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든스 베이, 유니버셜 스튜디오 … 랜드마크를 오가며
올해 폭염에 지칠 무렵, 때마침 TV속 홈쇼핑 여행 상품이 나왔다. 싱가포르 3박 5일, 자유여행 하루. 특가라는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며, 호스트의 멘트에 강렬한 여행 욕구가 밀려왔다. ‘그래, 올해는 꼭 한번 가야지…’ 옆에 있던 아내에게 의견을 물었고, 초등학교 2년 아들이 단 한 번도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는 터라 쉽게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학교 친구들 사이 해외여행 자랑에 주눅 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결혼 10주년과 겹친 덕에 예약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문제는 타이밍과 비용이었다.
부러 연차를 내지 않고, 회사 하기휴가에 맞춰 8월 초에 가는 것으로 정했다. 여행사 노랑풍선 담당자와 여러 차례 조율을 거쳤고, 자유여행은 유니버셜 스튜디오로 아이의 눈높이에 맞췄다. 아들은 첫 해외여행에 비행기를 타는 터라 기대감이 컸다. 아내도 치안이 좋고 깨끗한 싱가포르라는 여행지에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드디어 8월 6일, 인천공항 2 터미널에 사설 주차대행업체에 차량을 맡기고 캐리어 2개를 끌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공항 특유의 분위기에 어느덧 여행객으로 분해 마음은 콩밭에 갔다. 대한항공 오토체크인으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드디어 탑승. 오후 6시 40분 인천발 비행기는 새벽 1시 30분경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에 도착 예정이었다. 기내 음식을 먹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드디어 도착.
하지만 뜻하지 않은 불청객이 있을 줄은 몰랐다. 고도로 인한 기압차로 아이의 왼쪽귀에 먹먹한 증상과 이명이 발생한 것이었다. 지금도 가끔 괴롭히는 그 후유증은 여행의 후회로까지 점철됐다. 솔직히 착륙 직후부터 여행 내내 아이를 괴롭혔고, 한국에 와서도 오랜 기간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오롯이 여행을 즐기지 못하는 것도 부모 탓인 것 같고. 미리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놓친 부분 중 하나였다.
싱가포르 입국수속을 끝내고, 가이드와 만났다. 오랜 경력의 베테랑으로, 짧게 자른 머리와 어울리는 아들을 보자마자 귀엽다고 반색하는 모습이 비즈니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일행 분들과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해 첫날의 여정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조식을 챙겨 먹고, 아침에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후, 가이드와 함께 패키지 투어를 시작했다. 우리 아이가 최연소자라 투어 내내 귀염과 사랑을 많이 받았고, 일행들과 헤어질 즈음엔 다들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작별인사를 고했다. 부산, 거제, 서울, 인천, 광주, 평택 등 전국각지에서 모였고, 여행사도 노랑풍선, 롯데관광 등 다른 여행사와 함께 일정이 만들어졌다. 일단 패키지 투어는 그룹핑으로 일정을 소화하는 경우가 흔한 듯했다.
날씨는 한국의 여름날씨와 비슷했고, 습도 역시 높은 편이라 야외에서 오랜 시간 보내긴 힘들었다. 첫날 리버스 동물원을 시작으로 가든스 베이, 스카이 파크 등 싱가포르의 랜드마크를 둘러보며 일정을 소화했다. 다소 빡빡한 스케줄로 아들은 힘들 법도 한데 내색하지 않고 씩씩하게 일정을 소화했다. 나 역시 마치 고등학교 수학여행처럼, 버스를 타고 오르며 행선지를 둘러보는 여정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만끽했다. 덕분에 부족했던 가족사진을 대거 찍을 수 있었고, 해외에서 맞는 여러 순간을 공유하며 찰나에 감사함을 느꼈다. 아이의 시선으로 보는 싱가포르의 세계는 또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고, 아내는 아내대로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했다.
다음날은 자유여행. 요즘은 이렇게 하이브리드 형식으로 패키지와 결합된 상품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동안 이 핑계 저 핑계로 해외에 나갈 엄두도 못했는데, 오롯이 가족끼리 하루를 낯선 타지에서 보낼 생각을 하니, 자유와 편안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미리 모바일 앱 쿨럭을 통해 예매한 유니버셜 스튜디오로 향했다. 샌토사 섬으로 들어가는 초입까지 다시 한번 깨끗하고 정갈한 싱가포르 거리에 감탄했고, 생수 한 병이 4천 원에 이르는 물가에 놀랐다.
6가지 테마로 구성된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남녀노소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대부분의 어트랙션에 긴 줄은 기본이고, 작열하는 태양과 높은 습도에 우리는 커피숍과 음식점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원기회복에 충실했다. 겨우 3가지 정도의 놀이기구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온 시간은 오후 4시. 10시에 입장했으니, 꼬박 6시간을 보낸 셈인데, 절반도 둘러보지 못했다. 사실 용인 에버랜드 놀이기구가 더 스릴 있고 재밌다는 공감과 함께, 우리 가족은 다시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인근 한국 식당에서 삼겹살로 배를 든든하게 채운 후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여행 마지막 8월 8일. 이 날은 공교롭게도 한국의 광복절과 같은 싱가포르 독립기념일과 겹치는 바람에 시내 곳곳에 행사가 많았다. 우리 일행은 가이드를 따라 케이블카, 윙스 오브 타임 공연, 차이나타운 등을 방문하며 일정을 소화했다. 싱가포르의 시그니처 푸드인 칠리 크랩까지, 많은 양은 아니지만 잊을 수 없는 맛에 만족은 배가 되었다. 저녁 식사 이후 창이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일행은 제주항공, 아시아나항공, 대한항공까지 비행 노선이 제 각각이라 출발 시각과 터미널이 달랐다.
우리 가족은 대한항공에서 짐을 부치고 한참을 탑승 시간까지 대합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이륙시간인 새벽 1시 40분. 대기 라운지 소파에 잠시 쪽잠을 청하던 아들도 선잠에서 깨어나 비행 좌석에 앉았다. 왼쪽 귀가 불편해 가끔씩 귀를 만지던 아이도 한국에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코노미 좌석 특성상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한 나는 비몽사몽.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인천공항에서 차량을 인도받은 후, 2시간에 걸쳐 필사적으로 집까지 운전했다.
화요일 저녁에 출발해 토요일 아침 도착, 그리고 곧바로 이비인후과로 향한 그날은 몸의 신진대사가 무너진 상황이었다. 몰려오는 졸음과 사고의 무감각 그리고 아이의 귀 걱정으로, 힘겨움이 쏟아졌다. 적잖은 경비는 차치해도 일상으로의 복귀가 급선무임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여행에서 마주한 경험과 느낌과 감정은 이제 가슴 한켠에 묻어두기. 다음을 기약하며 또 열심히 일상을 살아가기. 한차 지나서야 말하지만, 그 여행 후유증은 일주일이나 계속됐다. 아이의 귀도 점점 나아져, 아들은 2학기 개학에 맞춰 들뜬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아내는 아내대로 일상의 루틴을 공고히 하는 모습이다.
문제는 10년간 이런저런 핑계로 봉인한 해외여행의 판도라 상자가 열린 것. 내년부터 매년 가고 싶은 욕구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그리고 자유여행만 고집하다, 패키지의 편리함에 아무래도 방향 선회가 이뤄질 듯싶다. 여행사의 의도는 엿보이지만, 패키지와 자유여행을 혼합한 하이브리드 여행도 좋은 옵션인 것 같다.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는,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 남섬과 북섬을 샅샅이 둘러보는 것. 렌터카를 빌려 대자연의 정취에 취하고 싶고, 23년 전 뛰어내린 번지점프를 재도전해보는 것이다. 상상만으로 행복하다.