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해를 믿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인간관계에서의 이해란 사람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라기 보단 하나의 지향점이나 이상향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노력의 과정 그 자체일 수는 있어도 결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차라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해라기보단 수용에 가깝지 않을까. 수용이라는 단어가 일방적이고 비인간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용이야말로 이해라는 이데아에 다가가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하고 용기 있는 실재다.
몇 번의 인간관계를 겪어오면서 지독하게 깨달은 사실은 모든 인간에게는 서로 각자의 우주가 존재하고 그 우주들은 철저히 상호배타적이라는 것이다. 서로의 교집합이 존재할 수는 있겠지만 그 조차도 각자의 세계가 투영된 결과물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종국적으로 그 사람을 형성하는 가장 중심에는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무한의 벽이 버티고 서있다. 수용은 이를 테면 그 벽을 인정하고 넘보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행동이다. 여력이 되는 범위에서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렇지 못하겠는 것은 단념하고 포기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대화는 많은 경우에 함정처럼 작용한다.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명제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통한 이해를 시도하다 결국 실패하고 이내 대화를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대화는 어디까지나 상대방과 나의 우주를 뒤엉키게 하는 적극적(포지티브) 수단이 아닌 상대방과 나의 불가침 경계선을 확정하는 소극적(네거티브) 수단이 되어야 한다. 실제 대화 내용이 그래야 한다기 보다도 대화를 통해 이루려는 목적이 이해라는 환상이 아닌, 나와 상대방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차이 확인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소모적 실망, 파괴적 환멸을 피하고 그나마 우리가 바라는 이해에 가까운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뭐 그렇게 정 없게 구냐, 낭만이 없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런 생각들은 모두 정을 지키고 낭만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하고 싶은 것들을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것들을 꾸준히 해내야 하는 세상의 절대적 법칙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건강한 유대가 형성되고 그것이 지속가능하려면 이런 과정들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어쩌다 요 며칠 이해라는 주제로 대화도 하고 다른 분의 글도 보게 되어서 나도 몇 자 끄적이고 싶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그나마 평소 생각이 정리돼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막상 글로 쓰려하니 나도 몰랐던 비약이나 모순들이 우수수…글쓰기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성찰이라는 누군가의 말에(누구였지?) 정말 크게 공감합니다.
그런데 어떤 주제에 대해서 나랑 비슷한 생각의 글을 보면 먼저 그 생각이 반갑다가도, 아 내가 먼저 세상에 내놓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이미 공자 맹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할아버지들이나 뭐 아무리 늦어도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같은 할아버지들이 다 말해놓은 것들이어서 뭐 내가 그렇게 억울해하고 아쉬워할 일은 아닌 것 같다.
22. 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