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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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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an Oct 09. 2022

#1.

참 이상한 사건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지금보다 더 가난했고 나는 런던은커녕 외국에 나갈 생각조차 없던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내게 런던행 비행기표가 생겼다. 정말 갑자기.


엄마는 내게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보여주시면서 여름방학 동안 런던 근교에 있는 외숙모 댁에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뜬금없는 이 제안에 어디서부터 무엇을 궁금해야 하는지조차 감을 잡지 못했다. 일단 외숙모 댁이 런던 근교로 이민을 가신 건 알고 있었다.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나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우리 집과 한 동안 소원했었지만, 몇 년 전부터 다시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어 오고 있던 차였다. 영국에 가시고 운전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게 자리 잡히면서 생활도 그럭저럭 안정되어가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었다.


나랑은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기회가 되는대로 나를 외국으로 보내고 싶어 하셨다. 조기 유학을 보내 한국 사회에서 조금 더 유리한 위치에 서게 하려는 류의 목적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엄마는 어린 나이의 경험 한 조각이 한 개인의 역사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계신 분이었고, 그래서 항상 내게 일상에서 벗어난 경험들을 만들어 주고 싶어 하셨다. 그리고 아마 그중에서도 외국 경험을 제일로 꼽으셨던 듯하다. 




집이 잘 살았던 어렸을 때는 실제로 많은 기회가 있었다. 9살 때는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던 친구네 부모님이 나를 같이 데려가려고 하신 적이 있었다. 아마 친한 친구끼리 같이 외국생활을 하면 적응하는 데에 훨씬 수월하고 나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을 테다. 하지만 9살의 나에게 엄마랑 떨어져 몇 년씩 외국에서 보낸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고 나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10살 때는 당시 유행하던 여름방학 단기 연수 프로그램에 지인이 인솔자로 참여하게 되어 싱가폴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싱가폴은 거리부터 가까웠고 무엇보다 기간도 일주일의 초단기였기 때문에 나로서도 부담이 덜 했다. 그래서 냉큼 가겠다고 했고 싱가폴로 가던 비행기에서 난 내 인생 첫 기내식을 먹었다. 하지만 설레는 첫 기내식 경험은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았다. 청경채가 들어간 메뉴였는데 지금이야 다행히도 청경채를 매우 좋아하지만, 야채와 친하지 않던 어린이에게 청경채는 이름부터 식감까지 모든 게 어려운 음식이었고 기내식에서 느껴지던 특유의 향도 매우 낯설어서 온통 거북했었다. 결국 비행기에 내려서도 계속 속이 좋지 않았고 코에 한 번 배인 기내식의 냄새는 밤새 나를 괴롭혔다. 내 생애 첫 해외에서의 밤은 그렇게 탈이 난 채로 엄마와 집을 그리워하며 울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11살에는 무려 두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나랑 친했던 친구의 어머님은 굉장히 자주적 독립적 진취적 여성이셨는데, 그 해 여름방학에 본인 아들 둘을 데리고 밴쿠버에서 체류할 예정이니 혹시 함께하고 싶은 학부형이 있으면 각자 필요한 비용을 내고 합류하라고 제안하셨다. 비용 분담만 해준다면 두 달 동안 아이들 관리 등은 본인이 책임지겠다는 배포 있는 제안이었다. 우리 엄마를 비롯해 다른 한 분도 그 뜻에 동참하면서 마침내 밴쿠버 원정대가 꾸려졌고 그렇게 좌충우돌 두 달간의 밴쿠버 생활이 시작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성공이었다. 짧은 여행이나 연수 목적의 체류가 아니라, 몇 년 전에 한창 유행했던 '외국 한 달 살기', '현지인처럼 살기'같은 류의 생활 체류였던 만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가장 하이라이트는 로키산맥을 다녀온 것이었다. 제스퍼 공원과 밴프 공원의 대자연 아니 초대자연은 지금 사진으로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장관이었다. 차로 산길을 달리는데 온통 초대자연이 펼쳐져 있었고 가끔씩 커다란 사슴류의 초식동물이 길을 막고 차에서 사람들이 나눠주는 빵을 얻어먹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리즐리는 볼 기회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 어머님에게 존경심이 든다. 혼자 남의 집 애들까지 데리고 머나먼 해외로 떠나서 단기 체류할 집을 구하고 차를 빌려서 10시간이 족히 넘는 운전길을 혼자 독고다이로 운전해서 다니신 거니까, 지금 나보고 하라고 해도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로키로 가는 길은 정말 끝이 보이지 않은 평원 도로였는데, 그 풍경 자체도 인상적이었지만 만화에서나 볼 법한 어마무시한 번개가 번쩍 거리던 모습이 유독 기억에 생생하다. 하루 만에 쉽게 오고 갈 거리는 아니었던지라 중간에 숙박을 하기도 했는데 그야말로 원조 '모텔'에서 숙박한 기억도 난다.


그런 여행이 없는 날들은 어학원에 몇 번 나가기도 했고 그냥 도서관 구경을 가거나 아니면 하루 종일 집에서 책을 읽을 때도 있었다. 그때 열심히 읽었던 게 해리포터였는데, 당시에 나는 해리포터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한국에서 짐을 챙길 때 <마법사의 돌>만 가져갔었고 결국 그곳에서 <마법사의 돌>만 다섯 번 정도 읽었다. <비밀의 방>과 <아즈카반의 죄수>를 놓고 온 게 얼마나 후회가 됐는지.


어쨌든 여름 원정은 그렇게 대성공이었고 우리 멤버들은 벌써 다음 겨울방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성공 소식은 소문이 빠른 초등학교 학부형들 사이에 금방 퍼졌고 결국 2차 원정대 구성에는 인원이 한 명 더 늘게 됐다. 형식도 조금 바뀌었는데, 저번처럼 친구 어머님이 혼자 우리를 모두 관리하고 인솔하시기에는 아무래도 버거운 관계로 마침 밴쿠버 근교에 계시는 그분의 친척 집에 하숙을 하는 컨셉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여름과 마찬가지로 어학연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린 그곳 주민이 되어 수영장을 가고, 산딸기를 따먹고(?), 비디오를 빌려보고, 아이스하키를 구경하고, 위슬러에 스키를 타러 가기도 했다. 소소하지만 특별한 경험들이었고 시간이 이렇게나 흐른 지금까지도 그때 밴쿠버에서의 장면들은 소중하게 남아있다.


그러고 나서 몇 년 동안은 외국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러다 14살쯤이었나 엄마의 친구분 가족이 1년 동안 캘리포니아 어느 도시로 갈 일이 생겨 나에게 동행을 제안하셨다. 9살 때랑은 달리 더 이상 엄마와 떨어지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나는 뭔가 그 당시 내 생활의 안정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미국에 1년 따라갔다 오면 학교를 1년 ‘꿇어야’하는 것도 있었고 다녀온다고 해서 내 영어가 대단히 발전한다거나 할 것 같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앞으로 외국에 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미국행의 기회를 스스로 차 버렸고, 거짓말처럼 우리 집은 부도가 나버려 하루아침에 집도 차도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 이후로 당연히 내겐 외국에 갈 기회 따위 없었다. 애초에 그런 생각을 품지도 않았다. 급격히 변해버린 경제사정은 사람을 쪼그라들게 했고 잠재성, 가능성 같은 종류의 말들은 내 안에서 납작하게 뭉개졌다. 더군다나 집안이 망한 시점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수능 준비를 시작하던 시점이었으니 나로서도 EBS 수능특강을 공부하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비록 어릴 때부터 가고 싶었던 의대랑은 전혀 상관없는 경제학과에 가게 되었지만 어쨌든 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고 2010년, 나는 군 입대와 연애 말고는 딱히 시급한 일이 없는 심심한 대학 2학년이었다. 그러던 차에 런던으로부터 날아온 외숙모 댁의 초대는 엄마로서 머리가 번쩍 깨이는 소식이었을 것이었다. 반가운 벼락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엄마는 이 기회는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고 나도 엄마만큼의 절박함은 아니었지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런던행은 결정됐다. 이번에도 딱히 어학 같은 목적은 없었고 그냥 가서 지내다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어릴 때와는 달리 나는 21살의 대학생이었고 더군다나 다른 곳도 아닌 영국이었던 만큼 나로서도 무척 설레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대중적으로 영국 문화가 많이 가까워진 듯하지만 라떼만 하더라도 영국은 같은 영어권인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 비해 어딘지 멀게 느껴지는 나라였고, 보통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떠난다 해도 방금 말한 4개 국가가 대부분이지 상대적으로 영국은 드문 편이었다(내 주위만 그랬을 수도?). 물론 해리포터 세대가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이런 얘기는 너무 옛날 얘기가 돼버렸지만 그때는 분명 그랬다.


내게 찾아온 행운이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그랬는지 나는 정말 한심할 정도로 아무런 계획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가만히 학교에 다니다 가만히 기말고사를 치른 다음 가만히 짐을 싸서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경유였다. 캐새이 퍼시픽을 타고 홍콩으로 가서 다시 캐새이 퍼시픽을 타고 런던으로 가는 항로. 서울에서 버스 환승도 어려운 판에 비행기 환승이라니 뭔가 걱정부터 앞섰다. 더군다나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 없이 아예 홀로 하는 비행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서 더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비행기 안에서는 출발 당일 새벽 급하게 다운 받은 HBO의 <스파르타쿠스>를 봤다. 당시 <스파르타쿠스>는 매력적인 스토리, 몰입감 있는 전개, 파격적인 연출 등으로 굉장한 인기를 누렸었는데 그중에서도 그 파격적 연출이 친구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나는 파격적이어봐야 19금이지, 라는 마음으로 당당히 비행기에서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HBO의 19금은 내가 알던 19금이 아니었다. 그것은 파격이라기보다 거의 원시적, 원초적 장면들이었고...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하필이면 원시적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자고 있던 옆 사람이 깨거나 승무원이 지나가는 일들이 벌어져서 보는 내내 여러 가지로 불편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어이없는 것은, 이때로부터 3년 뒤 다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압도적 반전과 파격적(이라 쓰고 원시적이라 읽는다) 연출로 인기를 누렸던 HBO의 <왕좌의 게임>을 봤다는 것이다. 




긴 시간 비행을 마치고 비행기는 런던 히드로 공항 3번 터미널에 착륙했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려 긴장되는 마음으로 입국심사를 마쳤고 조금의 피곤함, 조금의 설렘이 섞인 마음으로 짐을 찾아 입국장으로 나갔다. 입국장 게이트를 나가니 4, 5 년 동안 보지 못해 몹시 어색한 사촌 형 둘이 굉장히 권태로운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 어색함을 어쩌면 좋지.


입국장에서 나와 우린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뉴몰든 외숙모 댁으로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야 한다고 했다. 버스는 생각처럼 금방 오지 않았고 우리 세 명은 괜히 너스레를 떨어보기도 하며 갑자기 닥친 어색함을 풀려 애썼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내 눈앞으로 빨간 이층 버스가 지나갔다. 여정의 피곤함과 형들과의 어색함 때문에 가려져 있던 히드로 공항의 밤 풍경이 그제서야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0여 년 만에 보는 외국의 풍경, 평생 들었던 것과 다른 억양의 영어들, 어딘지 다른 밤공기까지. 어느새 나는 런던에 와있었다.


어떤 이야기든지 첫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내 런던 이야기의 첫 장면은, 나에게 이곳이 런던임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준 히드로 공항 3번 터미널 앞의 빨간 이층 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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