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시드니에서 귀국한 지 약 6주 정도 되었다. 그 사이 참 신기하게도 호주에서 만난 내 남자친구가 한국에 여행을 왔다. 약 8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 반가웠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남자친구와의 시간은 다시금 호주에서의 나의 시간들을 상기시켰다. 남자친구는 바로 어제 비행기를 타고 호주로 귀국했다. 그래서 그런지 잠이 안 오는 오늘 같은 밤에 브런치에 또 한 번 글을 남겨본다.
나는 참 나와는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외국인과의 소통을 흥미로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호주에 가서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나는 특히나 한국인인데 호주로 이민을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그들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오늘은 내가 시드니에서 만난 교민들이 어쩌다가 호주에 터를 잡게 되었는지를 적어보고자 한다.
첫 번째, 내 남자친구 이야기
내 남자친구는 한국계 호주인이다. 부모님의 이혼 후, 내 남자친구의 엄마는 아들 딸 둘을 데리고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된다.
필름카메라로 담은 본다이 비치
남자친구의 엄마는 호주에 도착해서 정말 궂은일을 다 하셨다고 한다. 아들 딸 둘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청소일, 식당 일 등등 영어가 많이 필요 없는 일들을 하셨고, 어린 시절의 생활은 참 궁핍했다고 했다.
그래서 남자친구는 경제관념이 참 철저하다. 중학생 때부터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돈을 절약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
대학생 시절에도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를 했고, 졸업하자마자 칼 취업을 했다. 그래서 현재는 20대 중후반의 나이에 집도 있고 연봉도 1억이다.
아름다운 시드니의 노을.
사실 그 밖에도 여기 적을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내 남자친구의 어린 시절에 일어났다. 그 어린 나이에 정말 많이 버거웠을 텐데도 꿋꿋이 힘든 시간을 이겨낸 남자친구가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
맨리 비치에서 비치 발리볼 하는 호주인들
사실 호주는 한국만큼 놀거리가 많지 않다. 남자친구는 성인이 되고 난 후 한국을 두 번밖에 와보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 두 번도 나이가 많은 삼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서
고깃집 가서 고기를 먹고, 막걸리를 마시는 중년층 아저씨들의 문화만 배워온 내 남자친구...
그래서 나는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즐기는 놀거리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반지 공방도 가고, 셀프 사진관도 가서 커플 사진도 찍고 보드게임 카페도 가고, 방탈출 카페도 2번이나 갔다.
우리 둘 다 감기에 걸려서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남자친구는 8일 동안 참 많은 것을 하고 얼마 전 귀국했다.
우리는 현재 롱디 중이며, 앞으로 몇 개월을 못 볼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서로의 일상에 집중하며 언젠가 다시 보게 될 그날을 기다릴 것이다 :)
두 번째, 셰어하우스 집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
시드니에 살며 꽤나 많은 셰어하우스들을 거쳐 지나갔는데, 마지막에 내가 거주했던 셰어하우스의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아름다운 하버 브리지, 밤이 되면 더욱더 진가를 발휘한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은 2층짜리 하우스였고, 방 6개에 화장실 6개인 대저택이었다.
원래는 딸 두 명 그리고 친척들까지 다 같이 살았는데, 현재는 모두가 독립하고 그 큰 집에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만 지내시고 계셨다.
내 전 직장상사분이 그 동네에 몇 년 전 거주하셨는데, 큰 하우스에 빨리 은퇴하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매일 가드닝 하면서 사시는 걸로 유명한 집이라고 했다 하하
동생이랑 맨리 비치에서 먹은 피시 앤 칩스
왕년에 할아버지는 요리사, 할머니는 미용사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이스트우드 한인타운에 큰 식당을 운영하셨고, 그게 잘 되어서 사업을 확장해서 많은 부를 누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업이 잘 되어 호주의 어떤 갱단한테 납치를 당한 적도 있었다고 들었다.
아름다운 시드니의 기차역
30대에 어린아이 두 명을 데리고 이민을 오셔서 요리사라는 직업으로 성공을 거머쥐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셨을지 감이 안 온다.
과거에는 시드니 부동산 집값도 괜찮은 편이었어서 몇 채를 사두셨는데 지금은 집값이 많이 올라 은퇴 후 돈 걱정 없이 살고 계셨다.
두 따님 분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첫째 딸 분은 변호사였는데 홍콩남자랑 결혼했다. 그리고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홍콩남자가 바람이 나서 현재는 이혼하고 두 자녀를 홀로 키우고 계시는 싱글맘이라고 했다.
호주의 변호사는 워라밸이 너무 안 좋아, 선생님이라는 직업으로 전향을 하셨다고 했다.
화창한 어느 주택가의 모습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한테 외국인들은 한국인과 정서가 달라 책임감이 없으니 꼭 결혼할 거면 한국인을 만나서 결혼하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하하하
내가 살던 첫 번째 셰어하우스에는 마당이 있었다
그리고 둘째 따님분은 40대이신데 현재 간호사로 일하고 계신다.
알고 보니 유방암에 걸리셨던 슬픈 과거가 있었다.
호주 간호사는 돈을 많이 벌기로 유명한데, 사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돈이 많고 자가도 있으니 딱히 월급을 쓸 곳이 없다고 하셔서 참 신기하고 부럽기도 했다 하하
유럽에 사는 어떤 남자와 롱디 중이라, 내가 시드니에 머무는 동안 연차 내고 유럽 여행을 가셨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첫째 딸처럼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않고 그냥 솔로로 연애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둘째 딸이 승자라며 결혼이랑 육아를 굳이 할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하하
혼자 지내는 나한테 맛있는 반찬도 주시고, 때로는 밥도 챙겨주시고 참 감사하고 정다운 분들이셨다.
내가 살았던 파라마타의 리버.
나는 파라마타가 좋다. 개인적으로 서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다시 호주에 돌아간다면 나는 파라마타에 거처를 두고 살면 참 좋을 것 같다.
세 번째, 스트라필드에 사시는 50대 중년 한인 여성분 이야기
내가 인스펙션을 다니며 대화를 나누게 된 중년 한인 여성분이다. 이 분은 젊은 시절 좋은 대학을 나와서
한국의 대기업 계열 증권사에 유일한 여성으로 취업하셨다고 한다.
수입이 많았지만, 그 당시 여성이 증권사에서 일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남녀차별도 많이 당하고
또 한국기업은 여성이 길게 근무할 수가 없는 구조였기에 외국계 증권사로 이직을 희망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외국계 쪽은 영어를 잘해야 했는데 그분은 영어를 못하셨어서 어학연수를 뉴질랜드로 떠났다.
리드컴 역. 그리운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어 좋았던 곳.
뉴질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그곳의 평화로움에 반했고 그래서 거기서 5년 정도를 혼자 사셨다고 했다.
그분은 원래 비혼주의였는데, 똑같이 뉴질랜드에 이민 온 비혼주의 한국 남성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조금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아 호주로 넘어와 살고 계시는 것이었다.
나는 호주의 날씨가 참 좋다
그분은 호주에서 현재 회계 쪽 공무원으로 일을 하고 계셨다.
본인은 뉴질랜드에서의 삶과 호주에서의 삶이 참 만족스럽다고 하셨다. 한국에서 특히 증권사에서의 삶은 일분일초가 아까운 무한경쟁이었기에
그와는 상반된 이곳에서의 라이프가 너무나도 매력적이라고 하셨다.
다만 부모님을 자주 볼 수 없는 것이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고 말씀하셨다.
Glebe에서 혼자 먹은 오므라이스.
부모님을 자주 못 뵙는 것이 처음 젊었을 때는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늙어가는 부모님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셨다.
사실 지금 이 시점의 나도 그 부분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많이 고민이 된다.
파라마타에서 본 정말 아름다운 노을
하지만 이런 고민은 끝이 없고, 내가 어떻게 컨트롤할 수 없는 부류의 고민이기에 나는
이 고민을 놔주려고 한다. 아직 나에게는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자친구 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
사실 어디에서 사는지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마음가짐이 굳건하고 옳은 방향이라면 그 어디서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호주에서 만난 한인들, 그리고 호주인들과 이민자들, 외국인 친구들과 소통하며 한 층 넓어진 시야를 갖게 된 것은 확실하다.
각자 저마다 다양한 선택들을 내린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갖고 있는 그들만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이 있다.
나는 어떤 것을 제일 중시하는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더욱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