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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an Apr 27. 2022

4월의 끄트머리

짧디 짧은 봄 중에서도 가장 봄 같은 순간을 꼽으라면 고민 없이 4월의 끄트머리다.

올해는 빠른 더위에 4월 봄바람이 벌써 답답해져 버린 기분이지만 원래의 이 때는 가장 싱그럽고 가장 여리한 연둣빛이 피어나는 귀한 때이다.
 

화려한 꽃나무들이 한바탕 세상을 수놓았다가 10일을 못 버티고 꽃을 떨궈내는 것처럼,

청순하게 반짝거리는 연두색 잎들도 얼마 못가 5월이 오면 묵직한 초록으로 커버리고 만다.

3월에 피어나는 것들이 힘든 겨울을 이겨내 내가 굳이 보탤 게 없는 강인한 인동초 같은 느낌이라면,

4월에 피어나는 것들은 모자람 없이 사랑받고 자라 세상모르는 해맑은 아이의 웃음이다.
행여 내 손길에 잘못될까 조심스럽고, 금방 커서 내 곁을 떠날 것만 같아 더없이 애틋하다.


연한 톤의 캔버스 단화, 가벼운 연청, 적당한 니트 가디건 같은 것들이 좋은 계절이다.
퍼퓸보다는 코롱이지만 르 라보의 장미나 오렌지꽃이라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다.   

베토벤 전원 1악장의 도입부는 아지랑이와 꼭 닮아 평소 교향곡을 듣지 않아도 이때만큼은 들어봄직하다.
브람스를 좋아해도 지금은 슈만이고,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해도 지금은 슈베르트다.
다 관심 없다고 한다면, 그래도 스텔라 장의 사랑, 바게트, 파리는 들어봤으면 좋겠다.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읽었어도 이 계절이 오면 피천득의 수필집은 잊지 말고 달력처럼 꺼내 두어야 한다.
거기에 김연수가 됐든 하루키가 됐든 수수하고 산뜻하게 쓰인 문장이라면 그게 누구여도 좋으니 한 권 더 찾아보자.
 

이 계절은 일관되게 여려야 하므로 녹차를 마셔도 우전이나 세작이고, 홍차를 마시면 다즐링이어야겠다. 평소에 산미를 좋아하지 않아도 이때만큼은 산미 있는 커피를 차게 해서 한 잔 마셔보자. 당신 안에 봄 향기가 은은하게 퍼질 것이다.
   
기분 좋은 봄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쯤에는 청량한 소비뇽 블랑을 한 병 사야 한다. 개성 있는 들꽃향 가득한 내추럴 와인이면 조금 더 팬시해질 수 있고, 멋진 어른이 되고 싶은 기분이라면 너무 무겁지 않은 싱글몰트를 추천 받아보자.


조금 취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누가 뭐라든 당신은 지금 술에 취한 게 아니라 4월에 취한 사람이고,

4월이란 계절은 날숨에 섞인 알콜 냄새조차도

살랑이는 봄바람에 향긋하게 날아갈 계절이니 말이다.


22.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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