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 박해람

고양이가 시(詩)를 쓰면 어떻게 될까요?

모르긴 몰라도, 엄청 오래 걸릴 겁니다. 아마 이런 모습이겠죠.


조심조심 살피고 야옹야옹 한 줄 적고

까닥까닥 수염 움직여 사위를 응시한 뒤

살랑살랑 꼬리 흔들어 한 글자씩 쓰고 지우길 수천 번,

그제야 시 한 편 완성되고,

젤리 모양 발바닥으로 도장 쿵!


시를 읽는 건 쉽지만 쓰는 일은 고역이라고 하죠.

단숨에 읽어내릴 수 있는 한 편의 시를 위해, 시인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리며 고뇌할까요.


여기, 고양이의 방식으로 시를 쓴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바람"을 "타인(他人)"이라 불렀고
"그늘"에 "정인(情人)이라는 푯말을 걸"었습니다.


생각보다 약속이 일찍 파한 날이었습니다. 그냥 집에 가기 아쉬웠죠. 거리는 걸어 다니기엔 너무 화려하거나 시끄러웠습니다. 지하철 출구 옆에 있는 서점 생각이 났습니다. 가장 덜 화려하고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시 코너였죠. 검색할 필요도 없이 감으로 시집 한 권을 집어들었습니다.


박해람 시인의『백 리를 기다리는 말』(민음사, 2015)이었습니다.


백 리?

스마트폰이 백 리는 40km 정도 된다는 답을 주었습니다.


우두커니 서서 책장을 펼쳤습니다. 왼쪽 엄지 손가락이 바로 닿은 곳은 한 시의 제목이었습니다.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


유레카!!!


망망대해를 헤매다 제대로 닻을 내린 기분이 들었죠. 잠시 가방을 내려두고 몇 편을 더 읽었습니다. 시인을 만나 고양이 이야기, 활자 이야기 잔뜩 나누고 싶은 밤이었습니다. 당장은 시집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요. (^^)

  고양이의 집필은 비스듬하게 모로 누운 방식, 꼬리에 봄볕을 찍어 쓰면 거만한 자음들이 아지랑이처럼 곤두서던 봄. 꽃들의 획수를 편집하거나 고양이 꼬리의 오타를 수정하는 일에 고용됐었지. 철자법 없이도 나뭇잎들이 돋아나고 혼자 놀고 있는 묘(猫)의 꼬리는 몸통을 자주 속였지. 아마도 서로가 외연(外延)이라고 여겼던 것 같아. 비스듬히 누워서 번역체 햇볕을 데리고 놀던 꼬리 파지마다 글자들이 웅크려 있고 엄지와 검지를 벌려 책의 분량을 정했지.

 볼펜을 열면 스프링이 대신 고양이 꼬리가 감겨 있었지. 가끔 잉크가 나오지 않는 꼬리도 있었거든.

 털 있는 것들은 다 붓 같다. 뒹구는 곳마다 가려운 흔적이 떨어져 있는 파지 눈을 가로로 혹은 세로로 뜨는 족적(足跡)을 새기고 담장 밑 봄은 천천히 굳어 갔지.

 심심한 수염, 혼자 놀고 있는 꼬리의 집필.

 비릿한 줄 간격을 쓰고 까끌까끌한 필체까지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한 수염의 자서전. 햇볕은 난간을 지나가고 검은색에 흰 털이 듬성듬성 박힌 봄, 또래가 없이 꼬리를 끌고 다니는 스프링의 몸통. 거만한 간격의 줄거리가 낱장으로 울어 대던 봄밤.

 채마밭이 딸린 마당이 백이십 페이지 분량으로 묶이고 떨어진 꽃들을 주워 마침표로 사용했지.

 채마밭은 훼손되었고 배추흰나비들이 읽다 만 페이지처럼 접혀 있었지.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한 책은 난간이라는 제목.

<묘(猫)의 방식으로 집필> 전문

백 리 만큼의 시간과 거리가 끌고 온 시집이었습니다. "봄밤"과 "털 달린 꼬리"도 있었고요. (읽을 때 어감이 좋아요-) 게다가 고양이의 방식으로 집필했다니, 이 얼마나 오래도록 품어 왔을 이야기들일까요.

『백 리를 기다리는 말』, 박해람 (민음사, 2015)

제가 생각하는 시의 묘미는 게으르게 읽는 데에 있습니다. 종이가 누렇게 바래도록 천천히요. 아무리 좋은 시집도 한꺼번에 다 읽어버리면 체하기 마련이니까요. 글자 하나며, 모퉁이 여백을 두고두고 봅니다.  온몸으로 쓰 .(  ) 면 온몸으로 읽는 게 룰이라면 룰요. 그러다 보면 어떤 문장이나 장면이 오롯이 나와 마주하는 순간이 생겨나기도 해요.



오늘의 브런치를 마치며, 저를 멈추게 했던 한 구절을 더 소개하려 합니다.


마음이 먼저인지 눈길이 먼저인지 모르게 오래도록 닿아 있던 부분이었습니다.

이 말들은 대체 어떤 길을 지나서 저에게 찾아온 걸까요.

끊어야 되는 것이 어디 손끝의 구름만 있겠습니까.
나는 가는 길을 지울 테니
거기는 오는 길을 지우기 바랍니다.

<창문을 눕히려 눈을 감는다> 일부


* 본문 중 "(큰 따옴표)로 표시한 부분은 시의 일부를 가져다 쓴 것입니다.


<홀연히 오롯이 고양이> Brunch 매거진에서는

    고양이를 모티프로 한 시나 소설 등 글로 쓰인 작품들을 골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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