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런던을 좋아합니다.
런던이라는 도시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군대 제대 후에 냅다 휴학을 때리고 1년 동안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적이 있을 정도예요. 사람들이 다들 궁금해했습니다 런던이 왜 좋냐고. 하지만 선뜻 대답이 나오질 않았어요. ‘그냥’ 좋았거든요. 물론 쥐어짜 보면 좋아하는 이유 몇 개는 댈 수 있을 겁니다. 일요일 오전 노팅힐에서 먹는 브런치라든지, 리젠츠 운하 앞에 테라스를 내놓은 5층짜리 아파트에서 친한 친구들과 함께하는 저녁이라든지, 픽시를 타고 햄스테드 히스까지 가서 자전거와 함께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눕는다든지 하는 것들 말예요. 하지만 글쎄요, 그것들은 모두 제가 사랑하는 장면들이긴 합니다만 그것들 때문에 런던을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순서가 뒤바뀐 느낌이에요. 그런 장면들은 모두 런던을 좋아하고 난 뒤에야 알게 된 것들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돌고 돌아 ‘그냥’ 좋다는 대답이 정답인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확실한 결론 같아요. 런던이 좋은 이유를 머리로 깨닫기 전에 이미 제 마음이 런던 그 자체에 이끌린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머리보단 마음이 먼저 기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인가 봐요.
그런 맥락이라면,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돌이켜보니 제가 좋아하는 것들은 온통 첫눈에 반한, 마음이 먼저 알아버린 것들이었습니다. 단지 제가 사람에게 그래 본 적이 없을 뿐이었던 거죠.
그런데 당신을 처음 봤던 그때에는 제 마음이 먼저 알아버렸나 봅니다. 쪼그려 앉아있던 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서 이름을 말하던 모습이 저에겐 이토록 또렷한데, 당신에 대해 뭘 안다고 제 마음은 그 순간을 그렇게 선명히 저장해놓은 걸까요.
깨끗한 목소리와 단정한 태도가 좋아요.
꼼꼼한 일솜씨와 이야기할 때 눈을 피하지 않는 단단함이 좋아요.
그런 모습들에 마음을 뺏기는 것은 제가 유달리 출렁이고 덤벙대는 사람이라서일까요.
사서 일을 하셨던 게 멋져요.
그러다가 바리스타가 되신 건 더 멋져요.
샷을 맛보고 드립을 내려 레시피를 고민하는 진지함은 빛이 납니다.
한껏 진지하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엉뚱함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귀여우세요.
화분들에 깜찍한 이름을 붙여주는 것도, 동물 중에 고양이를 가장 좋아하는 모습도 제겐 벅차게 좋습니다.
당황스러우시겠죠. 아니면 이미 너무 티가 나서 알고 계셨으려나요. 어느 경우든 어이는 없으실 것 같아요. 이 정도면 금사빠 수준을 넘어서 하루에 서너 명 정도는 거뜬히 좋아할지도 모를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어요.
믿어주실까요? 저로서도 이런 적은 정말로 처음이랍니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고 물으셨을 때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덜컥 당신이라고 말이 튀어나올 뻔한 걸 꾸역꾸역 참아내느라 얼마나 고역이었던지요. 당신이 보기엔 우물쭈물하는 제가 그저 답답해 보였으려나요. 저는 충동과 이성의 피 튀기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저랑 처음 일하는데도 손발이 척척 맞아서 신기하다고 말하셨을 때에도, 제 캐릭터가 독특하다면서 웃으셨을 때에도, 저보고 친화력이 좋아 빠르게 친해진 것 같다고 하셨을 때에도 모두 특별한 말이 아닌데 저는 당신이 했던 그 한마디 한마디를 이렇게 곱씹고 있네요.
가끔 이런 당신이 부럽기도 합니다. 마음이 굳어있던 누군가를 이렇게나 설레게 할 수 있고, 또 누군가의 동경을 받는 존재니까요.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꿈꾸듯 해봅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마음이 크게 힘들었던 적도 있었고 제가 사용한 단어들만큼 단정하거나 단단하기만 한 사람은 아닐 거예요. 그러나 분명 그런 모습을 지니고 계십니다. 당신을 동경하는 사람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만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사실 이 편지는 전해서는 안 될 편지일 것입니다. 당신에겐 오래 만난 남자친구분이 계시니까요. 마음이야 제멋대로 피어나는 것이니 그걸 뭐라 할 수는 없다지만, 그 마음을 밖으로 꺼내는 것은 분명 또 다른 일이겠지요.
하지만 당신에 관해서 만큼은 초마다, 시간마다 하루를 성실히 애태웠어서 제 속은 이미 새카맣게 타버렸습니다. 그러니 끝끝내 마음을 못 이겨 기어이 이 말을 하는 저를 이해해 주세요.
저, 당신을 많이 좋아합니다.
22.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