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 없는 그 공허함에 대한 단상
"김 차장, 그러니까 내 입장을 이해해 줘. 과거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어.”
올해 4월 회사가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가면서 조직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막역했던 동료, 후배들도 제 갈길을 찾아 떠났고, 숱한 번뇌와 고민으로 일관하던 나는 여전히 현직에 머물러있다. 남은 이들은 구명보트에 승선하지 못한 낙오자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이 서글펐다. 그리고 6개월이 흐른 지금 나는 수시로 신임 팀장(기존 팀장은 좌천되어 타 부서로 전보 조치됐다.)과 티격태격 지난한 감정싸움을 하는 중이다. 지리멸렬하기도 하고, 짜증과 분노가 치솟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누르고 눌렀던 감정이 폭발했다. 여러 날 선 말들을 아끼고 정제해서 팀장에게 말을 던졌지만, 그런 예쁜(?) 말 조각 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새김도 갖지 못하는 빌 공(空) 자의 말일뿐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입장’과 ‘과거’ 타령이었다. 대화의 본질을 왜곡하지 말라며 윽박질렀다. 머쓱해하며 옷매무새를 갖추더니, 다시 원점이다. 벽창호가 따로 없다.
또 타 부서 모차장은 내게 예산 문제로 질의하다, 대뜸 내가 비아냥거린다면서 비릿한 감정을 쏟아냈다. 그날 종일 귓가에 맴돈 ‘비아냥’이란 단어가 떠나질 않았다. 회사 17년 차에 처음 들은 그 단어는, 나의 인격과 동일시되어 감당할 수 없는 무력감을 불러왔다. 처음엔 분노와 짜증 그리고 화가 치밀었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그런 휘발적이고 맹렬한 감정 대신, 이상하리만치 무력감이 내면에 꽉 차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런 무례함에 치를 떨면서도, 슬펐고 아팠다.
‘복마전’의 소굴들. 회사는 직급과 직책이 오를수록 업의 투명도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 ‘책임’을 강제하는 데, 이것이 기실 ‘양지’의 일만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쯤 되면 절이 싫어 중이 떠나면 그만인데, 떠날 곳이 없다는 점이 난센스다. 지금껏 지켜온 알량한(?) 신념과 배치되는 여러 요구들과 부딪히면서, 서럽고 안쓰럽기도 하다. 고고한 품격을 갖춘 대인은 아니라도, 적어도 ‘복마전’ 속으로 뛰어들기는 싫기 때문이다.
팀장 왈 “이것도 팀의 일이다. 난들 좋아서 하는 줄 아느냐. 옛날에는 이보다 더했다.”라는 식으로 은근슬쩍 넘어간다. 더 화나는 건, 내가 지적한 건 ‘이것’인데, 넌지시 ‘저것’을 대입해 본질을 왜곡한다는 데 있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면서, 울분은 쌓이고 혼자서 울림 없는 메아리만 계속되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 나보다 더 맹수같이 덤벼든 L차장은 강제 전보 조치됐다. 전임 팀장에 이어 연타석 유배다. 연대의 끈이 떨어진 나는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항명(?)하는 중인데, 옆 부서 친한 P차장이 나를 붙든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들이 네 말을 듣지도 않는다. 너만 손해다. 나중에 꼭 앙갚음하더라고…”
이곳은 이제 건전한 논쟁을 기반으로 희망을 논하고 발전을 갈구하는 통로는 없다는 말인가. 알토란 같은 인재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어찌 쭉쨍이들만 남아 도토리 키재기 식의 정치 훈수를 두고 있다는 말인가. 내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갖다 붙이는 그들의 논리가 궁색하기 짝이 없다. 입 바른말로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대가로, L차장의 강제 전보를 보고 깨달았다. 상식 이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유토피아적인 건실한 회사 생활을 꿈꾸는 것은 접었지만, 적어도 ‘쪽팔리게 살지 말자!’는 생의 철학은 건재하다. 뾰족하고 예리한 비수로 내 심장을 겨누는 벌레 같은 인간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겠지만, 나는 그들과 맞설 것이다. 적어도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지만, 견디고 또 참아낸다면 적어도 그 메아리를 곱씹는 일부라도 듣고 싶은 답을 주지 않을까. 혼탁하다 못해 시궁창이 되어버린 느낌. 입사 17년 뒤 얻은 더럽고 우울한 잔상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