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를 운영하며 전 세계를 여행하는 친구가 있다. 몇 년 전 봄철에 이 친구에게 봄이 되면 어디 좋은 곳으로 가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좋은 곳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평생 동안 여행을 업으로 삼아온 이 친구의 입에서 인상파 화가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프랑스 남부 지역, 벚꽃이 만개하는 일본, 거대하지만 관리상태가 좋은 미국 등 선진국의 경치 좋은 장소들을 추천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뜻밖에도 우리나라의 남해안을 추천했다. "전 세계를 돌아다녀 봤지만 4월에서 5월 사이에는 우리나라 남해안보다 아름다운 곳은 없다"는 말이었다. 당시에는 나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해안을 다녀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거제도에서 봄철을 보내며 나는 그 친구의 말이 진실임을 깨달았다. 서울 등 도시에서만 살았던 나는 봄이 되어 산과 들이 초록빛으로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도 이렇다 할 감흥을 느낀 적이 없었다. 도심의 빌딩만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인지 산이며 들이며 봄이 되면 갈색에서 녹빛으로 갑작스럽게 바뀌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백화점에 가면 사 입을 수 있는 기성복처럼, 새봄의 신록이란 완제품처럼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봄철 거제도에서 산을 바라보면서 이 신록이라는 것이 변화무쌍한 빛깔을 띠면서 성장해나가는 것을 발견하였다. 처음에는 연한 연두색이었다가 점차 색깔이 짙어지더니 마침내 짙은 녹색으로 성장했다. 연한 초록, 노란 초록, 푸른 초록, 검은 초록, 보랏빛 초록, 밝은 초록, 어두운 초록, 빛나는 초록... 초록색 종류가 그처럼 많은지는 미처 몰랐다. 부분 부분, 이곳저곳 조금씩 색깔이 변해가며 점차 강인한 생명력을 획득해 나가는 광경은 볼 때마다 새롭고 놀라웠다. 매 순간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자연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마치 하나님이 진흙에 숨을 불어넣자 천천히 눈을 뜨고 일어서는 인간이 생각나게 했다.
그 이후 매년 봄이 되면 거제도에 가서 매 순간 변해가는 먼산의 신록들을 바라보며 감동을 느끼고 싶은 생각이 솟아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