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an Oct 10. 2022

노을

공기가 맑은 날은 아침부터 노을이 설렌다. 사실 그런 날은 하루 어느 때를 꼽아도 빠짐없이 모두 황홀하지만 내 원픽은 역시 노을이다.


노을의 마법은 해가 기울면서 시작된다. 하늘 높이 떠있던 해는 땅에 가까워지면서 빨갛게 익어가는데, 계란 노른자가 빨간색이었다면 꼭 그렇게 생겼을 것만 같아 난 그런 해를 빨간자라고 부른다. 빨간자는 땅과 가까워지면서 점점 땅에 짓눌리며 일그러지고, 이내 그 일그러진 틈 사이로 빨간자를 가득 채우던 빛이 스며 나오기 시작한다. 한 번 흘러나오기 시작한 빨간빛은 삽시산에 넓게 퍼지고, 그렇게 빨간빛과 파란 하늘이 뒤섞이면서 마침내 하루 중 가장 신비롭고 오묘한 빛깔이 시공간을 가득 채운다.


태양과 땅이 만나는 마법은 사실 새벽녘에도 펼쳐진다. 하지만 그 시간의 나는 대개 잠들어 있고 혹시나 깨어있더라도 일출을 보는 것은 노을을 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적어도 나에게는). 그나마 주공 5단지 아파트에 살 때에는 가끔 밤을 새운 뒤 올림픽로를 세로 지르는 압도적 일출을 보곤 했었는데 석촌동 빌라촌으로 오고 난 뒤로는 조금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태양만큼 빛을 내진 못하지만 달 역시 땅에 가까울 때 좀 더 특별해진다. 일단 엄청 커진다. 서울 한복판에서는 대부분 건물에 가려져 갓 뜨는 달을 보기가 영 쉽지 않지만 몇 해 전 한강을 건너면서 봤던 갓 뜬 달의 크기는 정말 어마무시했었다. 그래 봤자 달 아니냐고 하겠지만 진짜 왕, 왕왕 크다. 색깔도 훨씬 진하다. 어릴 때 먹었던 부루펜의 색깔이 생각나기도 하고 갓 구운 따끈한 빵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그것들이 그 순간에 특별할 수 있는 이유는 마땅히 하늘에 있어야 할 것들이 땅에 닿아있는 순간이어서 아닐까 싶다. 특별함이란 결국 예외, 소수, 비전형 이런 것들이 옷만 바꿔 입은 것일 테니까. 아이러니한 것은 태양은 하늘에 있을 때 가장 생산적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생산을 다 하고 땅에 곤두박질치는 때라는 것. 그런 점에서 미스터션샤인의 김희성이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탐했던 것은 무척 와닿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2. 7. 27.


매거진의 이전글 이해라는 환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