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현타'의 발부리에 걸려...
"1월 24일에 출근하세요"
이직하는 곳에서 최종 통보가 왔다. 다니는 직장에는 아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여러 이유로 이직을 결심했다. 다니는 회사는 작년 4월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동시에 매각이 진행 중인데, 매각 성사 여부를 떠나 전망이 '매우' 불투명했다.
18년 가까이 다니던 익숙한 터전에서 스스로 물러난다는 것. 온갖 상상과 불안과 공포가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재작년 용종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는데 올해는 연초부터 이직의 중심에 서다 보니, 감정의 파고가 끝간 데 없이 오르내렸다. 잠시도 감정의 고요를 용납하지 않은 듯 호흡이 가팔라지고, 신경이 곤두섰다.
변화는 '숙명'이란 사실. 그 하나 믿고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떠나기로 했다. 겨울만 18번을 본 곳인데, 떠날 때는 단 사흘 만에 정리됐다. 단칼에 무가 '댕강'하고 잘려나가듯, 몸과 마음을 내어준 직장은 더 이상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웃고 울며 꽤나 정들었던 곳인데, '인연'이 덧없이 느껴졌다. 뭔가 마음을 내어준다는 것이 이토록 애달픈 일인지, '울컥'하고 치미는 감정을 꾸역꾸역 가슴속으로 밀어 넣었다.
새로운 회사에 입사한 후 두 달이 지났다.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렇게 다양한 감정이 들락날락한 적이 없었다. 늦은 나이에 찾아온 흔치 않은 기회와 변화. 하지만 '적응'이란 짧은 인고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지독한 ‘현타’와 ‘넋두리’의 상시화가 이어졌다. '변화는 숙명'이라고 그럴듯한 결심으로 실행에 옮겼지만, 현실은 고역의 연속이었다. 드러내 놓고 인간적 모멸감을 휘두르지 않았지만, '굴러온 돌'이라는 텃세와 '직무'의 이질감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서투른 조우 속에 나는 하루하루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사실은 내게 문제가 있었다. 낯섦이 당연한데 그걸 용인하지 않는 나의 졸렬함도 한 몫했다. 내면에서 견디기 힘든 관성의 작용이 무섭다. 그 관성은 죄다 이전 회사의 환경과 업무 그리고 동료들을 향했다. 게다가 전혀 새로운 직무와 팀의 리더까지 맡다 보니, 업무 파악은 차치하고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기에 결정타는 출퇴근. 왕복 3시간에 고속도로를 넘나들며 길에다 쏟아붓는 톨게이트 비용과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은 후회의 곱절을 상기시켰다. 나름 단단한 내성을 갖췄다고 자부했지만, 마주하기 힘든 현실 속에서 변화는 숙명이 아니라, 변화는 절망이라고 생각했다. 청춘의 무기인 열정이 증발한 40대 중반에 '이직'의 낯섦은 하루하루가 고되고 힘겨웠다. 자기 검열은 제쳐두고 정제되지 않은 말을 폭포수처럼 아내에게 쏟아냈지만, 더 이상의 새로운 기회는 없을 것이라는 암묵적 동의 속에 꾸역꾸역 현실을 인정하고 바닥을 다져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을 ‘탓’으로만 돌리는 나의 관성에 실망하며, 매일매일 '감사일기'를 쓰며 새겼던 세 가지를 약방의 감초처럼 꺼내 들었다.
배움과 감사와 경험이 그것이다.
클리셰처럼 느껴지더라도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다. 배움의 진정한 뜻은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업'을 여기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느냐에 달렸다. 그만큼 배움의 가치는 헤아리기 힘들 만큼 인생의 소중한 동반자다. 지금 마주한 상황들(낯선 환경, 낯선 직무, 낯선 사람 등)을 배우는 데 의미를 두면서 지난한 현실을 슬기롭게 헤쳐나가고자 한다.
둘째는 감사의 마음이다. 기본 소득을 창출하고, 몸과 정신이 허락하는 한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후회의 나날 속에 와이프가 던진 일갈. "그래도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는 것이 어디냐"며, "일을 한다는 자체만으로 감사해야 하지 않냐"라고 말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그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이직'에서 부딪치는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일들도 감사한 순간들로 맞바꿀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경험. 태어난 시작점부터 죽음의 종결점을 하나의 선으로 잇다 보면 지금은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 않은 듯, 조직에 잘 적응해 순응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쯤으로 여기고, 여기에 경험의 가치를 각인한다면 나에게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일단 '일 년만 버티자'는 심정으로 일터로 향한다. 그리고 회사 옆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주말부부로 탈바꿈한 셈인데, 7살 아들이 눈에 밟히지만 앞서 언급한 세 가지를 통해 이직의 허들을 낮춰갈 것이다. 솔직히 46살에 옮긴 이직의 쓴맛이 일 년 후 어떤 의미로 다갈올 지 모른다. 그 결괏값은 일 년 후 다시 셈할 생각이다.
46살의 이직은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그럼에도 나는 움직였다. 그리고 행동으로 표출했다. 등 떠밀려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선택했다. 이 선택의 종착점이 궁금하다. 배움과 감사와 경험의 과정으로 여기면 얼마든지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지금 주어진 불편함과 스트레스를 애써 멀리하지 말자. 다만 생각의 프레임을 어떻게 직조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라고 여기자. 그것만으로 '이직'의 고지를 정복할 날도 머지않았음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