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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est cyclist Sep 26. 2018

내가 개발자라서 좋다. 왜냐하면,

6개월 차 응애 개발자의 회고




1. 이름을 짓는다. 

 

 개발자들이 말하는 '가장 어려운 업무’는 이름 짓기다. 코딩은 수 십명의 인물을 만들어 각자 엄청 쉬운 일을 시키는 것이다. 명절 때 내 이름을 헷갈려하던 이모처럼, 일 시키기 전에 얘네 이름 짓다 보면 진이 다 빠진다. 비단 코딩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세 개의 IT 스타트업을 거치며, 나는 작은 기능, 새로운 서비스, 그리고 하나의 회사 이름까지 지었다. (내가 대표는 아니지만 그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증도 나왔다!) 무언가를 세상에 나오게 하고, 다른 이들이 그를 부를 이름까지 지었으니, 얘들은 정말이지 ‘내새끼’다. 

너! 가서 그거 처리해! 아니 너, 그 너, 아 그 너 뭐시기 너!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창조의 마지막 단계다. 물론 이름을 미리 지어놓고 뭔가를 만들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름만 있는 ‘무언가’란 없다. 지칭의 대상이 존재하고, 그 대상을 사람들이 알기에 그 이름이 남아있다. 이게 뭐라고 찌르르 할 때가 있다. 나는 무언가를 창조하고, 그 이름을 짓고, 세상에 내놓고 있다. 


2. 게으른게 좀 덜 부끄럽다. 

 

 게으름은 개발자에게 참 도움이 된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누군가가 하는 일을 보고, ‘우와, 이걸 다 직접? 진짜 귀찮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건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이다. 내가 이 팀의 개발자니까. 고객의 입장에 대입해보기도 쉽다. 새 버전을 테스트 해보다가, ‘그냥 이거 좀 귀찮은데요’라고 자주 말한다. 이따위 피드백도 이해해주고 반영해준다! 우리팀 앱 개발자들에게 늘 고맙다. 사랑해요... 

그 버튼은 제 엄지가 안 닿아요. 아니 제 길이 탓하지 마시고요!

 남을 돕겠다거나, 누군가의 삶을 윤택하게 하겠다거나 하는 거창하고 봉사적인 정신이 아니다. 그냥 나도 귀찮으니까, 남의 귀찮음에 꽤 쉽게 공감이 될 뿐이다. 그리고 내 게으름이 누군가를 편하게 만드는데 조금 기여한다.  나는 누군가의 퇴근을 몇 분 정도 앞당겼을지 몰라. 


3. 내 모니터가 보여도 괜찮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셋 중 하나는 디자이너고, 셋 중 하나는 개발자다. 입사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디자이너의 모니터를 보고 ‘우와 진짜 예쁘네요’한 적이 있다. 내 딴에는 칭찬이니 못할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헐 못할 것이었다. 나중에 디자이너와 이야기 해보니, 디자인은 중간 산출물을 한 눈에 평가할 수 있고, 그게 불편하다고 했다.  

삽질 할 땐 밝기를 줄이자. 통장 잔고 확인할 때처럼.

 물론 개발도 삽질 중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다. 똑같은 걸 테스트 하고 있다거나, 에러를 그대로 복사해다가 구글에 쳐보고 있다거나, 그런 것들. (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자의 모니터를 딱 보고 무얼 하고 있는지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난 10명이 오가는 통로에 앉아 있지만 그게 크게 신경쓰이지는 않는다. 안 그래도 집중력 낮은 내가, 중간 과정이 다 드러나는 직업이었다면 자주 괴로웠을 것이다. 



음, 팀장님이 보시면 비웃으실 것 같은데.



cover image (Photo by Dlanor 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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