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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파파 Oct 14. 2021

타인의 감정을 먹고사는 사람들

텔레마케터와 인사담당자의 고충을 들으며... 

주말에 넷플렉스 영화 1~2편을 보는 편이다. 지난주 본 영화는 [혼자 사는 사람들]. 주인공은 카드회사 상담사다. 그녀는 수시로 걸려오는 이상한 전화에도 의연하게 대처한다. 으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베테랑답게 일사천리로 상담일을 끝낸다. 정신이상자의 장난질에도 본인의 감정을 섞지 않고 일정한 톤을 유지하며 전화를 끊는다. 




얼마 전 생명보험을 추가로 들었다. 아는 지인 누구누구의 소개가 아니라, 나이가 더 들기 전에 부족했던 보장 내역을 챙겨야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아내와 아들의 추가 보험까지 들고, 나도 비갱신형으로 20년 납입의 장기보험에 가입했다. 그 과정에서 보험에 관한 절차와 내용의 면면을 알게 됐고, 확실히 알아야 손해보지 않는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난주 완전판매 모니터링이란 서비스로 보험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하필 식사시간과 겹쳐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았다. 내가 생각해도 목소리는 약간 재수 없을 정도. 평소 그렇지는 않은데 그날 유독 마음이 심란하던 터였다. 그 불편한 마음은 고스란히 상담원에게 전해졌다.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친절하게 대하는 상대방 말에 겸연쩍은 나는, 좀 빨리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이내 속사포같이 읊어대는 상담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지난주 봤던 영화가 떠올랐다. 아무리 직업이지만 갖은 욕설과 비방을 견디며 감정노동의 최전선에 있는 분들에게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물론 무례한 말투는 없었지만, 스스로 친절과는 거리가 있는 투박하고 사무적이면서 딱딱한 말투에 화들짝 놀랐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최대한 공손하게 전화를 끊었다. 말미에 상담사 분과 여러 번 끝인사가 오갔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얼마 전 사무실로 인사팀 L군이 찾아왔다. 급여 때문에 수시로 전화를 받는데 힘들어서 못해 먹겠다며 하얗게 질려서 왔다. 그는 직원들에게 너무 화가 나고, 막무가내식으로 대하는 몰상식한 태도에 신물이 난다고 했다. 적당히 조율해줘야 할 상사들은 나 몰라라 한다는 중요한 사족을 달고서. 30분가량 속사포처럼 털어놓는 그의 무력감이 내게도 전이됐다. 

"형, 진짜 땅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 같아요. 내 몸이 왜 이러나 모르겠어요. 직장 동료들 모두 만정이 떨어져요."

"아무래도 번아웃 증후군 같은데... 몸부터 쉬라는 신호인 것 같아."

급여와 퇴직금 지연에 따른 불만 전화를 소화하느라 초췌해진 그의 모습이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비루한 감정을 털고 하루속히 마음이 평온해졌으면 싶었다. 나 역시 업무상 전화를 주고받다 앞뒤는 잘라먹고 다짜고짜 윽박지르는 상대방의 무례함에 불쾌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일을 수시로 겪는 L의 마음은 어떠할지, 생각만 해도 미안하다.      

 



요즘은 핀테크로 명명되는 기술혁신으로 모바일과 PC로 웬만한 금융업무와 행정업무는 쉽게 해결된다. 그럼에도 꼭 상담원과 유선상으로 통화할 때가 있다.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 묵시적으로 '감정'을 거래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누군가의 엄마이자 딸이고 아내일 텐데, 그런 감정노동자에게 나는 과연 떳떳한지 자문한다. 영혼까지 탈탈 털리며 일면식도 없는 타인들의 분노 게이지를 받아내는 그들의 인내와 헌신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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