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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파파 Apr 26. 2022

'팀장' 이란 그 낯섦에 대하여

신임 팀장의 좌충우돌, 새로운 자유를 꿈꾸며...

"오늘 9시에 2번 회의실에서 팀 미팅합시다."


올해 1월 24일 새로운 직장에서 적응하기도 벅찬데, 지난 3월 1일부터 팔자에도 없는 팀장 보임을 맡았다. 물론 정식 발령은 아니고, 6월 말까지 한시적 팀장 대행이다. TFT 통합운영으로 차출된 팀장님의 빈자리를 메우는 셈인데, 이게 시작부터 만만치 않다. 아직 사람들을 아는 것도, 업무 파악을 한 것도, 거기에다 회사 프로세스를 익히지도 못했는데, 팀장이라니. 지인 중 한 명은 실무보다 팀장 하는 게 나을 거라며 덕담을 건넸지만, 시시각각 엄습하는 '팀장'이란 직책의 무게감은 비할 바가 아니다.


기존 직장에선 때때로 팀장과 대립각을 세우며, 약간은 가시 같은 존재로 각인됐는데 이제 상황이 역전됐다. 내가 그런 가시들을 하나씩 받아 안으며 온 몸에 생채기를 새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팀 회의를 소집했는데, 첫마디 떨어지기가 힘들었다. 업무와 연관된 어젠다로 들어가기보다는, 일상의 소재(날씨, 취미, 주말 계획 등)들을 끄집어내며 나름 '우회도로'를 만들었다. 하지만 웃음을 유발하고 긴장을 낮추려는 나의 애씀이 '썰렁'과 '이질감'으로 대신했다. 어째 수습하기 쉽지 않은 듯, 마치 곁길로 빠진 듯한 회의(會議)에 회의(懷懷)감만 들며, 재빨리 업무로 화제를 돌려야했다.




가장 힘든 점을 꼽으라면, 타 부서의 몰염치와 무례함에 맞서는 것. 하지만 내게는 강철 같은 거부의 갑옷과 철옹성 같은 무시의 방패가 없었다. 조직에 순응하며 단단해지는 '담금질'이란 무기가 쥐어지지 않은 상황, 시쳇말로 무장해제된 상황에서 나는 타 부서의 승냥이들로부터 먹기 좋은 멋잇감이었다. "김 차장님, 잘 모르시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래요. 이것 좀 해 줘요.", "김 차장, 이전 직장에 있던 관습 버려야 해. 안 그럼 여기 못 있어.", "이건 우리 일 아니니, 알아서 하세요."


쏟아지는 말 폭탄의 투하 속에 오롯이 견뎌야 했다. 물론 나를 여기로 끌고(?) 온 본부장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보고했지만, 내가 뱉어내는 언어의 결은 현 조직에서 통용되는 텍스트가 아니었다. '현타'가 수시로 노크하던 시기, 나는 유일한 탈출구인 와이프에게 연락해 '위로'와 '이해'를 청했다. 하지만 아내는 잦은 나의 볼멘소리에 지쳤는지, "그럼 그만두라"는 말을 꺼내 들었다. 그런 좌충우돌의 지난한 시간을 보낸 후, 지금의 나는 가랑비에 옷 젖듯 '익숙함'이 전신에 스며들고 있다.




며칠 전에 한 직원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차장님,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제가 돈을 더 벌어야 해요. 함께할 수 없어 죄송합니다." 느닷없이 찾아온 당혹과 정적의 시간. 이전 직장에서 '객'이 되어 이런 상황을 여러 번 목격했지만, 내가 '주'가 될 줄은 몰랐다. "그래요? 직장은 구했어요?" 애써 넘실대는 감정을 억누르며, 나는 나름 진중한 팀장 코스프레로 변검해 그에게 물었다. "네, 누나가 사는 인천 근처에 직장을 구했습니다." 일사천리로 사직서를 수리했지만, 당장 그가 담당하던 업무부터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신경이 쓰였다. '에고, 팀장 노릇하기 쉽지 않네.' 하릴없이 터져 나오는 한숨을 거둬들이며, 직장 생활 18년 간 스쳐간 10명의 팀장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예측할  없는 '변수' 상숫값으로 여기며 팀장 직책을 맡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몰려온다. 그러다 보니 자존감과 자신감이 급전직하하는 우울감을 겪기도 한다. 능력의 부재가 부채감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인생의 허무를 불러오는 악수가 된다. 때문에 인생의 결을 가능하면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치환해 보지만, '변수' 점철되는 팀장이란 직책의 낯섦이 당혹감을 안긴다. 박학다식한 지식과 농밀한 경험 그리고 전화위복의 지혜로 현실을 타개해 나가고 싶지만, 결국 마지막에 닿는  언제라도 조직에서 이탈될  있다는 미래의 불안감이다.


그럼에도 믿는 구석이 있다. 지금 마주한 현실 역시 내가 살아가는 데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삶의 일부'라는 사실. 책망하지 않고, 부정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까짓 거 크게 심호흡 한 번 하고 당당하게 가자는 의지의 추앙. 그리고 시간 속 사건사고가 중첩될수록, 변수가 상수로 자연스럽게 치환되는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쯤 또 말할 것이다. '이제는 이 익숙함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또다른 변화를 갈망하는 소리를.' 그때는 또 새로운 '자유'를 꿈꾸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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